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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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하느님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19.06.22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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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무주 산골에 살 때였다. 이따금 서울에 다녀올 때, 일 마치고 부지런히 귀가해도 무주군 안성면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면 저녁 시간이었다. 군내버스가 끊어진 산촌엔 해가 빨리 지고, 택시를 타더라도 비포장도로가 시작되는 산길 초입에서 내려야 했다. 택시의 빨간 후미등이 사라지고나면, 온통 칠흑 같은 어둠뿐이다. 산길을 더듬어 올라가야 하는데, 그믐밤이면 앞이 아예 보이지 않는다.

눈을 떠도 캄캄하고, 눈을 감아도 캄캄하다. 이럴 때는 가만히 제자리에 서 있어야 했다. 그러면, 이윽고 눈이 열리고, 사위(四圍)는 캄캄해도 풀포기 없는 산길은 하얗게 드러난다. 그렇게 길이 열려 가만가만 걷다보면 눈은 더욱 밝아지고, 먼데 산등성이에 있는 우리 집이 보인다. 따뜻한 불빛이 반갑게 다가오는 행복한 귀가(歸家)였다.

그 어두운 밤에 어디서 없던 빛이 새어나와 길을 밝혀준 것일까? 이럴 땐 이런 생각을 한다. 내 앞길이 캄캄할 때,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이가 내 안에서 빛을 길어 올리고 있다고 말이다. 그분을 하느님이라고 불러도 좋을까? 시인이었던 니카라과의 에르네스토 카르데날 신부는 《침묵 속에 떠오르는 소리》에서 “하느님께서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를 갈망해 오셨다.”고 했다. 성경에서는 그분께서 내 머리카락 한 올까지 헤아리고 계신다고 전한다. 또한, ‘내가 그분을 알기 전부터 그분이 나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헨리 나웬의 이야기는 내 마음을 뜨겁게 한다.

나태주 시인은 <꽃을 보듯 너를 본다>는 시집에서 “저녁 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이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이 행복이라고 했다. 소박하고 어여쁜 행복이다. 삶이 곤두박질쳐도 ‘아버지’ 하고 부르고 또 하소연할 분이 계신다면, 그런 삶은 그래도 견딜 만하다. 그래서 내 삶의 주인이 ‘나’라고 말하기 어렵다. 내 삶은 나를 더 사랑하는 이의 소유이다.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분이 나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한용운 시인이 <복종>이란 시에서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만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라고 노래했을까.

그리고 한용운은 계속해서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하다며 “그것이 나의 행복”이라 했다. 신앙이란 결국 ‘더 큰 사랑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 사랑에 함몰되어, 내 어둠조차 빛이 되는 길이다. 이제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분이 살게 하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내가 그분처럼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희망하는 것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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