가톨릭일꾼운동, 지금부터 우리가 가야 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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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일꾼운동, 지금부터 우리가 가야 하는 길
  • 서민호 미카엘
  • 승인 2019.12.03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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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일꾼운동에 관하여-1

다음 글들은 1933년 세계경제공황 때에 미국에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가톨릭일꾼운동(Catholic Worker Movement)의 모습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1992년 7월부터 1999년 6월까지 <참사람되어>에 번역된 것을 <참사람되어> 2000년 1월호에 모두 모은 것입니다. -편집자

한국 교회에서는 “2000년대의 복음화”라든지 기초 공동체 및 그리스도인 소공동체 등등이 주요 화제거리가 되고 있다. 신자들에게 삶의 의미를 제공해주기 위해 애쓰는 교회의 모습이 눈에 띈다. 한국 교회의 사제들, 수도자들, 평신도들은 “지금부터 우리가 가야하는 길”을 찾아보자는 희망으로, 아프리카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 필리핀 등지의 교회 및 공동체가 기울인 노력과 체험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람들 가운데서 하느님을 섬기고자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글이 또 하나의 적절한 체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도로시 데이에 대한 책이 한국에 소개되었다고는 하나 적어도 「가톨릭일꾼」 운동의 원칙과 이론, 그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까지는 미처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제한된 지면이나마 이 글을 통해 「가톨릭일꾼」 운동의 대략적인 개관과 운동의 창설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던 이상(理想)은 무엇이었는지 제시해 보고자 한다.

 

사진=한상봉
사진=한상봉

1930년대 미국이 대공황의 격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무렵, 소작농 출신 철학가이자 자칭 가톨릭 급진주의자라 일컫던 피터 모린과 과거 공산주의 잡지 기자로 활동하다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도로시 데이에 의해 「가톨릭일꾼」은 시작되었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처럼 끊임없이 이웃을 사랑하고 공동체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자는 취지에서였다.

비록 「가톨릭일꾼」 운동이라 불리기는 하나 여타의 가톨릭 조직들이나 노동자 운동들과는 사뭇 다르다. 운동의 지도자나 본부가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설령 「가톨릭일꾼 환대의 집」들 사이에 일종의 연대감이 형성되어 있다 하더라도, 어떤 지침이나 정치적 강령을 갖춘 그런 조직망이나 계획, 운동을 확장하려는 어떤 회합도 없다.

비록 “가톨릭”이라는 명칭을 붙였다고 하지만, 그것이 종교적 기관이나 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주교나 사제의 지도를 받는 신자들의 단체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공동체의 모든 성원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라는 각자의 부르심에 응답하고자 그곳에 몸담고 있다.

「가톨릭일꾼」은 애덕의 실천을 수행하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며 “낡은 옛 껍질 속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활동한다. 도로시 데이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기나긴 고독”을 체험하게 되었고 도로시 데이는 그에 대한 응답이자 해답으로서 공동체를 생각했다. 도로시 데이는 당시 수도 공동체들이 그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왜 평신도들은 [그런 생활 양식으로] 나눔을 갖지 못하는지” 그 까닭을 알고 있었다. “단지 기본적인 가정 공동체에 머물러서는 안되고 가정과 가정 간의 공동체, 즉 사유재산과 공유 재산이 결합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도로시 데이)는 것이었다.

「가톨릭일꾼」은 다분히 이상적인 대학 출신들이나 지식인들, 그리스도께 자기 삶을 바치고자 결심한 사람들, 행려자들, 평화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의 공동체로서, 기도와 자선은 물론 사회-정치적 활동에도 적극 참여할 것을 강조한다. 도로시 데이가 누차 명백히 밝힌 바와 같이 공동체는 가난이라는 생활 양식을 선택했고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궁핍과는 구별된다고 했다. 물론 「가톨릭일꾼」이 선택한 가난에는 많은 불편이 뒤따른다. 낡은 집들이 많아서 항상 난방문제라든지 수도관 문제, 기타 집안 수리 문제가 끊이질 않는다.

「가톨릭일꾼」은 이름이 말하는 대로 노동자들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그 말은 막노동을 하는 사람이든 인텔리 노동을 하는 사람이든, 육체 노동을 하는 사람이든 정신 노동을 하는 사람이든, 그 모두를 가리키는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된다. 물론 우선적인 관심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둔다. 피터 모린이 자주 언급한 대로, 가난한 사람들이야말로 하느님의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서 “하느님의 대사(大使)”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같은 확신은 또한 예수 생애의 사건에서도 비롯한다. 그분은 마굿간에서 태어나셨고 손수 노동하셨으며, 첫 생애를 유배 중에 보내셨고, 남은 지상 생활을 조그만 목공소에서 보내셨다. 그분이 부르신 첫 사람들은 조그마한 배와 그물을 가진 어부였다. 그분은 일일 노동자, 이향 노동자, 여자들과 친하셨고 그분이 들려주신 비유 중에는 이러한 사람들의 실상에 대해 언급한 것도 있었다.

도로시 데이는 「가톨릭일꾼」의 “목표와 목적”에서 언급하기를 자비의 노동을 수행하면서 불의 앞에 침묵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의식화 해야 하고 우리의 신앙으로 확신을 심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 개개인으로 말미암아, 우리 각자가 추구하는 안락과 무사안일, 그리고 자기 취향에 따라 종교는 아편이 되고 만다… 의식화 작업을 하지 않으면 미래의 비전을 잃어버리게 된다. 비전을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단순히 고통을 잠시나마 멎게 하는 자선 사업가에 불과할 뿐이다. ... 그 비전이란 바로 이거다. 즉 ‘의로운 백성들이 사는 새 하늘 새 땅’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는 기도를 현실화 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적인 사회 질서를 (세우기) 위해 일한다."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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