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성 마르틴 드 포레스 공동체, 급진적이고 자유롭고 따뜻한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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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성 마르틴 드 포레스 공동체, 급진적이고 자유롭고 따뜻한 기적
  • 참사람되어
  • 승인 2019.08.18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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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의 집 이야기] St. Martin de Porres House of Hospitality

추수감사제 일주일 전이다. 캐롤, 챨리 그리고 바바라는 덜컥거리는 의자에 편안히 기대고 앉아서 감사제 만찬에 필요한 시장거리 목록을 만들고 있었다.

칠면조 25 마리
마카로니 60 파운드
계란 120 타스
햄 50 파운드
우유 50 갈론
그밖에 빵, 샐로리, 상추, 고추, 담배
그리고 할 수 있는것 많은 양의 후식

엄청난 양의 장을 보아야 한다. 그러나 초대되는 손님도 약 6백 명가량 될 것이다. 되돌아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고 모든 사람은 두번 세번 먹을 것이다. 장거리는 사는 것이 아니라 들어올 것이다. 이것이 세 사람의 믿음이었다. 그들은 먹여야할 가족이 있기에 먹을 것이 반드시 생겨야 할 것이었다.

기적: 빵은 떨어지지 않는다

마르틴 공동체에서 무료식사를 사람들에게 제공하기 시작한 것은 15년전 일이었다. 한달에 약 15,000명이 같은 솥의 밥을 먹는데 돈은 받지 않는다. 매월 돈을 보내오는 사람들도 있고 빵이나 콩, 과일이나 고기를 가져오기도 하며, 봉사하러 와서 돈을 내놓고 가는 사람도 있다.

식사담당주임인 잭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곳에 처음으로 온 날 우리는 빵이 모자랐지요. 나는 당황하기 시작했는데 빵이 다 떨어지자 마자 빵집에서 도착한 트럭이 아직도 뜨끈뜨끈한 빵을 내려놓기 시작했어요. 나는 친구들에게 이건 미리 꾸민 일이 아니냐고 물었지요. 그러나 그건 전혀 우연이었고 나도 이제는 이런 일에 익숙해져 버렸어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걸 얻어요. 그저 어디선가 오지요. 만일 오지않는다면 그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지요.

 

평신도로 사는 사제

신부이지만 평신도로서 살고 있는 래리 갤라는 대머리에다 토마스 머튼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매우 매력적인 영혼을 지니고 있었다. 이곳 마르틴 공동체에서 수 년동안 일하고 있는 그는 “내가 보고 감명받는 기적은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먹고 남을 만큼 빵이 있는데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이곳에서는 모든 사람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는 점이지요” 라고 말했다. 그가 웃자 눈썹이 활모양으로 휘어졌다. “기적이란 우리에게 결코 식량이 모자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우리는 굶게 되리라고 예상했지만 항상 어디로부턴가 먹을것이 생기곤 했지요.”

마르틴 공동체에 모인 사람들은 각양각색이다.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 히피운동의 절정기에 샌프란치스꼬에 왔다가 약물중독으로 눌러앉게 된 사람들도 있고, 지금 오는 사람들은 추운 북쪽이나 평원의 매서운 겨울철을 피해 일거리를 찾아 오기도 한다. 낙오된 사람들, 실패한 사람들, 베트남 참전인들은 악몽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고,동성연애로 에이즈에 걸리거나 또 걸릴까봐 두려움에 마비된 사람들도 있다.

톨스트이와 마크 트웨인을 읽는 노숙인

대부분은 젊고 또 옷을 잘 차려입기도 한다. 식사차례를 기다리면서 책을 탐독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톨스토이나 트웨인의 책이 눈에 띈다.

책을 읽든지 안읽든지 마르틴 공동체의 손님들은 배경이 다양하지만, 이구동성으로 이곳이 편안하다고 말한다. 50대의 머리가 반백인 흑인 죤은 이렇게 말했다. “난 배고파서 갔다가 배고파서 돌아 올 수 있지요(그는 근방의 다른 무료식당을 말했다). 그러나 이곳에선 아무도 우리에게 물같은 스프를 주지 않습니다. 이곳에 오면 말할 필요도 없이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금방 알아 채릴 수 있어요.”

크고 마르고 수 년간 길에서 살아온 표시가 역력한 해리는 그야말로 아무에게도 어울리지 않는 짝이며, 마치 옷장 전체를 입고 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이곳은 구세군이 아니얘요. 그들은 당신에게 먹을 것을 주기전에 설교를 하지 않아요. 다른 곳의 음식은 먹을 수가 없을 정도로 형편없지만 이곳 사람들은 그저 당신을 사랑해주고 먹여주기만 할 뿐이죠. 그리고 음식맛은 또 얼마나 지랄맞게 좋은지요! 난 식당에서도 먹어봤지만 돈 주고 먹는 것보다 이곳 음식이 훨씬 더 맛있다구요.”

 

손님처럼 왔던 봉사자

이곳에서 교대로 일하는(이른 아침식사와 점심식사, 월요일을 제외한) 봉사자들도 손님들처럼 이곳 저곳에서 모여든 사람들이다.

조각가인 앨리슨 울만은 빵을 썰다말고 잠깐 멈추며, 긴 금발머리를 빨간 수건안으로 밀어 넣는다.

“나는 긴 방황 끝에 이곳에 왔지요. 나는 몸은 젊은데 마음은 아주 늙은이였어요. 나자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무엇인가 해야 했지요. 어느날 텔리비젼에서 누군가 굶주림에 대해 이야기했고, 이곳 마르틴 공동체가 굶주림을 직접 볼 수 있는 곳이라 생각했어요. 이곳에 오게 된 것은 정말 기쁨이었어요. 여기서는 모든 것이 다 있는 그대로이고 영혼도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이지요. 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가식없는 사랑을 볼 수 있구요. 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그들의 방식을 너무나 좋아합니다. 너무나 인간적이고 전혀 허세를 부리지 않아요. 두려움이란게 없습니다. 사람들은 와서 도움을 청하고 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지요. 우리에겐 기적이 필요하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끝이 안보이는 줄을 서며 스프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밑이 안보이는 솥에서 국자로 스프를 떠주고 있는 로버트 콜은, 점성가이고 신학교 출신이며 책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그는 마르틴 공동체의 문을 두드리게 된 경위를 낄낄거리며 이렇게 말한다.

“난 4월 1일 샌프란치스코의 전통인 어리석은 성자 축제 퍼레이드에 참가하여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노파를 때리고 있는 경찰을 보고서 난 그 사람에게 한방 먹였지요. 그래 16시간의 공동체 봉사를 판결받았는데 이곳을 택한 것이지요. 그때부터 나는 매 수요일 점심때마다 와서 일하고 있습니다.”

반정부적이며 그래서 위대한 저항

그는 스프그릇을 주기전에 떨어지는 국물을 부드럽게 닦아내면서 씩 웃었다. “사람들은 굶주림의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가톨릭일꾼운동은 특별합니다. 난 이 운동이 북미의 해방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운동은 반정부적이며 또 그런 의미에서 위대합니다. 왜냐하면 정부는 이 굶주림 문제에 대하여 아무런 해결책이 없으니까요. 실상 그것이 문제입니다. 이제 80년대말에 이르러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습니다. 우리는 해방신학운동인 가톨릭일꾼운동을 택하고 새로운 좌익, 즉 공산주의 좌익이 아니라 도로시 데이의 방식을 따라 급진적이고 자유로운 좌익을 제시 할 수 있습니다.” 로버트는 안경을 콧대위로 치켜 올리며 세심하게 식탁대를 치웠다. 이곳에서 표현되는 대부분의 분위기는 단지 가족이 가난하다는 까닭에 지저분한 것이 합리화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마르틴공동체가 젊은이들, 히피, 기존문화에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다면 노인들에게도 자석과 같은 매력을 주고 있었다.

“내 마누라가 작년에 죽었고 그후에 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지요. 난 봉사일을 하기 시작했고 성마리역에서 침대표를 넘겨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곳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었어요.“ 깊은 청색눈과 하얀 은발의머리를 지닌 죠지는 농산물가공업자인데, 뒷방에서 천천히 또 조심스럽게 일하고 있다. 그는 후식을 자르고 있었고 청소를 담당하였다. 72세에 그는 산타클로스같은 인상을 주는 사람으로, 수염이 약간 부족하긴 하였다. ”그들은 나에게 부엌일등 힘든일을 해본적이 있느냐고 물어 보았지요. 그래서 나는 이곳에야말로 내가 할 일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죠지는 식탁에 달라붙은 찌꺼기를 잡아떼면서 말했다. ”나는 이곳에서 만족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도 돕지만 나는 더 많은 도움을 받지요. 또 젊은이들과 어울리기도 하구요. 이곳에서 봉사하는 사람들, 또 식사하러 오는 손님들이 얼마나 서로 다른가를 보고 난 놀랩니다.“ 경이로움에 가득찬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교육받은 사람들도 얼마나 많다구요!“

 

두 그릇째 스프를 줄 수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창고에서 우유상자 가까이 앉아있는 사람은 맥스 메이겐이다. 맥스는 필라델피아의 한 성공한 유대집안의 아들이었다. 십대초반에 그가 사랑하던 형이 죽고난 후 맥스는 약물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19살에 그는 정치에 눈이 떠졌고 특히 핵시대의 정치를 접하며 비폭력 반핵시위에 참가하기 시작하였다. 맥스는 그 운동에 충실하였고 자주 미국의 핵정책에 불복하여 항의시위를 벌였고 20번이상을 체포되기도 하였다. 그는 이런 모든 체험이 그의 종교적 신념 때문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공공연한 이교도로서 그는 자신을 마법사라고 하며, 어머니 대지를 공경한다. ‘어머니를 파괴시키고 오염시키는 그들을 어떻게 그냥 놔두겠습니까?

앉았던 자리에서 껑충 뛰어오르며 그는 빵을 들고 나타난 한 젊은 여자를 포옹했다. “이런 곳에서의 삶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내가 굉장히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얻는 것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나는 치유를 받습니다. 난 나누기를 좋아하고 거의 사는 일이 없지만 언제나 요리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두 그릇째 스프를 줄 수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마르틴 공동체 같은 곳은 세상에 우리 모두를 위한 식량과 사랑이 충분히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지요.”

봉사자들로부터 가장 좋은 것을 끄집어내고

봉사자 가운데 가장 유쾌한 사람은 여든 세살된 매리 캐더린 멀리간 여사였다. 조그만 체구에 은발머리, 그리고 나이 때문에 약간 허리가 굽은 멀리간 여사는 의자에 앉아서 점심용 과자를 쟁반에 담고 있었다. 그러면서 앞치마를 걸친 한 젊은 여인과 정치문제에 대하여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기쁘게 합의를 보고 있었다.

멀리간 여사는 1978년부터 목요봉사팀의 회원으로 일하고 있다.

“나는 평화운동을 하는 여성단체에 가담하여 사무실에서 정리하는 일을 돕고 있었지요. 그때 이 마르틴공동체의 회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회보를 보고, 난 오빠 어윈 생각이 났지요. 우리는 1930년대에 오하이오의 콜롬버스시에서 살고 있었는데 어윈은 술에 취해서 집에 돌아오지 않는 날이 많았지요. 그러나 그는 성프란치스꼬 병원에서 하는 무료식당에 가서 밥을 먹곤 했지요. 난 오빠때문에 그 병원을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멀리간 여사는 잠시 말을 중단하고 쵸코렛 과자를 우물거렸다. “어윈은 1938년에 죽었지요.” 그래서 30년대에 심어진 씨가 80년대에 멀리간 여사가 다른 이들을 도움으로서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수십년전 2천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여사의 오빠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처럼.

마르틴 공동체는 봉사자들로부터 가장 좋은 것을 끄집어내고, 다른 이들의 무력함앞에서 적게 가진 이들과 나누려는 정신을,그리고 연약함, 질병, 이, 정신적 파손앞에서 사랑의 선물을 주려는 심도깊은 헌신을 유도해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희망의 집을 관리하고 용기를 주며 기초를 마련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캐롤 아렛트는 붉은 체크무늬 셔츠에 멜빵 달린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40쯤 되어 보이는 그는 매우 건강한 사람이었다. 캐롤은 조용하게 어떤곳에나 다 있었다. 때로는 전화를 받기도 하고 스프를 젓기 위하여 발끝으로 서 있기도 하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아들이고, 배고프지만 들어오기를 꺼리는 한 젊은 방랑자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캐롤은 부엌윗방에 산다. 그가 살고 있는 한 구석은 수도원 규칙에 따르는 것처럼 빈약하기 그지없다. 이곳에서 살아왔던 지난 5년간의 삶을 깊이 토론하기는 어렵다.

허지만 그의 느낌은 여전히 풍부하다. “내 인생에서 이곳 마르틴 공동체에 오게 된 것은 가장 좋은 일이었지요. 이것말고 내가 다른 무엇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 안 들어요. 난 의미있는 일을 감사하게 여기는데, 이 일은 가장 뜻깊은 일이지요. 어떤 때는 미사 가는 것이외에는 일주일 동안 아무데도 가지 않고 이 집에 있지요. 내 운명을 찾는데 수 년이 걸렸고 이제 더 이상 다른 것에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게 됐어요. 가끔 몇시간씩 쉴 수는 있겠지만 실제 휴가는 없어요. 어떤 사람들은 심리치료를 받으러 다른 곳에 가고, 또 다른곳에 직장을 갖고 공동체도 별도로 갖게 되지만, 나는 이 모든 것을 한 군데에 갖고 있는 셈입니다.”

술취한 손님들과 새로 오는 봉사자들에 대한 캐롤의 인내는 놀랍다. 가장 바쁜 점심시간에 자주 오는 티미라는 사람이 술에 취한채 아주 행복한 표정으로 택시를 타고 도착했다. 캐롤은 즐겁게 그를 뒷마당으로 데리고 나갔다. 이번에는 술병을 누런 봉투 안에 넣은채 다시 들어왔다.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은채 캐롤은 그의 팔을 끼고 함께 나가 택시 뒷자석에 당당히 앉아서 칠면조 스프를 그와 운전수에게 권했다. 운전수는 두번째 스프를 청했다.

 

교회를 맹렬하게 반대하지만, 영성으로 가득찬 분들

캐롤은 가톨릭교회와 연관을 맺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많은 봉사자들의 다양한 믿음을 인정하는데, 봉사자들 대다수가 가톨릭일꾼운동의 “가톨릭”에 반대하거나 적어도 그 단어의 자본주의화에 찬성하지 않는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교회를 맹렬하게 반대하지만, 영성으로 가득찬 분들입니다. 모든 사람들, 선(禪)하는 이들, 이교도들, 유대인등 모든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하여 사용하는 단어가 아무리 달라도 똑같은 길을 가고 있는 것 같아요.”

봉사하고 있는 사람들의 다양함이 캐롤을 놀라게 하지는 않는다. “식량은 특권이 아니라 권리이지요. 그리고 모든 교파의 사람들은 그들이 이곳에 일하러 왔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가 점심을 손님들에게 제공할때 그들이 어디에서 왔고, 교회에 가는지 안 가는지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한 사발의 스프와 약간의 빵, 과일을 필요로 하는 우리 가족 모두가 지니고 있는 인간적 존엄성을 알아보는 것이지요.”

나는 가톨릭일꾼운동에 대하여 읽었고 ’예‘ 하고 대답했다

챨리 잉겔스타인은 그러한 깨달음을 살고 있다. 그는 한때 반입주하는 상담가로서 직업을 구하고 있었다. 어떤 한 자리에 적당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으나 그는 “너무 지나치게 동화되고, 환자와 상담가 사이에 간격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는 이곳 마르틴 공동체에서 보수를 받지 않는 전담직원이고, 모든 가능한 형태의 동화가 요구되는 장소에 집처럼 친근감을 느끼며 살고 있다. 뉴욕 출신의 유대인이며 우체국 직원의 아들인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가톨릭일꾼운동에 대하여 읽었고 ’예‘ 하고 대답했지요. 사실 난 이 운동에 대하여 별로 알지 못하고 왔지만, 근본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나는 무정부주의자이고 정부와 협력하지 않으며 그래서 도로시 데이처럼 투표를 거부합니다. 난 그분이 그리스도를 위대한 교사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챨리는 항상 피곤해 보였지만 끊임없이 움직이고, 무릎은 씰룩거리고 손가락은 전화위에서 계속 꼼지락거리고 있다. 깡마른 그의 체구에서 긴장감과 신속함을 엿볼 수 있었고, 그의 머리는 결코 절대로 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한때 월가(금융가)에서 일했다는 소문이 있지만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목수일과 화해 그리고 봉사일 뿐이다.

”나는 이곳에서일하며 다른 일꾼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여기에 봉사하러 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보다, 밥 먹으러 오는 사람들과 더 비슷하고 더 가깝습니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청바지는 들어오고, 아마 일 년에 한 켤레 신발이나 필요하겠죠.“

”난 차 고치는 것을 배웠으니 헌 차를 하나 삽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갈등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내가 하는 어떤 행동이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게 되니까요. 그래서 될 수 있는대로 단순하게 살고 다른 이의 필요에 대하여 항상 자각하려고 노력합니다. 물질세계는 유혹이 대단합니다. 나는 다른 삶을 택했고 또 달라지리라고 기대하지요.“

그의 웃음은 부드러웠고 거의 변명하는 것 같았다. ”나는 절대로 일주일에 40시간 일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난 보험을 갖고 있지 않아요.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누가 나를 돌봐줄 겁니다.“ 챨리는 테이프로 한데 붙인 안경을 만지작 거렸다. “여기에는 특별한 직분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에이즈에 걸린 동성연애자들이 많이 오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특별히 봐준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요구들을 줄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에이즈 환자들은 나병환자와 같습니다. 사회는 대부분 그들을 무시하지만 이곳에서는 아무런 차별도 없기 때문에 그들은 편안해 합니다. 그렇지요. 여기서는 누구나 다 인간에 불과하지요. 아무런 간격이 없습니다.”

챨리의 이런 말은 그대로 증명되고 있다. 한 젊은 청년이며 동성연애자인 잭크가 일하러 와서 봉사자 대장이었던 데이빗을 만나 그를 애인으로 삼게 되었다. 데이빗이 에이즈로 죽었을때 마르틴 공동체는 한데 모여 장례미사를 하고 그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리고 잭크는 그를 기념하여 데이빗이 하던 일을 이어받아 하고 있다.

 

난 하느님과 사랑에 빠졌어요

챨리의 부드러운 지도력과 캐롤의 믿음직한 강건함바바라 콜리에의 활기찬 카리스마와 완벽하게 어울리고 있다. 바바라는 어떤때는 별로 색깔이 없는 이 환경속에서 번쩍이는 섬광처럼 빛난다. 바바라는 윤곽이 뚜렷하고 활달하게 말하는, 자주색 나비처럼 보인다. 항상 자주색 옷을 즐겨 입는 그는 사람들이 가져다 주는 옷만으로도 충분히 멋장이가 된다. 그는 이 집을 이끌고 있는 세 사람 중에서 가장 확실하게, 보이는 사람이다.

바바라는 마르틴공동체에 오기까지 길고도 매혹적인 인생여행을 하였다. 바바라는 챨리처럼 러시아의 유태계 부모 밑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부모들은 신앙을 실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로스안잴로스에서 푸줏간을 하고 있었던 할아버지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금요일 오후에 안식일을 위해서 문을 닫기전에 할아버지는 팔다 남은 고기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곤 했었다. “할아버지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핀잔을 받았지요. 하지만 그분은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어요. 가지고 있는 것은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으니까요.”

가톨릭신자인 한 멕시코 대가족의 딸이 바바라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면서 또 그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바바라는 친구집을 가득 채운 성물을 보고 감명을 받았고 그곳에서 예수를 발견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영향으로 바바라는 “예수를 위하여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2살이 되었을때 그는 매일미사에 참석하고 있었다. 대학을 가는 대신 바바라는 이스라엘에 가서 2년동안 키부츠 생활을 하고 그곳에서 “예수가 걸었던 곳을 걸어 보았다.”

금발머리를 부드럽게 뒤로 넘기며 그는 회상하였다. “그는 나에게 말했어요. 그는 정말 많은 옳은 것을 말했지요. 난 그의 메시지를 깨달았어요. 내가 자랄 적에 나는 이 위대한 기도를 배웠지요. ‘나의 하느님이신 주님을 나의 온 마음과 온 영혼을 다하여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할 것이다’. 그리고서 그 명령을 실천할 수 있는 몇가지 방법을 예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바바라는 완전히 흥분했고 목소리는 감탄으로 가득찼다.

”난 하느님과 사랑에 빠졌어요. 그분은 예수님을 보내어 사랑을 효과있게 할 수 있는 몇가지 작은 규칙을 보내주신 것이지요! 와! 하느님은 우리에게 먹여주고 입혀주고 쉴곳을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보다 더 단순한 것이 어디 있겠어요?“ 그가 공중에 팔을 휘젓자 40개의 은팔지가 짤랑거렸다. ”15년전 캘리포니아에 돌아왔을때 난 히피운동에 깊이 빠져 있었지요. 그리고 뉴욕에서 나온 <가톨릭일꾼> 신문을 읽고 있었는데 샌프란치스코 가톨릭일꾼 공동체에서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광고를 보았어요. 그들은 요리사를 원했고 나는 곧 시작했는데 얼마 안가 그 일을 내것으로 만들고 말았지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내 가족

어떤 때는 체험 자체가 바바라의 기세를 꺽는 것 같기도 했으나, 그의 신앙, 일을 하겠다는 의지, 멍에를 짊어지겠다는 의지는 여전히 생생하였다.

전화가 울리고 바바라는 의자를 올렸다. ”여보셔요... 어, 여보셔요...감자가 많다구요? 좋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곰팡이가 피었나요?... 그러면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당신의 가족에게 먹이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저의 가족한테도 주지 않겠습니다.“

상대방을 얼리면서 바바라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내 가족이지요. 난 그들이 다른 가족처럼 잘 먹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다만 가난하기 때문에 아무것에나 다 기뻐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예수님과 그들 모두를 욕되게 하는 것이지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바바라는 우유가 배달되어온 문가로 뛰어간다. 그는 배달부를 껴안고 포옹하고 나서, 먼저 들어와 있던 우유를 앞쪽으로 옮기고 새로 온 것을 뒤에다 놓음으로서 버리는 것이 없도록 한다. 일상적인 일을 끝내고 나면 오랜 봉사자의 경험을 살려 스프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불일치를 즉시 알아본다.

잠깐 후에 바바라는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농담하며 공기를 깨끗하게 하고 감정들을 가라 앉힌다. 씩 웃으며 자리에 돌아와 그는 말한다. ”내가 받은 가장 큰 선물은 봉사할 기회와, 한계없이 사랑할 수 있는 힘입니다. 아! 우리는 항상 시험을 받고 있지만, 내 마음은 이곳에 흐르고 있는 풍성한 사랑으로 터질것 같아요.“

새집을 마련할 돈은 마련되었지만

바바라는 권태로운 샌프란치스꼬에서 가장 유명한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다. 마르틴공동체는 15년 되었지만 현재의 포트레로가에 항상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85년 12월 20일 샌프란치스꼬 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었다 :

15년동안 마르틴 공동체가 무료식사 제공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적어도 관대한 사람들에게조차도. 그런데 갑자기 이 마르틴 공동체가 별로 달갑지 않은 이유때문에 유명하게 되었다. 이 공동체가 현재의 구역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마르틴 공동체의 일꾼들은 방송국의 실무자와 기자들이 그들의 식당에 들어와 가족들을 괴롭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게하면 새 지역에 이사가기 위한 비용 30만불을 모금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현재있는 집계약은 3개월안에 만기가 되고 그들은 가까운 곳에 계약을 걸기 위해서만도 4만불의 돈이 곧 필요한 것이다...

나는 바바라(콜리에)에게 새집을 마련할 돈이 모금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물었다. ”우리는 구할 겁니다“ 그는 단순하고도 힘있게 말했다. 나는 그를 믿었다. 지나간 10년동안 이 맹렬한 여성은 하루에 400명의 스프를 만들었다. 그것은 엄청난 기록이다.

그 기사가 나왔을 무렵 바바라는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몰랐었다. ”사람들은 우리가 결코 새 건물을 찾을 수 없을 거라고 말했지요. 그러나 그때야말로 우리가 신앙에 매달렸던 때이지요.“ 그는 승리감에 가득차서 씩 웃었다. ”우리는 할 수 있다고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무일푼이었지만 아주 빠르게 오십만 불을 모금했지요. 아시지요. 신앙이란 마지막 한 푼에까지 몰릴 때에야 비로서 오는 것이라구요. 나는 나 자신에게 말했지요. ‘투덜대지 말자. 그냥 거기에 있으면서 하자!’ ”

캐롤이 덧붙인다. “아무도 우리가 하는 일을 알았다면 집을 빌려주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는 집을 사야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우리는 175,000 - 200,000불 사이의 집을 알아봤어요. 그 값으론 턱도 없었지만, 우리는 그만한 돈조차 갖고 있지 않았어요. 그러자 한 손님이 지금 이 장소에 대해 말해 주었지요.” 그는 기억을 되새기며 웃음 지었다.

1986년 5월 샌프란치스꼬의 어느 신문에 다음의 기사가 실렸다.

완벽한 장소 - 이전에 빵집이었다가 자동차 정비소였던 곳이 포트레로 15번가에서 발견되었다. 마르틴 환대의 집이 있기에는 아주 좋은 조건이다. 그러나 이 집을 사서 고칠려면 70만불이 필요하다. 그리고 주택가 한가운데 이런 무료식당이 있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므로 일꾼들은 그들을 필요로 하는곳, 아마도 시장 가까운 지역인 미션가에 집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세를 얻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안전할 것이었다.

”몇달동안 더 찾아본 결과 이 새 건물이 발견되었지요.“ 바바라가 말한다. 그리고 나서 바로 계약금 20만불 가운데 142,000불이 들어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돕기 위하여 못 참을 지경이었다. 어떤 여자는 4만불을 보내기도 하고 천 불짜리 수표가 계속 보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돈보다 더 어려운 문제가 생겼다. 새 건물에 무료식당을 세우는 것을 반대하는 기운이 불길처럼 솟았다. 그들은 마르틴 공동체가 세워지면 도둑질과 교통난, 그리고 범죄가 늘어날 것이라고 두려워 하였다.

챨리는 주장했다. ”우리 손님들은 이미 이 지역에 있어 왔지요. 다만 가난한이들과 집없는 사람들이 지금까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았다 뿐이지요.“

 

포트레로 언덕은 가난한 이들과 노동자들의 이웃입니다

7월에 샌프란치스코 도시계획위원회는 마르틴 공동체 허가문제를 심의하기로 하였다. 150명의 공동체 손님들과 일꾼들, 그리고 재정후원자들이 위원회의 청문회 실을 가득 메웠고 공동체에서 가져온 갈색봉투의 점심도시락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심지어 위원회 실무자들을 위한 점심까지 마련해 왔다.

반대편 사람들은 폭력이 급격히 증가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시의원인 아트 아그노스에 의해 그러한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반박을 받았다. 이 시의원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마르틴 공동체가 현재 위치하고 있는 지역에서 지난 15년동안 범죄증가는 없었다고 한다. 동네가 지저분해질 것이라는 우려에 대하여 바바라는 날카롭게 쏘아댔다.

“우리는 더 많은 쓰레기 통을 마련할 겁니다. 우린 온 동네를 깨끗하게 청소할 겁니다. 우린 온 도시를 다 청소할 겁니다.”

다이안 훼인스타인 시장과 여러 민간단체들이 마르틴 공동체의 이전을 지지하며 성명서를 내기도 하였다. “포트레로 언덕은 가난한 이들과 노동자들의 이웃입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우리들 모두는 때때로 가난한 이웃을 위한 다음 식사가 어디에서 오는지 의아해 했습니다. 우리는 마르틴 공동체 손님들이 우리와 한 식구임을 인정하며, 우리 모두가 노력하여 그들이 필요로 하는 합법적인 요구들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8월에 포트레로 지역신문은 이 싸움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일단의 지지자들이 기뻐 환호할 때에, 마르틴 공동체는 시 도시계획 위원회가 새로운 장소에서 공동체를 시작할 수 있도록, 허가신청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킴으로서 생존을 위한 마지막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기쁨과 환호가 그 작은 청문실을 가득 채웠다. 공동체 손님들은 일꾼들과 포옹하고, 위원회 위원들은 공동체 손님들을 껴안았다. 반대자들도 함께 어울렸다.

 하느님께서도 당신 역할을 하셔야 되지요

래리 갤라 신부도 이 사건에 대해 기분좋은 기억을 갖고 있다. ”이 새로운 장소로 이사하던 체험은 정말 기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걱정을 많이 했지요. 난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는 할 수 있는만큼 할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도 당신 역할을 하셔야 되지요.‘ 그래서 하느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건 정말 기적이었습니다!“

어려웠던 때를 돌아보면서 래리는 차분해져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무엇인가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알고 있었지요. 그건 기적 시리즈 같았어요. 도시계획위원회에서 우리를 지지했던 사람들, 공공연하게 지원해 주었던 언론인들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다 마련 하시지요. 기적은 좋은 사람들의 선의와 좋은 의도에 있습니다. 우리의 힘은 우리의 약함에 있지요. 우리는 다른 삶들을 진정으로 보살핀다는 것이 무엇인지 환기할 뿐입니다.“ 그의 눈썹은 웃을때마다 쓰고 있는 안경너머에서 활모양으로 휘곤 하였다.

첫번째로 맞이한 추수감사제

그래서 마침내 오늘은 추수감사절 아침이다. 이젠 무료식당으로 변해버린 옛 자동차정비공장의 긴 마당을 태양은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다. 기온은 적당했고 일꾼들은 점심식사를 마련하기 위하여 바쁘게 돌아간다. 이미 아침식사는 600명에게 주어졌고 같은 숫자의 사람들이 점심때 들이닥칠 것이다. 이 때를 위해서 바바라는 칠면조 가슴뼈(Y자형)로 만든 귀고리를 달았고 식당방에 있는 마르틴 드 포레스 성인상에도 같은 뼈로 만든 목걸이를 걸어 놓았다. ”몇년동안 우리는 추수감사제때에 보리와 양파 스프만을 먹었지요. 그러다가 칠면조가 들어오기 시작했지요. 칠면조들은 그들의 생명을 내어놓았고 그 가슴뼈들은 바로 이 선물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그것들은 우리에게 성물과 같은 것이기에 간직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먹고 살 수 있도록 희생했으니까요.“

가족들이 오기 시작한다. 둘씩 셋씩 혹은 하나씩 축제의 시간이 다가옴에 따라 사람들도 모여든다. 봉사자들은 여전히 살라드와 후식을 준비하기 위해 바쁘게 손을 놀리고 공간이 있는 곳이면 어느 곳에나 식탁이 차려진다. 잔치 분위기이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아무도 줄을 서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에 앉아서 접대를 받을 것이다. 손님들은 그걸 좋아한다. 일꾼들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앉기 시작하자 마당은 마치 분위기 좋은 식당같이 느껴진다. 한 봉사자가 정중하게 다가와 인사하자 손님은 농담을 던진다. “우리는 다섯사람입니다. 경치가 좋은 테라스 가까이 테이블을 잡고 싶습니다.”

분위기는 완전히 가족같다. 바바라와 챨리 그리고 캐롤은 추수감사제 때면 다른 어느곳에도 갈려고 하지 않는 오랜 친구들을 끊임없이 반기고 껴안고 포옹하고 있다.

온갖 사람들이 다 모인다. 아메리카 인디안들은 둥근 식탁을 차지한다. 동양계 사람들은 정장을 하고 나타난다. 한 젊은 청년이 들어왔으나 즐길 수 없다. 그는 약물중독으로 몹시 긴장하고 있다. 바바라는 한 시간이 넘게 그와 함께 앉아서 얼굴을 닦아주고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진정제 복용때문에 기가 다 빠진 그를 꼭 안아주고 있었다.

모두가 음식을 좋아했고 두그릇 세그릇씩 먹는다. 그리고 커피는 끝도없이 마신다. “최고의 추수감사제입니다!” “여기서는 아무도 우리를 깔보지 않지요.” “너무 배가 불러서 걸을수도 없네요!” “음식을 좀 싸가지고 가도 될까요? 집에서 내 늙은 마누라가 아파 여기 올 수 없었어요. 난 그녀가 레몬파이를 먹고 싶어할 것 같아요...아니면 저기 저 쵸코렛케익이나.“

이것뿐만 아니라 저녁에 먹을 샌드위치나 과일, 과자등도 가져간다. “이렇게 많이먹고 또 가져간다구요? 정말 믿을 수가 없네요.” 한 손님이 중얼거린다.

앞에 나열했던 시장거리들은 모두 채워졌다. 칠면조와 샐러리, 빵과 후식 모두가 마련되었고 다 소비되었다. 추수감사제 작전이 완수되었다. 일꾼들은 서로 자축하였다. 이 새 집에 이사온지 첫번째로 맞이한 추수감사제였고 마르틴 공동체는 예년의 전통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는 피곤하고 기쁨에 넘쳐있다. 그러나 내일 아침이면 챨리와 캐롤 그리고 바바라는 커피를 끓이고 스프를 젓고 빵을 썰기 위하여 어김없이 다시 일어날 것이다.

[출처] 참사람되어 1993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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