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에서 띄운 요한의 묵시록
상태바
식민지에서 띄운 요한의 묵시록
  • 한상봉
  • 승인 2018.12.03 12: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요한묵시록 묵상-4

깃발
-강태형

네가 온몸으로 저어가는 것이 고공의 바람 속을 헤쳐가는 것이
너의 온몸이고 생애인가
그 완강함의 표상으로 너는 흔들린다
기수가 너를 높이 들수록 세차게 달려갈수록 너의 흔들림은 그렇게 아프고 아름답다
 

살육당하는 그리스도인

요한이 썼다는 「묵시록」은 로마 제국에 대해서 한마디도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로마의 반대편에서 시종일관 말하고 있다. 「묵시록」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형식을 띠고 있는데, 아마도 이 지역에 머물던 방랑 설교자 가운데 한 사람이 쓴 것 같다. 그는 자신을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형제' 이며, '예수를 믿는 사람 으로서 환난을 같이 견디어' 온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언을 위해' 파트모스 섬에 오게 되었다고 말한다(묵시1,9). 결국 「묵시록」은 로마의 식민지 백성으로서 박해받는 가운데 쓰여진 것이다.

그가 받은 박해는 결코 개인사가 아니며 그리스도인 전체의 공동운명이었다. 이렇게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박해와 순교를 통한, 증거하는 삶 안에 있었다. 베르가모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보듯이, "충실한 증인 안티파스가 사탄이 사는 너희 고을에서 죽임을 당할 때"(2,13 참조)를 기억하고 있으며, 이름 없이 숨져간 많은 순교자들이 기억된다. 다섯째 봉인을 뜯는 순간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그리고 그 말씀을 증언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영혼이 제단 아래 자리잡고 있다." (6,9)라고 전한다.

로마는 언제나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를 위해서 증언하는 일에 충성스러운" 이들과 싸우러 나갔으며(12,17), "성도들의 피와 예수 때문에 순교한 사람들의 피에 취했다."(17,6) 여기서 우리는 교회와 로마, 그리스도와 황제는 바닥부터 머리끝까지 대립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짐승이나 그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았기" 때문에 머리가 잘려 나갔고, 이것은 곧 로마 제국과 황제에 대한 숭배를 거절한 대가로 주어진 죽음이었다.

황제 숭배는 로마의 식민지였던 아시아에서 성행하였는데, 에페소에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초상이 걸린 황제 신전이 세워졌으며, 요한이 '거짓 예언자' 라고 말했던 두 번째 짐승은 황제 숭배를 주관하는 대제사장을 뜻했다(13,11 – 14). 이러한 '고귀한 짐승들' 은 '국가 이데올로기, 국가 숭배, 황제와 국가에 대한 신앙고백'을 백성들에게 고취시켰다. 아시아에서는 로마에 대한 충성심을 황제 숭배를 통해서 관철시키려 하였으며, 이를 거부하는 사람은 충성심이 없는 자로 여겨져 고발 체포 구금 처형되었다.

 

Apocalypse Tapestry ©S. Lemaire/hemis.fr

짐승, 대바빌론, 창녀인 로마

요한은 세상에서 독점적 권력을 누리는 로마를 관찰하였다. 로마는 "세상 임금들을 다스리는 왕권을 가진 큰 도성"(17,18)이며, "모든 종족과 백성과 언어와 민족에 대한 권세" (13,7)를 갖고 있다. 온 땅의 사람들이 로마에 복종하고 감탄하면서 "누가 이 짐승과 같으며 또 누가 그와 싸울 수 있으랴?"(13,4) 하고 말한다. 지상의 왕들도 로마와 관계를 맺어야 했고, 로마의 일을 거들고, 그 대가로 호사를 누렸다.

로마의 부는 헤아릴수 없었을 게 뻔하다. 도시는 엄청난 사치를 누렸고, 상인들은 부자가 되었다. 그네들은 세상의 부를 로마로 실어 왔다. 그러나 식민지는 굶주림이 들끓고, 곡물가격은 엄청나게 올랐다. "하루 품삯으로 고작 밀 반 되, 아니면 보리 석 되를 살 뿐이다. 올리브 기름이나 포도주는 아예 생각하지도 말아라."(6,6) 사실 이즈음에는 전쟁과 물자부족, 전영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글거렸고, 곡물생산자들은 가격을 높이기 위해 곡물을 시장에 내놓지 않았다.

한편 요한은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로마를 거대한 '창녀' 라고 묘사하였다. "나는 진홍색 짐승을 탄 여자를 보았습니다. 그 짐승의 몸에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한데,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자주색과 진홍색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치장하였습니다. 손에는 자기가 저지른 불륜의 그 역겹고 더러운 것이 가득 담긴 금잔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마에는 ‘땅의 탕녀들과 역겨운 것들의 어미, 대바빌론’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의 신비였습니다."(17,3 –5) 바빌론은 로마를 상징하는 별명이다. 바빌론은 하느님의 백성에게 적개심을 가진 도시이며, 하느님의 심판을 받은 도시다. 이는 곧 로마가 하느님의 심판 아래 놓이게 될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로마의 몰락

장차 사탄의 권세를 부리는 영원한 도시, 로마는 종말을 맞을 것이다.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바다에 던지며 말한다. "그 큰 도성 바빌론이 이렇게 던져질 것이니 다시는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18,21) 하늘의 새들조차 이런 명령을 받는다. "왕들과 장성들과 장사들과 말들과 그 위에 탄 사람들과 모든 자유인과 노예와 낮은 자와 높은 자의 살코기를 먹어라."(19,17 – 21) 이 끔찍한 광경을 보고 그들은 아연실색하며 탄식할 것이다.

역사의 승자라고 자부했던 폭군들은 언제까지나 승전보를 올리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살육당한 순교자들의 탄원을 듣고 계시기 때문이다. "거룩하시고 진실하신 대왕님, 우리가 얼마나 더 오래 기다려야 땅 위에 사는 자들을 심판하시고 또 우리가 흘린 피의 원수를 갚아주시겠습니까 ?"(6,10) 응답은 순교자의 숫자가 차면 종말이 오리라는 것이었다. 이 보다 더 큰 위로는 없다. 이제 순교자 들의 참혹한 죽음이 의미를 얻고, 폭력은 중단될 것이다. 순교자들은 흰 예복을 받고 종말을 기쁘게 준비한다. 메시아를 상징하는 아기가 탄생하고, 이윽고 종말사건이 시작된다. 이제 미래는 역사의 희생자들에게 맡겨지게 된다.

 

Heavenly Jerusalem, Beatus of Liébana, Las Huelgas Apocalypse

새 하늘 새 땅에 대한 전망

"그뒤로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21,1) 이사야 예언서에서는 새것이 옛것에서 나온다고 하였지만, 묵시록에서는 새것이 옛것을 완전히 대치한다. 요한이 경험한 로마 제국은 너무도 위험한 것이었기 때문에 하늘과 땅은 완전히 새로워져야 했던 것이다.

바다 역시 이젠 존재하지 않는다. 창세기 1장에 의하면 바다는 혼돈의 장소로서, 하늘과 땅이 거기서 나왔다. 그러나 요한은 바다를 로마 제국을 상징하는 무시무시한 짐승이 나오는 장소로 여긴다. 로마 군대 역시 바다를 거쳐 세계를 침략하였으며, 식민지 백성들의 재산을 바다를 통해 배로 실어 날랐다. 그러니 당연히 바다는 원망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이른바 지중해는 로마의 바다였고, 요한과 같은 식민지 백성들에게는 언제나 불안감을 조성하였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은 바다가 아니라 새롭게 창조된 하늘에서 내려온다.

지상의 예루살렘이 변모하는 것도 아니다. 완전히 하느님께 속해 있던 곳에서 출현한다. 그곳 옥좌에서 음성이 들려온다. "이제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21,3-4) 이러한 묵시록의 전망은 로마 지배로 인해 억압받고 순교한 이들의 눈물과 고난, 고통과 비명에 대한 가장 구체적이고 강력한 항의가 된다.

지하서적 묵시록의 공동체 비전

요한의 「묵시록」은 공공도서관에서 읽혀지고, 즐겨 토론할 수 있는 달콤한 서적이 아니었다. 박해받는 자들의 손에만 전달되고, 산이나 황무지나 동굴 등의 도피처, 또는 한밤중 다락방에서 남몰래 읽어야 했던 지하서적이다. 모든 유언비어가 그러하듯이, 박해 받는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위안을 주고, 희망을 건네줄 메시지를 필요로 했다. 이런 점에서 묵시록은 암호로 가득찬 책이며, 상징을 통해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폭로하는 책이다. 마치 1970년대 유신정권의 부정과 허위를 폭로했던 김지하의 담시 '오적' 처럼 말이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로마 제국의 극심한 박해가 지속되고 황제 숭배가 강요 되는 상황에서, 요한은 「묵시록」을 통해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것일까? 당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이 상황에서 내가 최소한으로 피해를 덜 당하고 견뎌 나갈 수 있을까?" 또는 "내가 살아 남기 위해서는 로마 제국에 대해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하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위해서, 그리고 온 세상의 요청에 응답하기 위해서 어떤 증거를 보일까 ?" 하고 자문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물음에 대한 답변은 오직 종교처럼 포장된 로마의 '세계권력' 을 거부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고백을 한다면 당연히 로마의 생각과 질서를 떠나야 했다. "내 백성아, 그 여자를 버리고 나오너라. 너희는 그 여자의 죄에 휩쓸리지 말고 그 여자가 당하는 재난을 당하지 않도록 하여라."(18,4) 로마의 축제나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곧 로마와 공범이 되는 것이다. 희생 제의에 쓰였던 고기를 먹는 것은 곧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따라서 이에 저항하고 박해를 참아냄으로써 그리스도의 주권을 지키라는 뜻이다.

결국 이러한 저항과 인내가 그리스도인들을 로마 사회에서 아웃사이더(국외자)로 만들어 놓았으며, 그들은 생명을 위협 받는다. "잡혀갈 사람은 잡혀갈 것이며, 칼을 맞아 죽을 사람은 칼을 맞아 죽을 것입니다."(13,10) 그들은 현실에 복종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뜻과 계명에 복종한다. 그러나 그들은 마지막에 '승자' 라 불릴 것이며, 하느님의 미래를 약속 받는다. 그러한 가운데 봉헌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예배는 혁명적이며, 교회는 이 기억을 통하여 참된 삶을 배울 것이다.

[마무리 묵상]

꿈에
호랑나비를 보는 이도 있답니다.
마야 부인은 하얀 빛 눈부신 코끼리를 보았다 하며,
저마다 귀하고 고운 꿈들을 꾸곤 한다 하지만
제가 꾸는 악몽도 꿈은 꿈인가요,
하느님.
서슬 푸른 칼날, 작두도 하나
제 목이 달아나도 그걸 꿈이라 해야 하나요, 하느님
꿈도 꿈 나름이라고 일러주세요.
제 꿈은 개꿈이라고
말을 건네주세요.
악몽 같은 현실,
아니 현실 같은 악몽 속에서
저를 구해주세요.
저도 좋은 꿈,
사랑스럽고 도타운 얼굴을
마주보고 크게 웃는
그런 꿈만 기억하고 살게 해주세요.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느님.
그런 세상 현실이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주님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가톨릭일꾼> 종이신문을 구독 신청하려면 아래 배너를 클릭하세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