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침묵, 어렵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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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침묵, 어렵지 아니한가?
  • 헨리 나웬
  • 승인 2016.07.05 15: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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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나웬의 <성령께 우리의 온 존재를 열며>-2
ⓒ한상봉

우리는 기도와 침묵사이에 어떤 연결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생활 속에서 침묵에 대하여 생각해 볼 때에 그것이 항상 평화롭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침묵 역시 어떤 전율을 우리에게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활 속에서 침묵에 대하여 깊게 생각했던 어느 학생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침묵은 밤이다.
그리고 달도 별도 없는 밤들이 있는 것처럼
당신이 홀로일 때, 전적으로 홀로일 때
당신이 저주를 받았을 때
당신이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때에
침묵은 위협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침묵이외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눈과 귀를 열어도 희망과 도움 없이
침묵은 계속된다.
빛도, 희망도 없는 밤에
나는 사랑도 용서도 없이
나의 죄책감속에 홀로 있다.
그러자 필사적으로 나는 친구를 찾는다.
길거리에서 사람과 표시, 소리를 찾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그렇지만 별과 보름달이 있는 밤,
멀리 어떤 집의 불빛이 보이고,
평화스럽고 묵상에 가득 찬 침묵의 밤도 있다.
크고 빈 교회 안에 참새들의 소리가 들리고
내 마음이 기쁨으로 소리쳐 노래 부르고 싶을 때
나 혼자가 아니라고 느낄 때,
친구들을 기다릴 때
최근에 읽은 시의 몇 구절이 기억날 때
성모송이나 시편의 슬픈 기도 속에 빠져들 때에
내가 나이고 네가 너일 때
우리가 서로를 두려워하지 않을 때
우리에게 침묵과 평화를 가져오는 천사에게
모든 말들을 우리가 맡겨놓을 때.

이처럼 두 종류의 밤이 있듯이, 침묵에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두려운 침묵이고 다른 하나는 평화로운 침묵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침묵은 위협적인 것이다. 그들은 그 침묵을 어찌해야할지 모른다. 시끄러운 도시를 떠나 자동차 소리가 전혀 없는 장소에 왔을 때, 라디오나 텔레비전도, 테이프나 레코드 소리도 들을 수 없을 때 그들은 마치 마른 땅에 놓여진 물고기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참을성을 잃어버린다. 어떤 이들은 사방의 벽이 음악소리로 둘러싸이지 않으면 공부를 할 수 없다. 끊임없이 소리가 나지 않는 방에 강제로 앉게 되면 그들은 신경질적으로 되어버린다. 이처럼 우리들 중의 대부분에게, 침묵은 위협이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예전에는 침묵이 일상이고 소요가 비정상적인 시기도 있었다. 오늘날은 소리가 정상적인 상황이고 침묵은 이상한 일인지 모르지만, 불안의 요소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침묵에 대하여 이런 경험을 했던 사람들이 기도를 어렵게 여기는 것도 이해할만 하다. 우리는 침묵으로부터 격리되어 왔다. 해변이나 산으로 소풍갈 때 우리는 라디오를 아주 중요한 친구처럼 끼고 간다. 침묵의 소리를 결 코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침묵은 온갖 소리로 가득 차 있다. 바람은 중얼거리고, 잎들은 바스락거리며 새들은 날개를 파드득거린다. 파도는 해변을 씻어 내리고 있다. 그리고 이런 소리들이 들리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의 작은 숨소리를 듣는다. 또 꼼지락거리는 우리 손들, 침 넘어 가는 우리 목구멍소리 그리고 우리 발자국소리 …

그러나 우리는 이 런 침묵의 소리들에는 귀머거리가 되어 버렸다. 시끄러운 세상으로부터 이 소리들로 가득 찬 침묵에 초대받을 때 우리는 자주 두려움을 느낀다. 마치 집의 벽이 무너지고 갑자기 한데 있게 된 것을 깨닫게 된 아이들처럼, 강제로 옷을 벗기어 알몸이 된 것처럼, 보금자리에서 쫓겨나게 된 새들처럼 두려워하는 것이다.

익숙해져있는 소리를 듣지 못해 우리 귀는 근질거리고, 우리의 몸은 마치 그 소리가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는 푹신한 담요처럼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고통스러운 이탈의 과정을 겪어야 하는 소리 중독자처럼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런 외적인 소리들을 떠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내적인 침묵을 갖는 것이다.

내적인 침묵은 마음의 침묵이다. 모든 종류의 소리에 잡혀있는 사람은 내적인 자아와의 만남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안으로부터 나오는 질문들은 아직도 대답을 듣지 못한 채로 남아 있다. 불확실한 감정들은 정리가 안 되었고 복잡하게 얽힌 욕구들은 풀리지 않았으며 혼동의 느낌들은 이해되지 못한 채이다. 남아있는 것이 라곤 결코 한 번도 정리되지 않았던 혼란스러운 감정들의 뒤범벅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루의 시끄러운 일상사를 끝냈을 때, 새로운 내면의 소리가 들리고 이 모든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주의를 끌려고 일어나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조용한 방으로 들어간다고 자동적으로 내적인 침묵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무와도 이야기할 수 없고 들어줄 사람이 없을 때 우리가 방금 탈출한 소리보다 더 시끄러운 내면의 토론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관심을 끌려고 하며, 한 문제가 다른 문제를 제치고 부상하면 또 다른 문제가 불평하고 모든 문제들이 들어달라고 아우성치는 것이다.

어떤 때 우리는 우리가 풀 수 없는 수많은 문제들앞에서 무력한 채로 감정이 뒤엉킨 채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밖의 수많은 일에서 찾고 있었던 기분전환은 아마도 우리 내면에 있는 문제와의 대면을 피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일을 다 끝내고 나면 무엇을 또다시 시작해야 하나?” 이런 질문이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에게서 도망가기 바쁜 느낌을 들게 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일을 붙잡도록 만드는 것 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말할 친구가 없고, 들을 음악도 없고 읽을거리도 없고 영화도 볼 것이 없을 때 어떡하지?” 문제는 우리가 친구 없이 혹은 우리의 눈과 귀를 새로운 것으로 채우지 않고 살 수 있는가가 아니다. 물론 우리는 그런 것들과 또 친구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의 눈을 감고, 모든 종류의 소리를 한쪽으로 비켜놓고 차분하고 조용하게 홀로 있을 수 있는가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차분하고 조용하게 홀로 자신과 있다는 것은 잠자는 것과 결코 같을 수 없다. 이 홀로 있음은 온전히 깨어있어 매우 주의 깊게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뜻한다. 침묵은 일어나려는 충동을 인정하고 아주 가까이 있는 것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는 유혹을 알아보는 훈련을 요구하는 것이다.

침묵은 내 자신의 안마당에서 어슬렁거리는 자유를 제공하며, 그곳에 있는 잎들을 쓸어 모아 길을 만들고, 그래서 내가 내 마음에 이르는 길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해 준다. 처음에 이 “익숙지 않은 지역”에 오게 되면 많은 두려움과 불안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우리는 집에 있고 싶은 우리의 갈망을 심화시켜주는 어떤 질서와 친근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새로운 확신으로, 우리는 우리자신의 삶이 내면으로부터 새로워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의 “내적인 공간”을 새롭게 알면서 또한 그곳에서 사랑과 증오, 부드러움과 고통, 용서와 탐욕의 감정들이 갈라지고, 강해지며 혹은 다시 변화되는 등 부드러운 손의 일하심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새로운 식물이 자랄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공간을 마련하는 정원지기의 손이며, 잡초를 너무 성급하게 뽑아내지 않고 다만 어린 생명을 질식시키려고 위협하는 것들만 뽑아내는 손이다.

이 부드러운 다스림 아래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 집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낮에 뿐만 아니라 밤에도, 우리가 깨어있을 때뿐 아니라 잠들었을 때에도 주인이 되는 것이다. 낮을 가진 사람은 밤도 물론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잠이란 이제 더 이상 낯선 어둠이 아니고 친절한 커튼이 된다. 그 커튼 뒤에서 꿈들은 감사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말하고 내보내는 것이다.

우리의 꿈에 이르는 길들은 깨어있을 때의 길처럼 믿을만하게 된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침묵을 피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은 다 가능하다, 물론 어렵기는 하지만. 바깥에서 오는 소리는 우리의 관심을 요구하며 안에서 올라오는 불안은 우리의 욕망을 끊임없이 휘젓는다. 많은 사람들은 이 유혹과 두려움 사이에서 함정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다. 그들이 내면으로 돌아설 수 없기에, 소음 속에서 고요함을 찾으려고 하지만, 그들은 그 고요를 소음 속에서 절대로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도 그들은 소용없는 노력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침묵에 다다를 때마다 우리는 “선물”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 선물은 진정한 의미에서 “약속하는” 선물이다. 새로운 생활을 약속한다. 그것은 평화와 기도의 침묵이다. 그 침묵은 우리를 이끌고 계시는 하느님께로 다시 우리를 데려간다. 이 침묵 중에서 우리는 내몰렸다는 느낌을 받지 않으며 내가 다른 것들과 다른 사람들 속에서 나 자신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때에 우리는 강압적으로가 아니라 자유롭게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마음이 가난한” 침묵인 것이다. 그 침묵 중에 우리는 올바른 관점에서 우리의 삶을 보는 법을 배우고 거짓이 사라져버리는 것을 발견한다. 다시 세상을 어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볼 수 있게 되고, 모든 근심과 걱정거리 한가운데에서 시편의 저자와 함께 이렇게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집을 지어 주지 않으시면
그 짓는 이들의 수고가 헛되리라.
주님께서 성읍을 지켜 주지 않으시면
그 지키는 이의 파수가 헛되리라.
(시편 127,1)

(출전: <영성과 사회적 관계>, 참사람되어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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