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를 이루는 책들, 창세기에서 묵시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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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를 이루는 책들, 창세기에서 묵시록까지
  •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7.12.19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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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부르심-3]
사진출처=pixabay.com

성서의 첫째 부분은 Pentateuch라고 불리는데, 그리스어로 “다섯 권의 책”이라는 뜻이다. 히브리어로 이 부분은 토라, “법”이라고 하는데 오늘날까지 모든 유대 회당 내에 이를 모셔두고 있다. 이 다섯 권의 책이 확실히 가장 오래 된 성서의 책들은 아니지만 모든 것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창세기>는, 예를 들면, 성서의 첫번째 책이지만 맨 처음 쓰여진 것은 아니다. 현대의 시각에서 보면 그건 '시작으로의 회귀'다. 창세기는 실제로 기원전 500년 정도에 구성되었다.

성서의 두 번째 책은 <탈출기>로 여러 면에서 이 책이 성서의 진짜 시작이다. 탈출기는 히브리인들의 에집트 탈출에 관한 이야기로, 이 모험담은 아마도 성서에서 가장 오래 구전되어 온 이야기일 것이다.

<레위기>와 <민수기>는 역사, 법, 족보를 다루고 있다. 우린 종종 이런 것들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은 하느님이 그들의 역사 안에서 활동하셨고 역사를 바꾸신 것을 보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역사를 중요하게 여겼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법을 자신들이 한 민족을 이루기 위해 주신 하느님의 신성한 명령으로 보게 되었다. 물론 오늘날 우리는 이 광대한 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지는 않지만 이 법은 하느님께로부터 영감을 받아 쓰여진 것으로 성서에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얼마나 다양한 수준에서 그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 의미를 알게 되는지 보여준다.

<신명기>는 오경 중 다섯번째 책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히브리인들을 한민족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신명기를 읽을 때 당신은 히브리적인 정신, 유대인의 영성이 당신에게 말하는 것을 허락해야 한다.

다섯 권의 책들 다음으로는 “역사서들”이 나오는데 당신이 이 책들이 말하는 역사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역사의 개념과 전혀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 책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 삶 속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경험을 기록한 것으로, 심사숙고 끝에 몇 백년이 지난 다음에 쓰여졌다.

사람들은 종교적인 서사시를 쓸 때와 마찬가지로 이 글들을 어느 정도 다듬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역사에 관해 거짓을 기록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럴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자신들을 이중적이며 야훼에 불성실한 사람들로 낮추어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글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정확하게 기록하기 보다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는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며, 그 하느님은 바로 자신들을 노예 생활로부터 구해 주시고 새로운 땅으로 인도한 분이시다.

<여호수아>서와 <판관기>에서는 약속된 땅을 정복하기 위해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어떤 방법으로 도우셨는가를 기록하고 있다. 이 책에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내용들, 예컨대, 가나안 사람들에 대한 이스라엘인들의 증오 같은 것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그 당시 이스라엘인들이 도덕적으로 초기 발달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과 적어도 그 수준에서 그들이 자신들에게 들려온 말씀에 응답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사무엘>서, <열왕기>, <역대기>, <에즈라>, <느헤미야>와 <마카베오>서에는 종교적인 영웅들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그들이 강조한 사실은: 하느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그들을 위해서 끊임없이 일하신다; 하느님은 그들의 경험 안에 계시고 그들의 삶에 영향을 주신다는 사실이다.

룻, 토비트, 유딧과 에스델서에서도 유다의 영웅들에 관한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들은 무슨 이유로 숭상 받고 본받아야 할 표본으로 여겨지게 되었을까? 그것은 삶 속에서 경험한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충성심과 성실성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신의를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 충실함은 아주 중요한 덕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성실한 남녀를 존경했고 그들을 본받으려고 했다.

그 다음으로 “지혜서”들이 있다. 여기에는 <욥기>, <시편>, <잠언>서, <지혜>서, 그리고 다른 몇가지가 포함된다.

<욥기>는 영웅 욥과 악한 사탄을 주인공으로 한 연극과 같이 쓰여졌다. 욥기는 주인공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조금씩 조금씩 하느님 신비에 끌려 들어가는 것을 극적으로 그린 짧은 이야기다.

다음으로는 히브리인들의 150여개에 달하는 종교적 노래인 <시편>이 있다. 이 아름다운 기도문들은 현대 그리도교인들의 기도에도 적합한 것들이다.

<집회>서는 기분이 우울할 때는 읽을 만한 책이 못된다. 이 책은 다소 비관적이지만 -어떤 대목은 냉소적이기까지 한- 이것을 통해 우리는 삶의 부정적 순간에 하느님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절대적이라고 믿는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고 있다.

어떤 이들은 <아가>서를 읽고 얼굴을 붉힌다. 그들은 어떻게 이런 책이 성서에 포함되었는지 도통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아가>서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오늘날 얼마나 얌전떨며 위선적으로 변했는지를 증명해 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과 우리 사람과의 관계를 남자와 여자 사이의 성적인 열정에 비교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위선적인 면이 없었다; 그들은 이승의 사람들이었고, 현실적이면서, 살과 피로 만들어진 사람이었다.

잠언과 코헬렛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기울였던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현명하고 인간적인 결정들을 내리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이 책은 우리에게 하느님과 세상에 대해 아주 실제적이고 상식적인 접근 방식을 알려준다. 하지만 이 책이 보여주려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 지혜를 훨씬 뛰어넘어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지혜서의 실제적인 통찰에 만족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전달하고 있는 지식은 종교적인 이해라는 측면의 중요한 시작일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지혜가 빛나고 있음을 감지 할 수 있고 이 책들이 하느님께로부터 영감을 받은 말씀임을 깨닫게 된다.

구약성서의 마지막 중요 부분에는 “예언서”들이 있다: 이사야, 예레미야, 애가, 바룩, 에제키엘,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디야, 요나, 미가, 나훔, 하바꾹, 스바니야, 하깨, 즈가리야와 말라기. 이 예언자들은 각각 이스라엘인들에게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로 돌아오라는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특정한 시기에 보내졌다. 이 예언서 중엔 실제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예언자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인들은 이 사람들을 통해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주님께 귀를 기울였다. 구약에서 요나, 다니엘이 그런 예언자였다.

 

사진출처=pixabay.com

신약은 27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 기원후 100년경에 쓰여졌다. 전체적으로 신약은 사람이 되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 분을 통해 이스라엘과 전 인류에게 하신 하느님의 새로운 ‘말씀’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물론 4대 복음서에 가장 익숙하다. 이 복음서들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식의 전기(평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네 가지 다른 경험들을 네 가지 고유한 방식으로 기술한 것이다. 루가가 예수에 대해 다르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해서 마태오가 그를 이단이라고 몰아세우지 않았다는 점, 요한이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다르게 했다고 해서 마르코가 그를 정통이 아니라고 비난하지 않았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오히려 각각의 저자들은 예수라는 신비에 대해 말하고 있고, 그리스도의 얼굴이라는 모자이크의 일부분을 각각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들 네명의 복음사가들은 그들로 하여금 예수에 관해 이 글들을 쓰게 만든 개인적인 경험과 비슷하게 우리로 하여금 말씀이신 예수를 인격적으로 경험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복음사가들은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복음을 우리 경험 안에서 육화시키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우리 각자의 복음을 써 보라고 초대하고 있다.

사도행전은 루가 복음의 후편과도 같다. 즉, 인간이 하느님을 그들의 삶과 공동체에 받아들였을 때, 하느님이 그 속에서 하실 수 있는 일들에 대한 복음, 즉, 성령의 복음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사도행전은 부활하신 예수의 능력을 경험한 제자들에 관해 얘기하고 있으며,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발전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다음으로 로마인, 코린토인, 갈라디아인, 에페소인, 필리피인, 골로사이인, 테살로니카인과 그 외 다른 공동체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교의 개별적인 사람들에게 쓴 사도 바오로의 서간서가 있다.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성령 안에서 그 분과 함께 걸었다. 바오로와 우리의 경험은 이런 측면에서 비슷하기 때문에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 종종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와 닿는다. 사도 바오로의 삶은 예수에 의해 바뀌었고 우리는 그 바뀌는 과정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마침내 그는 더 이상 그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그 안에서 산다고 말할 수 있다(갈라디아 2,20).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저자가 누군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의 또 다른 면을 이 편지가 어떻게 보여 주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야고보서, 베드로의 첫째, 둘째 편지, 요한의 세 편지, 유다의 편지들은 아주 짧지만 이들 편지들은 각자 고유한 방식으로 거대한 모자이크의 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 모자이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여 준다.

성서는 묵시록으로 끝을 맺는다. 이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기는 하지만 이 부분에 이르러 성서는 드디어 하나로 귀결되게 된다. 당신은 묵시록을 다시 찾은 낙원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낙원에 대해 처음 설명한 것이 창세기이듯 끝에 가서 우리는 다시 낙원으로 돌아가게 된다. 두 낙원 사이에 존재했던 기간 동안 인간은 신의 도시를 세우려 했고, 이스라엘 왕국을 만들려고도 했으며, 진정한 예루살렘을 건설하려고도 했다. 그러나 수천년의 역사가 흐른 뒤, 피와 고통이 흐른 뒤에, 어리석음, 무의미함, 기다림, 희망 뒤에, 주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예루살렘을 선물로 주신다. 그 분은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신다.

묵시록에서 말하는 비전은 바로 이것이다: 결국 모든 것이 선물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좋은 것은 우리가 거저 받은 것이다.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선물이기 때문에 구속적인 힘을 갖고 있다.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 사이의 관계 안에서 우리는 자유로워 질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당신이 성서를 읽을 때 그것이 당신에게 주어진 선물로 여기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성서를 읽는 동안 하느님이 당신에게 자비를 베푸시도록 허락해야 한다. 그 분이 당신을 위한 선물임을 받아들여라. 그 분 은총의 경험 속에서 당신이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은총이 모든 것이다. 은총은 어디에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창세기로부터 요한 묵시록까지-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말씀이다: 즉, 하느님은 선물이고 우리는 선물을 받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

이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게 되면 아무것도 다시는 예전과 똑같을 수가 없게 된다.

 

[원출처]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구약>,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1987
[번역본 출처] <참사람되어>, 2001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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