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처벌하는 아버지, 영화 <남한산성> <침묵> 속 아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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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처벌하는 아버지, 영화 <남한산성> <침묵> 속 아비들
  • 김원
  • 승인 2018.01.30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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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의 문화칼럼] 

어떤 인간은 자신만의 추락이 아닌, 몸담은 세계 전체의 몰락을 감지하기도 한다. 남들보다 앞서 느끼긴 했으나, 수습할 수도 되돌릴 수도 없다. 돌이키기엔 너무 많이 왔다. 세계의 흐름은 이미 한쪽으로만 내달린다. 이제 어쩔 것인가? 그대로 앉아서 다함께 무너지는 순간을 지켜볼 것인가, 조금이라도 저항해 볼 것인가?

몰락을 살아낸다는 것

그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깊은 고뇌에 빠진다. 어쩌면 고뇌의 형태를 하고 있는 절망인지도 모른다.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고독이다. 자기에게만 유독 생생한 속도와 압력으로 느껴질 뿐, 다른 이들은 여전히 둔감해 보인다. 차라리 그 속에 파묻혀 막연한 희망을 가져보고도 싶다.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긴 할지라도, 파괴력을 줄여볼 수는 없을까? 몰락 자체를 막을 수는 없더라도, 혹여 조금이라도 지연시키거나 시간을 벌어볼 수는 없을까? 남들보다 ‘먼저’ 감지한 자에게는 할 일이 너무나 많다. 다 소용없는 일이라고 해도 그는 마지막의 마지막이 오기 전까지 뭐든 해보는 도리 밖에 없으리라.

 

사진출처=pixabay.com

성서 속의 수많은 신앙의 선조들이 그러했다. 그 아비들에게 말씀이 먼저 찾아온 순간이라는 것은, 세상의 눈으로는 전혀 축복이나 은총이 아닌 저주에 가까웠다. 세상은 그의 말을 믿어주기는커녕 비웃고 조롱했다. 자신에게는 모든 것이 느껴지지만, 제대로 설명할 수도 없다. 무고하고 떳떳한 아비라면, 끝까지 살아서 진실을 전해야 한다.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 최우선적인 의무다. 죽어서도 증언해야 할 숙명까지 짊어져야 한다. 누명을 쓴 채 살아남는 일이 설령 죽기보다 더 고통스럽다 해도 말이다.

그러나 세상의 아비들은 대개 약간씩의 잘못은 저지르기 마련이다. 사소한 실수는 일상다반사다. 문제는 가벼이 여긴 잘못이나 실수가 치명적인 결과로 돌아왔을 때다. 도저히 어찌 해 볼 수 없는 상황 앞에서도, 몰락을 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끝의 끝까지를 지켜보는 것, 자기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 누군가는 그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럴 때 자손이 살아갈 세상의 물길을 새로이 트기 위해 스스로를 처벌하는 아비들이 있다. 아무리 고심해 봐도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 탓이오’라는 참회 밖에는 후손에게 보여줄 것이 없을 경우다. 그 처절한 반성이라도 딛고, 잘못 난 물길을 돌리라는 뜻이다.

이런 경우에야말로 객관화가 중요하다. 생사를 가를 단 하나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사라진 빈 터를 응시할 수 있고, 거기서 싹을 틔워 올라올 것이 무엇인지를 예감한 자의 행동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씨앗을 심어본 자만이, 스스로를 처벌할 정도의 단호함도 갖추게 되는 것은 아닐까.

올 가을에 개봉한 두 편의 영화를 본 후, 오래도록 여운이 남아 두고두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 영화 <남한산성>(감독 황동혁)과 <침묵>(감독 정지우)이다. 처음엔 이 두 영화의 공통분모를 감지하지 못했다. 얼핏 생각하면 전혀 닮은 점이 없는 영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 세계가 몰락하는 것이 확연해졌을 때, 그 어떤 방법으로도 지금껏 살아온 가치와 방식을 고수할 수 없을 때, 아비 된 자가 내리는 결단이 이전의 영화들과는 다르다. 원작소설이 있거나 원작 영화가 따로 있는 작품을 ‘각색’하면서 인물의 내면에 집중한 결과, 원작과도 다른 결말로 치닫는다. 굉장히 의미 있는 변화라고 본다. 한 인물의 내면의 흐름을 철저히 따라간 작품만이 보여줄 수 있는 심연이기 때문이다. 아비의 어리석은 소원 덕에 심청이 훗날 왕비가 되는 영광을 누렸다 해도, 딸을 인당수에 바친 자신의 죄를 용서하지 않고 스스로를 처벌하는 심봉사의 각성. 굳이 비유하자면 그런 느낌이었다.

남한산성 - 민들레꽃은 언제 피는가

소설은 실록(實錄)이 아니고, 영화는 원작소설과 별개의 새로운 작품이다. 영화 <남한산성>은 이 당연한 사실을 묵직하게 확인시킨다. 그런데 (말로는) 지당해 보이는 이 매체 간 차이와 고유성은, 실로 구현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원작의 성공이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든 반감시키든 모두 영화가 감당해야 할 몫이며 업보다. 어지간해서는 (소설보다) 재미있었다는 평을 듣기 어려운 것도 제작진을 힘들게 하는 점이다. 애초부터 ‘다른 길’에 대한 뚜렷한 소신과 구상 없이는 수행하기 어려운 작업이다.

영화 <남한산성>은 사료-소설-영화의 삼각 꼭지점을 자유로이 오가면서도 영상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려던 이야기’를 유려하게 펼쳐놓았다. 이 소설 특유의 마치 성곽을 닮은 듯한 문어체마저 ‘입체’로 옮겨놓았으되 전달력도 살린 영화의 화법은 인상적이다. 배우들의 연기는 더할 나위 없었다. ‘말(言)의 영화’였기에 말이 칼보다 무섭고 치열했다. 국운이 기울다 못해 혀끝이 칼끝보다 더 엄중했던 백척간두의 47일간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무엇보다, 현재를 살아가는 관객들에게 ‘지금의 이야기’로 돌아보게 만든다. 역사에도, 원작에도 매몰되지 않았다. 다만, 인물이 남았다.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일인 삼전도의 굴욕을 소설로 다룰 때, 작가 김훈은 아무도 읽지 않을 것이라 여기며 아예 기대를 버리고 썼다고 한다. 이 쓰라린 이야기를 덤덤하게 풀어나가기 위해 문장은 칼끝처럼 다듬되 마음은 비워야 했으리라. 황동혁 감독은 문장수련의 한계치까지 밀어붙인 듯한 원작소설을 철저히 해독한 뒤, 완전히 해체하고 재구성했다. 각본상 받아야 할 영화라는 입소문대로, 각본이야말로 영화의 성패를 가르는 열쇠이자 설계도임을 입증한 셈이다.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를 탐독했을 때 같은 느낌도 준다. 독한 혀들에 휘감겨 매혹당한 ‘문학적’ 감동 말이다. 실존인물에 대해서는 ‘왜곡’이 어느 정도 있었을지라도, 작품 속 인물들은 처절한 고뇌를 대사로 녹여내며 심리전의 진수를 펼친다.

척화파도 주화파도 짚단처럼 주저앉은 허물어진 성을 지킨 것은 민초들의 평범하고 위대한 생명력이었다. 영화 <남한산성>은 그 끈질긴 힘을 믿고 의지한다. 그러나 나라의 운명은 이미 기울었고 민심은 흩어졌다. 화친을 반대한 김상헌(김윤석 분) 대감이 그토록 간절히 염원한 조선의 마지막 기회인 ‘대보름 검단산 봉화’는 끝내 켜지지 않았다. 무너진 폐허 속에서, 그는 스스로를 처벌하는 마지막 의식을 엄숙히 치른다. “살아야만 걸을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이 오기 위해서는, 낡은 것들이 먼저 치워져야 했다. 스스로의 말과 일생에 책임을 진 것이다. 이 결말이 영화의 전체 의미를 바꿔 놓았다.

침묵 - 자신만의 진실을 본다는 것

정지우 감독의 <침묵>은 여운이 긴 영화다. 다 보고나서야 관객은 임태산이라는 주인공을 뒤집어 보고 다시 따져본 뒤 그의 깊은 침묵까지도 헤아리게 된다. 웬만한 영화에서 인물을 이해하는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원래 자수성가한 재벌인 임태산은 대단히 오만했다. “돈 앞에서 왜 오기를 부려?” 그러면서 세상 모든 이를 돈으로 수족처럼 부릴 수 있다고 믿었다. 최민식이 연기한 그 남자는, 과연 돈이 많다. 부와 명예, 권력과 사랑까지 모든 것을 손에 쥔 인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약혼녀인 유명 가수 유나(이하늬 분)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유력 용의자로 하나뿐인 딸 미라(이수경 분)가 지목된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그는 미라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도 덮을 수 없는 쓰라리고 허무한 ‘진실’과 맞닥뜨리게 된다. 영화 <침묵>은 중국영화 <침묵의 목격자>(2013)가 원작이지만, 방향과 축을 새롭게 정해 인물의 내면 중심으로 펼쳐놓았다. 스릴러와 법정 영화의 장르적 특성을 활용하되, 결국 모든 요소는 인간적 고뇌를 증폭시키는 쪽으로 수렴된다.

영화 시작과 동시에 임태산은, ‘돈’을 제외한 모든 것을 잃어간다. 남은 것은 돈뿐이다. 그 돈으로 그는 각각 다른 직업의 ‘신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사거나 자극해 자기가 만든 판에 끌어들인다. 전부터 임태산 검거에 열 올린 검사 동성식(박해준 분)이나, 미라의 결백을 믿어 의심치 않는 변호사 최희정(박신혜 분), 충직한 비서 정승길(조한철 분), 유나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극성팬 김동명(류준열 분). 임태산은 관객들에게도 중대한 임무를 짐 지운다. 관람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가 모든 걸 잃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목격자’가 되게 하는 일이다.

임태산은 맹목적이다 못해 완전히 미친 것처럼 보인다. 말도 안 되는 일을, 진두지휘하여 하나의 결과물로 (버젓이)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혼자 다 뒤집어쓴다. 줄거리 상으로는, 여기가 ‘반전’이다. 그러나 실상 이것은 그저 임태산의 뼈아픈 참회다.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지 못한 스스로를 처벌한 것이다. 임태산은 아무에게도 동의나 이해를 구하지 않는다. 그저 이렇게나마 함으로써 견딜 수 없는 죄책감과 슬픔을 감당하려 한다. 쓸쓸한 불가항력과 스스로 앞당긴 파국. 결국 남는 것은, 인생이란 때로 ‘침묵’으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순간들과의 분투라는 깨달음이다. 이 영화가 숱한 위장술을 뚫고 관객에게 기어이 전하고자 한 것도 한 인간의 오롯한 진심이었을 것이다.

이 글을 쓰느라 고심하는 동안, 문득 미사통상문 한 구절이 귀에 들어왔다. “스스로 원하신 수난이 다가오자 그리스도께서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너무 많이 들어서 오히려 거의 감흥이 없는, 누구나 외울 법한 이 구절이 갑자기 전혀 새롭게 다가왔다. 그 모든 수난을 스스로 원하고, 다가오는 것들을 준비하고 맞이하신 이. 그 분이 ‘다시’ 이 세상에 오시어 우리와 함께 살려고 하신다. 마음속에 작은 촛불을 다시 켜고 싶은 요즘이다.
 

김원 로사
문화평론가. 극예술을 통한 세상 읽기가 세상 잇기로 이어지기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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