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 루이스의 가톨릭일꾼, 어떻게 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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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루이스의 가톨릭일꾼, 어떻게 사나
  • 서민호 미카엘
  • 승인 2019.12.13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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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일꾼운동에 관하여-2

나는 수많은 세월을 교회와 떨어져 지내다가 최근에 교회로 되돌아온 젊은 대학생으로서, 1980년대 초에 비로소 「가톨릭일꾼」를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새롭게 접한 나의 신앙을 행동으로 실천해 보이는데 열심이었는데, 당시 세인트 루이스에는 세 군데에 「가톨릭일꾼 환대의 집」이 있었다. 캐스 하우스, 카렌 하우스, 리틀 하우스 등이 그것이다.

캐스 하우스의 절반은 아이들과 어머니, 미혼녀들을 위한 자리였고 나머지 절반이 식량을 배급받으러 온 남자 “손님”(집이 없어 「가톨릭일꾼」의 집에 머무는 사람들은 언제나 ‘손님’으로 불리웠다)들을 위한 자리였다. 2층 마루는 공동체 전체를 위한 경당과 생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그곳에 머물던 남자와 여자들이 사납고 거친 행동을 보인 탓에 서로 격리시킬 수밖에 없었고 식량도 따로 배급받아 먹었다. 가톨릭일꾼에서 생활비와 유지비를 감당하기가 너무 어려워지자 1980년대 후반 캐스 하우스는 문을 닫았다.

리틀 하우스는 말 그대로 아주 작다. 그래도 2~3세대가 장기간 머물며 쉴 곳으로는 넉넉한 편이다. 카렌 하우스는 3층 짜리 수도원 건물인데 더이상 수녀를 파견하지 못해 본당 수녀들이 방치해 둔 곳이었다. 수녀원에서는 그후에 그 건물을 싼 가격으로 「가톨릭일꾼」 공동체에 임대해 주었다. 그곳은 과부와 어머니들, 아이들을 비롯해서 가톨릭일꾼 공동체 대부분을 수용했다.

내가 가난하고 집없는 사람들의 궁핍한 실상을 정말 상세히 알게 된 것은 이곳에서의 자원 봉사와 노동을 통해서였다. “집 지키는 일”을 하면서 나는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일한다는 나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고 또한 미처 깨닫지 못했던 현실에도 눈뜨게 되었다. 물론 실업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쉼터를 찾아서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손님들은 자신들의 황금시절을 길거리에서 탕진해버리거나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었다.

마약과 술은 항상 골치거리였다. 일꾼의 집에서는 마약과 술의 반입을 금지시켰다. 그래도 만취하거나 마약을 흡입한 손님들이 밤 9시 넘어서 들어오는 일들이 잦았다. 알콜과 마약, 형편없는 음식 등등으로 이들 대부분의 행려자들은 의학적인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의 정신 질병을 앓고 있다. 환각에 빠져들기 시작한 손님들도 있었는데, 만약 제때에 치료받지 못하면 심각한 편집병 환자로 상태가 악화될 수 있거니와 간혹 미쳐버리기도 한다.

내가 보기에도 그들 중 몇몇은 병원의 부단한 관리 감독 하에 보호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되었으나 당시 레이건 대통령의 경제 정책은 오히려 이들 정신질환자들을 병원에서 내쫓았다. 겉보기에 그들의 존재 자체가 경제적 부담으로 작용한 탓이었다. 그래서 전문적인 지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돌볼 쉼터를 마련해야 했다.

 

나는 「가톨릭일꾼」에서 일하면서 어느 누구도 절대 내쫓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웠다. 굶주리는 사람들에게는 뭔가 먹을 것을 주어야 하고 헐벗은 사람들에겐 옷을 입혀주어야 한다. 누군가 혹 미쳤다거나 소란을 떤다고 해서 대뜸 경찰을 부르기보다는 -미국에서는 그런 훈련이 잘 되어 있다- 차라리 사랑과 비폭력으로 갈등을 해소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먹을 것과 쉴 곳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가혹하고 위협적인 것 투성이다. 나 역시 아무런 이유 없이 그들을 야유하고 비웃곤 했다.

「가톨릭일꾼」의 집에서 매일 일하면서 나는 다른 사람들을 배후에서 조종하거나 이용하는 일들이 어떤 것인지 깨달았고 이를 삼가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나와 (가난한) 손님들과도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미세하나마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곧 경제적인 문제였다. 학교에서 배우는 수업을 통해 이러한 것들을 배우기란 여의치 않다. 그러나 복음을 따라 참되게 산다면 당연히 깨닫게 될 일이다.

공동체 성원들은 나이와 직업이 천태만상이어서 그런지 사고방식도 제각기였다. 도서관 직원, 의사, 간호사, 철학도, 사진학 교수, 텍사스에서 온 유전(油田) 노동자, 성 요셉회 수녀, 변호사, 특별한 직업이나 전문 기술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 이렇다할 직업 훈련 한번 받지 못했던 여자 한 명이 교도소 사목을 시작해서 사형 일자를 기다리는 죄수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직업이 있는 공동체 성원들은 자기가 쓸 돈은 제하고 일정한 월급 액수-공동체와 상의해서 결정한 액수-를 공동체에게 넘겨주었다. 직업이 없는 사람들은 일꾼의 집 운영에 필요한 일들을 도와주거나 사회 운동에 자기 시간과 노력을 투자함으로써 이를 대신했다.

공동체에서는 임명된 지도자란 없다. 재정일을 맡아보고 식사 메뉴를 짜고 회의를 주선하고 수요일 저녁 전례를 계획하는 등등의 일거리들은 서로 번갈아 했다. 간혹 “책임자가 누구요?”하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나는 “책임자는 없습니다”하고 대답한다. “그러면 당신 상사는 누구요?”하고 물으면 나는 다시 “제 상사도 없어요” 하고 대답하는데, 그렇게 여러번 설왕설래 하노라면 마침내 방문객은 자기가 알고 싶었던 대답을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을 통해서 듣게 된다. 의사 결정은 철저한 합의제로 이루어지는 주간 공동체 회의에서 확정된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리긴 해도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문제를 해결하자는 방향에서 상호 동등하게 영향력을 발휘하고 발언하는 일은 필요하다.

‘애덕의 실천’에 관해 부언하면, 어떤 공동체 성원들은 1980년대의 평화운동-핵무기 반대 투쟁 및 미국의 니카라과 침략 후원 반대 투쟁-과도 깊은 관련을 맺었다. 이 투쟁은 1980년대 니카라과 문제와 관련해서 미국 시민과 미국 의회에 양심을 일깨우는 일이었다. 세인트 루이스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 「가톨릭일꾼」 운동과 관계를 맺고 있다. 그만큼 「가톨릭일꾼」의 활동 범위가 폭넓다는 말이다. 정치-사회 활동, 자선 사업, 무주택자들을 위한 주택 공급, 굶주린 이들을 위한 식량 공급, 비폭력 시민 불복종 운동 등등.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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