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는 교회 이전에 예언적 '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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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는 교회 이전에 예언적 '운동'이었다
  • 세바스티안 카펜 신부
  • 승인 2018.12.09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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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문화적 변혁-3

그리스도교는 예언적 '운동'이다

모든 새로운 문화는 추종자들의 공동체가 필요하다. 그래서 예수는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실”(마르 3,14) 남자와 여자를 불렀다. 이것은 곧 제자란 스승이 가진 믿음과 희망과 결단과 운명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기존 지배문화와의 모든 연결을 끊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복음은 우리에게 제자들이 그들의 생계수단을 포기하고 가족과의 모든 끈을 끊어버렸으며(마르 1,20), 의식적인 손씻음의 규칙에 동의하기를 거부하였고(마르 7,1-6), 안식일의 법칙을 어겼으며(마르 2,23-24), 남녀관계에 관한 기존 금기를 비웃었다고 가르쳐준다(루카 8,1-3).

오순절 이후 공동체의 새로운 문화적 특징에 관하여도 복음은 매우 중대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공동으로 가졌으며 각자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가졌다(사도 4,32-35). 직분이나 사회적 지위에 따른 구분이 결코 없었다. 바오로 사도는 공동체를 형제라고 불렀다. 사실 초기 공동체는 유다주의에 비교해 본다면 한 점에 불과하였다.

이 새로운 문화는 본질상 예언적이었으며, 하느님의 통치에 중점을 두고 새로운 인류의 창조를 향하고 있었다. 이 공동체는 예수 주위에 자리를 잡고 그를 경배하는 것만으로 불림을 받았다고 생각하지않았다. 공동체의 운명은 예수를 머리로 하고 알지 못하는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가 의도했던 것은 공동체라기 보다 운동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

 

지연된 종말: 예언적 운동에서 제도적 교회로 쇠퇴

예언적 운동으로서 그리스도교의 쇠퇴는 자각과 존재라는 상호변증법적인 틀 속에서 이해될 수 있겠다. 자각의 차원에서 가장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 요소는 하느님나라의 긴박한 도래에 있어 희망이 성취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기존 사회질서는 바뀌지 않았고 혜택받지 못한 계층은 여전히 비참한 그들의 실존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의식의 위기를 조성하고 본질적인 믿음의 미확인에서 비롯되는 절망과 회의, 즉 “인식의 불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위와 같은 여건 하에서 공동체는 기대와 성취의 간격을 좁히기 위하여 신앙을 재해석하게끔 되는 것이다. 한 가지는 하느님나라의 “도래”가 우리의 때가 아니라 하느님의 때에 따르는 것(2베드 3,8)이라는 해석이다. 더 지배적인 해석은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통치는 예수의 부활사건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이와 같은 해석은 예수와 하느님을 하나로 보는 것인데, 초기 가르침은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다”(사도 10,38)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점차적으로 초점은 예수 안에 이미 와 계신 하느님에게로 옮겨졌다. 이후로 공동체의 중심에는 머리로서의 하느님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는 하느님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신앙의 핵심에 있어 이같은 이동은 하느님의 나라를 교회와 같은 것이라고 보는 견해와 매우 가까이 있었다. 이러한 견해는 여기 교회 안에 현존하시는 부활한 주님에 대한 신앙을 통하여 구원이 가능하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 견해는 또한 공동체 자체에 대한 이해에도 심각한 결과를 가져왔다.

만일 교회가 구원이 가능한 유일한 영역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교회에 회개하고 합류할 때에만 구원될 수 있는 것이다. 전통적 의미의 선교는 교회의 영역을 넓히거나 다른 나라에 이식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예수가 그것을 위해 살았고 죽었던 이 예언직분의 쇠퇴는 선교의 팽창과 역사적 예수의 실추라는 직접적 결과를 초래하였다.

운동이 철학과 예식으로 대체되다

예언직분과 제도적 자각 사이의 간격은 처음에는 유다주의에, 다음으로는 희랍로마 세계라는 문화적 환경에 적응하려는 교회의 시도에 의해서 더욱 벌어졌다. 유다주의로부터 그리스도교는 회당 집회제도와 예배의식, 계시주의와 기타 경전을 물려받았다.

또한, 역사적 예수의 실추와 신비예식의 영향으로 본래 종말론적인 희망을 역사적 행동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예수의 식탁친교는 단순한 예식으로 변모하였다. 예수 자신은 메마르고 형이상학적인 실체의 일련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러므로 희랍-로마 세계를 정복한 그리스도교에 남은 것은 철학자들의 지혜 앞에 굴복한 예언직분의 상실이었다.

자각의 차원에서 이와 같은 변화는 그리스도교의 사회적 배경의 근저에서 일어났던 심각한 변혁을 조성하였다. 예수가 지지했던 사회계층은 팔레스타인의 혜택 받지 못한 계층이었다. 그는 팔레스타인 사람들 속에서 제자들을 뽑았고 이러한 경향은 2세기경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엔젤스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현대의 노동자 운동과 매우 유사하며 또 귀중한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고 말하였다. 가난한 계층이 더욱 끌렸던 초기 그리스도교 새로운 신앙의 매력은 긴장의 시대에 세계주의와 적극적인 형제애 실천으로 매우 분명한 선택을 마련해 주었던 선호성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개량주의와 급진주의

그러나 3세기경부터 이와는 반대현상이 나타났다. 종말론적 의식의 상실과 고전문화의 옹호정책은 상류계층에게도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였다. 지식인들과 부유한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쇄도해 오자 그들은 교회의 운명을 좌우하기 시작하였고 예수의 급진적인 사회적 메시지를 부유한 신자계층의 이익에 어울리도록 재해석하였던 것이다.

재화는 이제 교회사도직 수행의 수단으로 간주되기 시작하였다.

“하느님 왕국”의 개념은 가난, 착취 그리고 무관심과 공존하기 위하여 추상화되었다. 정치권력에 대한 예수의 급진적인 비판은 로마정권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어조가 약해져 버렸다(로마 13장).

그러나 그리스도교 역사에 있어 예언적 실천이 완전히 죽었던 때는 결코 한 번도 없었다. 소위 이단이라고 일컬어지는 이론들도 단순히 정통교리로부터의 빗나감이라고 볼 것이 아니라, 오류도 있었겠지만 예수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하여 예언적 급진주의로 돌아가려는 어떤 시도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초기의 예언적이고 성령중심의 경향들은 그리스도교의 주류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수도원에 안착하였다. 중세의 여러 가지 반대운동들은 예수의 사회적 메시지와 종말론적인 희망을 계속 보존해 왔다. 그러나 그들은 공식교회의 변두리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원출처] <예수는 어떻게 살았나-그리스도교적 사회활동>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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