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을 쥐고서 기도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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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을 쥐고서 기도할 수는 없다
  • 헨리 나웬
  • 승인 2016.06.18 1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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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나웬의 <성령께 우리의 온 존재를 열며>-1
ⓒ한상봉

기도는 쉬운 일이 아니다. 기도는 우리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존재가 우리존재 바로 한 가운데로 들어오는 관계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자신의 깊은 곳을 차라리 어둠속에 묻어두고 건드리고 싶지 않은 것이 우리의 본성이기에 기도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도대체 왜 우리는 이런 기도를 원하는가? 기도를 하면 아마도 우리는 우리의 내면 문턱을 다른 존재가 넘어 들어오고 어떤 것을 만지도록 허락하게 될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의 삶이 이루어지는 곳까지 들어오도록 내버려두게 될 것이다. 그것은 매우 위험스럽고, 우리는 자신을 방어하려고 할지 모른다. 기도에 저항하는 것은 마치 주먹을 꽉 쥐고 저항하는 것과 같다. 이 주먹 쥔 모습은 긴장과 나 자신을 고수하려는 욕망을 보여준다. 또 두려움에 가득 찬 모습이기도 하다.

정신과 병동에 데려온 한 나이든 여인의 태도가 이런 모습을 잘 설명하고 있다. 그 여자는 난폭했고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던져 버렸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무서워했기에 의사는 모든 것을 그녀로부터 치워버려야 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손에 동전 하나를 움켜쥐고 그것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꾸겨진 주먹을 억지로 펼 수밖에 없었 다. 동전을 놓는 것이 마치 그녀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그 마지막 소유물을 앗아 버리면 그녀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게 되고, 그녀 자신이 없어져버리는 것과 같았다. 그것이 바로 그녀의 두려움이었던 것이다.

기도하도록 초대된다는 것은 우리의 꼭 움켜쥔 주먹을 펴고 마지막 동전을 포기하도록 요청받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그걸 원할 것인가? 그러므로 첫 번 기도는 흔히 고통스러운 기도가 된다. 우리는 자신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좋은 것이 아니어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아도 익숙한 것은 더욱 움켜쥔다. 우리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그게 지금 나의 모습이야. 나도 달라지고 싶지만 지금은 달라질 수 없어. 일이란 그런 법이지. 그냥 그렇게 내버려 둘 수밖에 없지.”

이렇게 이야기해버린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활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더 이상 믿지 않고 있는 셈이다. 새로운 생활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는 것이다. 현재의 경험과 그 경험이 가져다주는 모든 매력에 대하여 의문이나 도전을 제기하지 않기 때문에 현실의 운명에 우리 자신을 이미 포장해버리는 것이다. 새로운 미래를 믿어보기보다는 회한의 과거에 매달리는 게 더 안전하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래서 포기하고 싶지 않는 작고 끈적끈적한 동전으로 손을 가득 채우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쓰라림을 느낀다. 우리가 그들에게 해준 것에 대하여 그들이 고마워하지 않는다고, 또 우리보다 더 좋은 보수를 받는 사람들에게 아직 질투를 느끼고, 우리를 존경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복수를 하고 싶어한다. 답장을 받지 못해서 여전히 실망하고 나에게 미소를 띠지 않을 때 여전히 화를 낸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것들을 겪으며 살아간다. 마치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별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살아간다. …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기도하고 싶어질 때까지.

그러면 모든 것들이 다시 되돌아온다. 쓰라림과 증오, 질투와 시기, 실망 그리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도. 이러한 감정들은 단순히 있는 정도가 아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손아귀에 꽉 쥐고 마치도 절대로 내놓을 수 없는 보물처럼 끌어안는다. 그것들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그것들을 포기하면 마치 우리 자신을 잃어버릴 것처럼.

이탈이란 보통 갖고 싶은 것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이탈은 때때로 혐오스러운 것을 포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회한이나 증오 같은 어두운 힘에 너무나 끌릴 수 있다. 복수를 꿈꾸는 한 우리는 과거에 집착한다. 복수와 증오로서 우리 자신마저도 상실될 것같이 보인다. 그래서 주먹을 꽉 쥐고 버티어선 채 치유하고 싶어 하는 타인 가까이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기도하고 싶을 때 먼저 떠오르는 질문은 어떻게 이 꼭 움켜진 주먹을 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폭력으로는 물론 안 된다. 강요된 결정에 의해서도 안 될 것이다. 아마도 즈카리아나 마리아, 두려움에 떨던 목동들 그리고 무덤가에서 여성들에게 하던 천사들의 말을 주의 깊게 귀 기울이면 기도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에 들어오고 싶어하는 어떤 존재(절대존재)를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가 그렇게 맹렬히 집착하고 있는 것들을 가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거의 아무것도 살 수 없는 끈적끈적한 동전을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사랑 자체이시고 오로지 사랑뿐이신 그분께 우리의 증오, 쓰라림, 실망을 드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보여드릴 것이 아무리 없다 해도 보여드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자주 우리는 사랑스러운 하느님을 우리가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분과 똑같은 정도로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모든 더럽고 추한 것들을 감추려고 한다. 그리고 걸맞게 보이는 한 작은 길을 깨끗이 치워놓으려 고민한다. 그러나 이런 자세는 두려움에 가득 찬 응답일 뿐이며, 자유스럽지 못하고 꾸미는 태도에 불과하다. 그런 응답은 우리를 지치게 만들며 기도가 아니라 고문을 하게 하는 것이다.

온갖 종류의 이런 두려움들을 하나씩 물리치거나 지나가도록 내버려둘 때에 우리들의 손은 조금씩 열리기 시작하고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갖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손이 다 펴질 때 까지는 인내심이 무척 많이 요구된다.

이러한 열림은 끝도 없는 것처럼 계속된다. 하나가 열리면 그 뒤에 숨겨졌던 또 하나가 열리고 이렇게 하여 신뢰라는 긴 영적 여행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들의 삶을 되돌아 볼 때 이러한 수많은 열림의 작업이 이루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어떤 때는 두려움 때문에 이 열림을 그치고 다시 주목을 움켜쥐는 우리자신의 모습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할 것이다. “당신은 자신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가능한 일은 단지 두려움 없이 우리의 손을 펴고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는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날려 보내시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삶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던 동전은 부드러운 미풍이 불어대는 가벼운 먼지만도 못하다는 것이 증명될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자유의 맛을 조금씩 느끼게 되고 기도하는 것이 기쁨이 될 것이다.

세상과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자발적으로 투신하는 행동이 바로 기도가 될 것이다. 이때 기도는 억지노력이 아니라 영감적이고 생동감이 있으며, 평화와 고요함으로 가득찰 것이다. 그러면 기도의 순간들은 축제의 시간이며 고요한 시간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 점차 기도한다는 것이 바로 산다는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출전: <영성과 사회적 관계>, 참사람되어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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