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이들이 같은 노래를 부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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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들이 같은 노래를 부르면
  • 한상봉
  • 승인 2018.06.19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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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최근에 그림 공부를 하면서,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했다. 라파엘로가 돈방석에 앉은 이유는, 간단하게 교황과 귀부인과 귀족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기 때문이다. 거룩한 성화 속 인물을 묘사하면서 그 탄력 있는 피부를 가진 고상한 귀족들을 모델로 삼는다면 종교적 영광과 더불어 막대한 재산도 한꺼번에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고지식한 미켈란젤로는 단 한 점의 초상화도 그리지 않았다. 기껏해야 시스티나 성당에 그려진 <최후의 심판>에서, 당대의 교황과 주교들과 귀족들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이들의 얼굴에서 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니, 미켈란젤로의 생애가 고단할 수밖에 없었다.

늙고 가난한 사람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by Ricardo Levins Morales

렘브란트는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자화상을 그렸지만 남의 초상화는 그리지 않았다. 빈센트 반 고흐는 자화상도 그리고 다른 사람의 초상화도 그려 주었지만, 고흐가 그린 초상화의 주인공들은 빠짐없이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고흐는 탕기영감과 우편배달부 룰랭과 그의 부인 등을 성인처럼 화려하게 캔버스에 담았다. 고흐는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리며 저녁 식탁에 둘러앉은 가난한 농부 가족을 ‘성 가정’이라고 불렀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늙고 가난한 사람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들을 묘사하기에 적합한 말을 찾을 수 없다.”고 고백했다.

위대한 영혼을 가진 예술가들은 그의 마음이 닿는 곳으로 붓을 옮겨 놓을 줄 알았다. 광부들의 수척한 얼굴과 흙처럼 거친 농부들에게서 ‘일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하고, 요람을 흔드는 엄마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읽어 내렸다. 고흐가 얼마나 깊은 눈으로 사랑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는지 잘 알 수 있는 편지가 한 통 있다. 1883년 3월 21~28일 사이에 테오에게 보낸 글이다.

“사랑에 빠지면 태양이 더 환하게 비추고 모든 것이 새로운 매력을 갖고 다가온다. 깊은 사랑에 빠지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데, 그건 정말 아름다운 일이다. 난 사랑이 명확한 사고를 막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사랑할 때 더 분명하게 생각하고 이전보다 더 활동적이 되거든. 사랑은 영원한 것이다. 물론 그 외양은 변할 수 있다. 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사랑에 빠지기 전과 후의 모습은 마치 불 꺼진 램프와 타오 르고 있는 램프만큼이나 다르다.”(<반 고흐, 영혼의 편지>, 예담, 2017)

아무리 좋은 램프라도, 빛을 발산해야 세상이 밝아지고, 만사가 또렷하게 보인다. 예술가란 자기 영혼 깊숙한 곳에서 심지를 돋우어 불을 밝히는 사람들이다. 그 빛이 가진 자들의 허위의식과 가난한 이들의 순정한 헌신을 알아보게 한다면, 세상을 위해 얼마나 다행한 일이고, 하느님 또한 얼마나 흐뭇하게 여길까, 생각한다. 하느님께서 느끼시는 창조의 보람은 맑고 밝은 눈을 가진 이들 때문에 현실이 된다.

 

빈센트 반 고흐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술가의 안목을 가진다. 이들은 상식에 매이지 않고 남루한 사람들 가운데서 그리스도 왕을 발견하는 사람들이다. 하느님의 창조가 농부들의 손을 통해 이어져 왔음을 알아채는 사람들이다. 주부가 음식을 만들고 식탁을 차릴 때를 하느님 나라가 제공되는 순간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택배노동자가 가브리엘 천사처럼 기쁨의 선물을 전달하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복음서의 전갈처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의 십자가를 제 것처럼 지고 가는 사람은 사제들만이 아니다. 수도자만이 아니다. 공장에서, 들판에서, 거리에서, 병원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고귀한 땀을 흘리고 있는 그 모든 사람이 제 몫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고 있다. 구원의 빛이 저들에게서 터져 나온다.

만인은 만인에게 형제

암 하아레츠(Am-Haaretz), 땅바닥에 가슴을 대고 사는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는 곳으로 늘 새삼 거듭 길 떠나는 분이 예수님이다. 세상의 흙수저들에게서 아버지(Abba)의 음성을 듣는 분이다. 그들에게 먼저 말을 건네고, 위로하며, ‘이제부터 친구가 되자.’고 청하시는 분이다. 그런데 한사코 주님의 제안을 거부하고, “당신께서는 저 높이 더 멀리 주님으로만 계셔야 합니다. 주님과 제가 친구라니요? 당치 않아요.” 하면서, 예수님을 멀찍이 밀어놓는 사람들이 있다. 전통적으로 고위성직자들의 태도가 그랬다. 지체가 높으신 양반들이 그랬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친구라면, 예수님과 ‘하찮은’ 백성들이 친구라면, 성직자와 다른 신자들 사이에 상하 계급이 있을 리 없다. 고위공직자와 시민 사이에 우열이 있을 리 없다. 만인은 만인에게 자매이며 형제라는 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이상이기 때문이다.

이 예수님의 평등한 사랑을 세상에서 올곧게 이뤄보자는 게 ‘사회교리’다. 이천 년 전에 쓰인 복음을 지금 읽으려 하니, 알아듣기 힘들다. 고대교회의 교부들조차 복음서를 그대로 이해하기 힘들어 했다. 그래서 복음을 그 시대의 상황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꼼꼼히 따져보고 고민해 온 사람들이 교부들이고, 교회학자들이다.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 당시 민중들의 언어로 이야기하셨듯이, 우리 시대의 교회도 우리 상황에 비추어 복음을 다시 읽고, 풀어주고, 생생하게 되살려야 한다. 그래서 죽은 믿음이 아니라 내 삶의 곳곳에서 나를 거듭 각성시키는 복음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들이 많아져야 한다.

 

by Ricardo Levins Morales

사랑과 정의를 한꺼번에

“사랑은 정의의 영혼이며, 정의는 사랑의 몸”이라는 말이 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뿐 아니라 그 사람을 둘러싼 상황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다. 그 상황이 아프거든 치유하고, 그 상황이 배고프면 먹을 것을 주고, 그 상황이 억눌려 있으면 해방시켜야 진짜 사랑이다. 그래서 영혼에서 맞닿은 사랑은 정의로운 실천으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우리는 진공 속에서 아프거나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는 세상 한가운데서 아프고 사랑한다. 이 사랑과 정의를 한꺼번에 보자는 게 ‘사회교리’다. 하느님의 대변인이었던 예언자들의 목소리가 그랬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비가 공평과 정의를 요청한다고 전했다. 그 하느님의 자비를 내 몸으로 다시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래서 예언적 신앙이 아니라면, 교회의 선포는 김빠진 동어반복이다.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동어반복은 감동이 없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고백에서 시작되었다. 그분이 어좌에서 내려오시고, 산에서 촌락으로 숨어드셨다. 사람들이 가난한 마을 어귀에서 그분의 얼굴을 알아볼 때마다 등불이 하나씩 켜졌다. 그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며 수군거렸다. “복음서가 사회교리다.” 수군거리던 사람들은 한 손에 등불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형제요, 자매’라 부르던 사람들의 손을 잡았다. 그래서 낯선 이들이 같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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