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블료프의 '삼위일체': 사랑의 집에서 살기
상태바
루블료프의 '삼위일체': 사랑의 집에서 살기
  • 한상봉
  • 승인 2018.05.22 19: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러시아 이콘 묵상-2

안드레이 루블료프(Andrei Rublev, 1360-1427/1430)는 러시아 성인 세르기(1313-1392)을 추모하기 위해 1425년에 <삼위일체>를 그렸다. 이 이콘은 우리에게 세 거룩한 천사가 나누고 있는 친밀한 대화에 동참하라고, 식탁에 더불어 앉으라고 부드럽게 초대한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안드레이 루블료프>(1966)의 한 장면.

<러시아 미술사>에서는 미술사학자 이진숙은 루블료프를 “수줍고 조용한 성격의 수도승”이라고 소개하며, 루블료프의 스승이었으며 러시아 이콘을 발전시킨 페오판 그렉의 강고하고 금욕주의적인 이콘에 비해, 루블료프의 이콘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기 보다는 자비를 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으며, 더할 나위 없이 섬세하고 부드럽다”고 평가했다.

“루블료프는 미천한 인간들의 어리석은 욕망을 질타하는 대신에 인간을 감싸 안음으로써 하느님을 위해 존재하던 예술을 인간을 축복하는 예술로 변화시켰다.”며, 그 최고의 완성작으로 <삼위일체>를 꼽았다.

참고로 1374년에 그린 페오판 그렉의 <삼위일체>에서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등장하며, 중앙의 천사가 날개를 활짝 편 모습으로 화면을 압도하고 있어, 세 천사 사이의 위계질서를 명확히 한다. 이 압도하는 천사에게 중요한 것은 약속의 아들 이삭이 태어나리라는 확신이며, ‘삼위일체’의 관점에서는 세계의 지배자 예수님이 태어나리라는 확신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루블료프의 <삼위일체>에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에피소드는 사라지고, 천사들의 모습만 등장한다. 천사들은 조촐한 식탁에 둘러 앉아 있다. 여기서 루블료프는 세 천사에게 동일한 비중을 부여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성부, 성자, 성령의 본질적인 동일성을 완벽하게 형상화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페오판 그렉의 <삼위일체>

1. 삼위일체, 사랑의 집으로

루블료프의 <삼위일체>는 성자한테 몸을 기울이신 성부의 움직임과 성부한테로 몸을 기울이신 성자와 성령 두 분의 움직임은 세상의 어떤 권세도 해체시킬 수 없는 모임, 원을 그리며 둥글게 앉은 저 사랑의 모임 안으로 우리도 들어가게 해 준다. 이 사랑의 집은 경계가 없으며, 거기서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꺼이 받아준다.

“참새도 마침내 집이 있고 ... 주님의 집에 사는 이는 복되도다.”(시편 84,3-4)

<삼위일체> 이콘의 성경 배경은 마므레 참나무 곁에서, 사라가 세 천사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세 천사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생길 것이라고 알려주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신비는 세 천사를 대접한 사라와 아브라함의 ‘친절’이 이루어지고, 연로한 부부에게 잉태를 알리는 하느님의 ‘친절’에서 비롯된 환대의 신비이다.

이 천사들의 출현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당신 외아드님을 보내시고, 성령을 통해 새 생명을 주시는 거룩한 사명의 예형이다. 여기서 마므레 참나무는 생명의 나무가 되고, 아브라함의 집은 우리와 함께 머무시는 하느님의 거처이며, 그 산은 기도와 묵상의 영적 고지이다.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삼위일체>

2. 강생의 의미

사라는 송아지 고기를 대접했는데, 성부, 성자, 성령의 손은 그 희생제물의 의미를 드러낸다. 성자는 두 손가락으로 음식을 가리키며 강생을 통해 신성과 인성을 겸비한 희생양이 되시는 당신의 사명을 암시한다. 성부는 축복하시는 손짓으로 성자를 격려하고, 성령은 제대 앞에 있는 열린 사각형을 가리키면서, 이 거룩한 희생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알린다.

이렇게 성삼위의 친밀한 삶의 신비가 보이는 가운데, 성령의 손가락은 성작 밑 앞쪽에 열려있는 작은 사각형을 가리키고 있다. 그 자리는 우리가 거룩한 모임에 들어가는 입구인데, 그 길은 고통의 길이다. 즉,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쳐 거룩한 희생에 동참하고자 하는 이들만이 이 거룩한 식탁에 앉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곳은 순교자의 유골을 모시는 곳이며, 사랑의 집에 들어가려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친 이들의 유해를 모시는 곳이다. 십자가 고통을 받으신 예수처럼, 세 거룩한 천사의 엄숙한 아름다움은, 러시아인들이 즐겨 말하는 것처럼 ‘즐거운 슬픔’에서 나오는 것이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요한 15,20)

그래도 이 길만이 하느님께 가는 유일한 길이다. 그 길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과 평화를 향해 나 있는 길이기에, 우리가 믿고 갈 수 있는 길이다. 헨리 나웬은 본회퍼와 마틴 루터 킹과 오스카 로메로 같은 분들이 이 길을 선택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난 몇 세기 동안 자비하신 하느님의 증인으로서, 제 목숨을 바친 익명의 남녀노소가 택했던 길이기도 하다.

“둥글게 원을 이루고 있는 사랑의 모임과 십자가가 둘 다 공존하는 저 신비스러운 장소로 우리 마음이 더 깊이 끌리면 끌릴수록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편히 머무는 가운데 세상에서 정의와 평화를 위해 몸 바쳐 투쟁하는 길을 더욱 완전하게 이해하게 된다.”(헨리 나웬)

[참고]
<러시아 미술사>(이진숙, 민음인, 2007)
<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이주헌, 학고재, 2006)
<주님의 아름다우심을 우러러>(헨리 나웬, 분도출판사, 1989)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