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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은단 향...정주에 가도 싶다-남북정상회담을 바라보며

[신배경 칼럼]

정주..정주..정주..
난 시인 '백석'을 좋아한다. 시를 좋아하기 때문은 아니고, 시를 아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그의 특별한 사랑 때문도 아니고, 그가 놀랍도록 미남이었기 때문도 아니다. 그의 시에 정주가 묻어있지 않을까 해서. 그의 시에 정주가 배어있지 않을까 해서. 그의 시를 써내려간 그의 언어가 잉태된 곳이 정주가 아닌가 하여. 혹시나 내가 아는 누군가와 스쳤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여. 그래서. 그가 좋다. 평안북도 정주. 나의 외가는 정주다.

내게 은단 향으로 기억되는 나의 외할아버지는 말수가 없으신 분이셨다. 할아버지는 날 만나는 날이면 한 손에는 오백원 짜리 동전을 쥐어 주시고는 양복 주머니에서 은단을 꺼내어 다른 한 손에 반짝이는 은색 알갱이들을 부어주시곤 하셨다.

점잖아서 좋으셨더란다. 외할머니에게 많은 구혼자들이 있었지만 남들 보기에 그저 평범했던 할아버지를 선택하셨다고 한다. 점잖아서. 난 본 적 없는 나의 외할머니는 많은 할머니들의 역사가 그러하듯 소문난 미인이셨다고 한다. 말 타고 청혼하러 왔던 지역 유지의 아들 대신 소박하고 점잖았던 외할아버지가 그냥 좋았더란다. 재산보다 인품을 선택했던 할머니는 결국 그 시대 보기 드문 신랑을 만나신 게다.
 

사진제공=신배경

어머니의 어릴 적 기억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도와 부엌을 드나들며 밥상을 차리셨고,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귀가 길에는 종종 간식거리를 손에 들고 오셨는데, 특히 겨울에는 풀빵을 품에 넣고 달려와 딸아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마냥 기뻐하시는 그런 신랑이요, 그런 아비였다고 한다. 어머니의 기억을 통해 전해 듣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은 부러운, 아름다운 부부의 모습이다.

할아버지는 고향인 정주에서 일가를 이루어 사셨다. 할아버지의 유일한 고향 친구인 '낙주할아버지'께 서씨 마을로 기억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일종의 씨족 공동체였지 싶다. 일가가 천주교라 할아버지도 자연스레 요셉이라는 세례명을 지니셨는데, 외할머니는 교회를 다니셨다고 한다. 외가식구들 중 외할머니의 세례명만 없는 것을 보면 아마도 서로의 종교를 존중하는 분위기였을 것이라는 짐작을 해본다.

해방 이후 수상스러운 분위기에 할아버지는 외할머니의 일가와 서울로 이주해 안국동에 자리를 잡으셨다. 할아버지 본가의 가족들은 전답을 버릴 수 없어 고향을 지키며 분위기를 보고 있던 중 전쟁이 터졌고, 당시 서울중학교를 다니던 학생이었던 외할머니의 남동생은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이들에게 끌려가 그 뒤로 생사를 알 수 없었다. 할아버지 또한 정주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끌려가셨지만 목숨을 건 탈출에 성공하여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가셨고, 첫 째와 열 살 터울이 나는 딸아이를 낳으셨다.

첫 딸 이후 줄줄이 아들을 보다가 부산 피난살이 중에 얻은 딸아이가 바로 내 어머니이시다. 그 이후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부모님을 비롯 본가의 모든 가족과 생이별을 당해야만 했다. 할아버지는 그 시간을 통과하며 청력을 잃고, 고향을 잃고, 살아계신 부모님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고통을 얻었다.

외할머니의 언니인 이모할머니는 세실리아라는 셰례명으로 불리셨다. 전쟁으로 잃은 사랑했던 연인을 그리워하시며 결혼하지 않고 평생을 혼자 사셨다. 말씀을 아끼셨기에 친척들 사이에서는 세실리아 할머니가 가슴에 묻은 연인이 북에 두고 온 애인이라는 얘기도 있고, 북에 간첩으로 넘어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는 얘기도 있어서 분단이 이별의 원인이 된 줄로만 알았다. 훗날 듣게된 진실은 양민학살의 희생자. 당시 일본을 오가는 사업가였던 그 분은 전쟁이 터짐과 동시에 마구잡이로 끌려가셨고, 그 길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모할머니는 그렇게 세상을 떠난 연인을 가슴에 품고 연인이 쓰던 포마드(지금의 왁스?)를 꺼내어 향을 맡으며, 그리움을 달래셨다고 한다. 어렸던 내 눈에도 빼어났던 미인이셨기에 할머니가 되셔서까지 구애하는 분들이 있으셨지만 끝까지......혼자 사셨다. 세실리아 할머니를 염했던 장의사분께서 이렇게 고운 할머니는 처음 본다고 하셨던 기억...(참고로 난 안타깝게도 외탁이 아닌 친탁이다..흠..흠..) 곱디 고왔던 세실리아 할머니...

내 어머니는 나와 둘이 외식하실 때면 열에 아홉은 냉면을 찾으신다. 어느 날 나는 어떻게 엄마는 평생을 냉면이냐고 화를 낸 적이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날에 대한 미안함이 참으로...짙어져만 간다..

외가가 실향민이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1980년대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뚫어져라 보던 어머니와 이모... 가족 모임이면 질리도록 등장하는 냉면과 만두... 외가에서만 들을 수 있는 특이한 사투리... 할아버지가 나를 부르시던 그 사투리...

외할아버지는 통일동산 동화경모공원 “평북 G-3"라인에 누워계신다. 그 곳에서 정주가 보일리 만무하지만 북녘을 향해 나의 할아버지와 수 많은 실향민들이 평북, 평남, 함북, 함남 등 각 구역별로 줄을 지어 누워계신다. 늘 쓸쓸해보였던 할아버지의 어깨가 일찍 돌아가신 할머니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오늘따라 할아버지의 은단향이 그립다. 이모할머니의 애인이 쓰셨다던 포마드향이 궁금하다. 이 밤 할아버지의 음성이 들리는듯하다. 이노메 에미나이...이노메 에미나이...

"할아버지, 남북정상회담을 한다고 해요. 잘 되면..저...정주에 갈 수 있을지 몰라요. 정주 가는 길 다시 연결되면... 제가 모셔다 드릴께요, 고향땅에..."

내 어머니 살아계실 때, 어머니께서 걸어다닐 수 있으실 때 손잡고 “정주”에 가고 싶습니다. 어머니께 조만간 평양 가서 옥류관 냉면 맛 볼 수 있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옥류관도 좋지만 “정주”에 꼭 가보고 싶다고 하십니다. 어머니의 본가가 “정주”인데 정작 한 번도 못 가보셨다면서. 외조부모님이 보았을 산천을 보고 싶으시다고, 정주의 공기를 마셔보고 싶으시다고 하십니다.

평소 이북이야기를 잘 안 꺼내시는 어머니께서 자꾸 그러시니 어머니가 안쓰러워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모녀의 꿈은 북녘땅에 가보는 것입니다. 실향민 묘역에 잠들어 계시는 할아버지 모시고 “정주”에 가는 것입니다.

신배경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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