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과 변혁적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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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과 변혁적 행동
  • 도날드 버커트
  • 승인 2016.05.08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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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과 활동의 관계-3

현대의 예언적 신학들은 교회의 가르침과 사회적 관심을 성찰하고 발전시키는데 영향을 미쳐왔다. 그들은 우리들의 공동체적이고 예언적이며 관상적인 사명을 새롭게 정리하고 표현하도록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다. 보다 의미 있는 미래를 창조하기 위하여 우리는 전통과 받은 유산 에만 충실한 채로 머물러서는 안된다. 교회의 예언신학과 역사의 해방운동을 통하여 말씀하고 있는 성령의 도전에 응답하고 대화하는 방향으로 그 유산을 정리하고 표현해야 한다.

이 예언적 신학이론과 해방운동은 미래를 발견하기 위하여 과거를 현재에 연관시키라고 요구할 뿐만 아니라, 과거의 위험스럽고 저항적인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도록 도와준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와 세군도 갈릴레아 등 해방신학자들은 최근 저서에서 오늘날 아빌라의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상기하고 있다. 이것은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도전들에 연결시키는데 있어 두 가지 요소 즉, 예언직과 관상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관상과 세상에 대한 예언적 직무는 상호 침투하며, 우리의 투신을 엇나가지 않도록 돕는다. ⓒ한상봉

예언직과 관상의 갈등

관상과 예언직분 모두가 우리의 유산임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가지를 서로 손상시키지 않고 어떻게 연결시키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문제는 이 둘 사이에 어떤 갈등이 있으리라고 미리 선입견을 가지는 데 있다. 즉 한 가지를 강조하면 할수록 다른 한 가지는 덜 중요해진다는 선입견이다.

전통적인 영성은 해방신학자들로부터 개인적이며 추상적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개인적이라는 의미는 하느님과의 개별적인 관계를 중심으로 여긴다는 뜻이며 사회적, 경제, 정치, 생태적인 현실은 주변적인 것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추상적 혹은 영적이라는 의미는 영혼을 중심으로 여기며 육체, 역사의 변천, 세상의 변혁 등은 주변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전통적 영성에서는 하느님을 역사와 세계 밖에서 찾기 위하여 역사와 세계로부터 떠나야 했다. 그러나 세상에서 능동적인 삶과의 타협 형태도 있어야 했다. 따라서 관상생활은 활동을 위한 동기를 주고 활동을 지탱해 주는 원천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그 영향력은 관상이 활동에 영향을 주는 일방통행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또한 전통적 영성의 관점에서 관상이란 성서에 근거하지 않는 형이상학적인 진리와 실재를 안다는 이론에 기초를 두고 있다. 관상에서는 진리와 실재가 고정적이고 이미 정립된 것이며 따라서 경험적인 인식으로부터 독립된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진리와 실재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리는 지성과 사물의 정합이다.

헤겔, 즉 현상학파와 특히 마르크스는 이러한 관점에 도전을 제기하였다. 그들은 실재를 보다 역동적이고 역사적인 차원에서 이해한다. 즉 실재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며 계속 발전되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르크스는 인간들이 변혁적 행동을 통하여 실재와 역사를 새롭게 창조해나가는 참 요원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인간은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 관상과 행동을 분명하게 구별지을 수 없다고 하였다. 안다는 것 자체가 인간의 행동이나 관상 이전의 어떤 것에 뿌리박은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철학자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세계를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 관상하는 예언자

해방신학자들은 예언적 관상의 영성을 형성하기 위하여 두 가지 중요한 관점을 준비하였다. 변혁적 행동이란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 오늘날 우리들의 세계에 하느님의 지배가 더욱 더 실재하도록 하는 것이다. 변혁적 행동은 “평화와 정의에 관한 행동”이다. 변혁적 행동은 그러므로 가난한 이들, 모든 불의의 희생자들과의 연대, 그들에 대한 투신과 우선적인 선택을 먼저 요구한다.

해방신학자들은 현실적이며 역사적인 문제들을 이론으로 풀어나가는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들의 청중은 비신자가 아니라 불의의 희생자들, 비인간화된 사람들이다. 교회에 도전을 제기하고 있는 것은 새로운 인식이 아니라 변혁적인 행동들이다. 예언직분을 수행하기 위하여 교회는 단지 사탄의 지배를 고발할 뿐 아니라 하느님의 지배를 선포해야 한다.

죄악스러운 구조와 체제를 변혁시키는 것은 말로서 뿐이 아니며 개별적인 행동을 초월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정의와 하느님의 다스림을 선포하는 행동은 관상이 일어나고 유래되는 현장이다. 역사적인 투신 속에서, 불의의 희생자들과 연대하며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위한 행동 속에서, 변혁적인 실천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예언적이며 행동적인 영성에서 이웃사랑(특히 가장 작은 자에 대한 사랑), 사회정의와 변혁적 실천에 대한 투신은 단순한 신앙의 의무가 아니다. 관상/하느님과의 만남 자체가 바로 그러한 변혁적 행동 한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해방적이며 변혁적인 행동 속에서 어떻게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는가?

칼 라너는 “하느님은 역사 속에서 만나는 분이며 그 밖에서는 전혀 만날 수 없다.”고 말한다. 교회의 문헌들은 우리가 하느님이 우선적으로 선택하였고 또한 하느님의 현존과 목소리에 특별한 방법으로 열려있는 가난한 이들, 불의의 희생자들 속에서 특별한 방법으로 하느님을 만난다고 선언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답변들은 변혁적 행동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 그 답변들은 과거나 현재의 하느님을 강조하고 있다. 불완전하지만, 언제나 하느님의 나라 혹은 종말론적인 하느님, 우리보다 항상 앞서는 구원자 하느님의 현존을 역사 속에서 느끼게 해주는 것이 바로 변혁적 행동이다. 바로 행동을 통하여 하느님은 역사를 만들고 역사 안으로 들어온다. 행동을 통하여 하느님이 더 하느님답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다스림이 지금 더욱 현존하게 되는 것이다. 단순히 도덕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변혁적인 우리의 행동을 통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변혁적 행동은 종말론적인 하느님에 대한 더 깊은 체험을 가능케 하는 장소이며 방법이 된다. 하느님과의 만남(관상)은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서 이루어진다. 십자가의 성 요한과 신비신학자들은 하느님과의 신비스러운 일치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사랑의 현상이지, 이성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진정한 예언적 신비주의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한 행동에 뿌리박는다.

이러한 신비주의는 결코 관상의 목적 즉 하느님의 현존에 관한 사랑스러운 깨달음을 감소시키지 않는다. 관상은 또한 사회뿐 아니라 그 구조와 체제, 분리적 이념들 속에서 하느님이 부재함을 깨닫는다. 예언자로 하여금 말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하느님의 부재를 깨닫는 것이 바로 관상이다. 이 예언적 행동은 그러나, ‘행동 속에 관상하는’ 예언자를 만드는 하느님의 거룩한 현존에 대한 자각을 먼저 요구한다.

예언적 행동은 선행된 관상적 체험으로부터 흘러나온다. 또한 예언적 행동은 하느님께 대한 더 깊은 자각을 가능하게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다스림에 관한 새로운 체험들이 변혁적 행동을 통하여 계속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언적 행동과 관상 사이에는 항상 변증법적인 관계가 이루어진다.

변혁적 행동이 관상의 장이다

예언직과 전통적 신비주의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것이 맹목적인 사회행동주의를 막아줄 것인가? 구티에레즈는 변혁적 행동의 순수함과 효과성은 먼저 하느님과 맺는 관상적 관계가 이루어지는 데에 있다고 지적한다. 먼저 하느님의 현존을 우리 안에서 체험한 후에야 비로소 역사와 변혁적인 행동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부재를 경험할 수 있다.

우리의 변혁적인 행동 자체가 보다 심화된 관상의 장이 될 수 있다. 변혁적 행동을 통하여 종말론적인 하느님은 우리에게 보다 더욱 하느님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상과 예언직들은 상호작용하고 서로 강화함으로써 “예언적 관상‘이라 부르는 하나의 운동을 창출해낸다. 관상과 예언적 활동이 지속적으로 변증법적인 통합을 해 나갈 때에 우리는 예언자들과 나자렛의 예수처럼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강력한 요원들이 될 수 있다.

예언자 엘리야는 산과 시장에서 일어난 관상과 변혁적 행동이 서로 연결되어 형성된 관상적 영성의 깊은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신약에서 엘리야는 관상적이며 투신적인 예언자로 소개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와 같은 노선의 예언자로 나타나며(마르 11,14), 야고보는 엘리야를 믿음과 기도의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야고 5,17). 모습이 변한 예수와 대화하고 있는 엘리야의 모습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관상적 예언자의 전형으로 우뚝 솟아 있다(마태 17,1-14).


(출전: <영성과 사회적 관계>, 참사람되어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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