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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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
  •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8.01.07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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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 믿음의 여정-3

당신이 <탈출기> 전문을 읽다 보면 열 개보다는 훨씬 많은 계명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모세의 십계명은 이들 수많은 계명들을 단순히 종합해 놓은 것이다; 이들 열 가지의 계명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해 다시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혹은 주님께 대한 신의와 이웃에 대한 신의이다.

앞 부분의 세 가지 계명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사실상, 자신들이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을 신뢰할 것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나머지 일곱 개의 계명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서로 서로를 신뢰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분과 사랑에 빠지지 않는 한...

맨 첫번째 계명은 어떤 의미에서 열 가지의 계명 모두를 요약한다고 할 수 있다: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나 이외에는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성서적인 측면에서 실제로 유일하게 진짜 죄는 우상 숭배이다. 우상 숭배는 하느님이 아닌 것을 하느님으로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서에서 말하는 죄란 존재하는 것(what is)에 대한 불충실이며 여기서 존재하는 것에 대한 불충실이란 바로 하느님께 대한 불충실인 것이다.

자, 사실이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은 죄, 적어도 성서에서 말하는 의미의 죄는 짓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개별적인 관계에 있어 불충실함은 관계가 성립되기 전에는 일어날 수 없는 것인데, 슬프게도,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과 한 번도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이 자신을 사랑하시는 것을 개인적으로 체험하지 못했고, 그들 자신도 하느님을 사랑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랑하는 그 분과의 관계에 있어 불충실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다른 잘못을 절대로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잘못된 일을 많이 저지르며, 악한 일을 많이 한다. 사람들은 삶과 세상에 많은 악을 불러들인다. 선이 선을 낳듯 악 역시 악을 낳는다. 선행 그 자체가 상이 되듯이 악행은 그 자체로 벌이 된다. 사람들은 자주 악을 행하며, 그들은 살면서 죄 값을 치른다. 그러나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서적 차원의 죄를 짓는다고는 생각치 않는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주님과의 개인적인(인격적인) 관계로 부르심을 받고 있다. 이스라엘이 야훼께 불충실한 것을 예언자들은 '매춘'이라고 표현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한 후에도 그 분께 등을 돌린 이스라엘을 음탕한 여인으로 묘사했다. 하느님과 사랑에 빠지지 않는 한,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없다. 그러나 일단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알게 되면, 죄를 지을수 있게 된다. 개인적인 관계는 새로운 책임을 부여한다. 우리는 신자들에게 비신자들보다는 더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힘은 그분에게서 온다

그 개인적인 관계의 또 다른 측면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라는 셋째 계명에서 드러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주 일곱째 날 쉬라는 명령을 받았다. 모든 것을 멈추어야 했다; 누구도 일을 해서는 안되었다. 하느님은 그들 삶의 진정한 힘이 그 분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으셨던 것이다. 일주일에 하루, 그들이 가진 칠분의 일의 시간 동안 그들은 주님 안에서 쉬어야 했다. 안식일은 그들이 하느님께 의지하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떼어낸 날이었다. 시편에서 보듯이, “이 날은 야훼께서 내리신 날, 다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하라” (시편 118,24).

안식일 휴식을 사용하여 주님은 우리 삶의 진정한 힘이 당신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가르치시려고 하셨다. 그 분은, 사실상, 말씀하시길, “일주일에 단 하루 동안만 목적을 이루는 것을 중단하고, 성과를 거두는 일을 중단하고, 일에 관계된 어떤 것도 하지 말아라. 그 날 하루 동안은 이루고, 구하는 것을 내게 맡겨라.” 셋째 계명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그것이다: 자신의 의지로부터의 탈출. 그것은 일요일에 어떤 일을 해도 된다 안된다의 문제가 아니다. 법률 해석적인 경향이 지난 수세기 동안 성서의 핵심 메시지를 왜곡 시켜 왔다.

공동체를 위한 최소한의 규율

나머지 일곱 개의 계명을 살펴보면 그것들이 모두 개인간의 관계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살고, 그들이 진정으로 한 민족을 이루고 살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규율들이다. 

자녀들은 그들의 부모를 존경하며 순종해야 한다. 결혼한 이들은 간통을 피해야 한다. 누구도 살인이나 도둑질을 일삼아서는 안된다. 모든 사람은 정직해야 하고 진실만을 얘기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억제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모든 이들은 타인과 공동체를 믿어야 한다. 신뢰는 민족성의 바탕이 되고 충실함은 일치의 바탕이 된다.

이 일곱 가지 도덕적 가르침은 수세기 동안 지켜져 내려온 기본적인 윤리 규범을 표현한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러한 윤리적 요구들이 하느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경우, 가슴 깊은 곳에서 들려 오는 더 깊은 말씀을 듣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시간표를 믿어라

하느님께로부터 삶의 규범인 십계명을 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시 사막을 건너기 시작했다. 야훼께서는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과 함께 계셨다. 그 분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약속한 땅으로 이끌고 계셨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아무도 그 곳에 가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주님을 믿어야만 했다. 그것은 불확실성으로의 여정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은 주님의 시간표 역시 믿어야 했다. 기둥이 움직이면 그들도 움직였다. 기둥이 멈추면, 그들도 멈춰 섰고, 하느님이 그들을 인도할 때까지 나아가지 않았다.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만한 좌절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우리 역시 사막에서 벗어나길 원한다. 우리는 늘 그 시간을 단축시키고, 끝내기를 바란다. 그러나 믿음의 순례는 후다닥 해치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도하시는 길로 걸으며 그 분의 속도에 맞추어야 한다.

[원출처]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구약>, 리차드 로어와 죠셉 마르토스, 1987
[번역본 출처] <참사람되어>, 2001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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