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식 교수 "남한과 북한, 왜 이리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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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식 교수 "남한과 북한, 왜 이리 다를까?"
  • 박한식
  • 승인 2017.12.05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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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평화를 위한 국제학술심포지엄] 박한식 교수-한반도의 평화통일: 도전과 기회

오늘날 세계에는 다양한 정치 체제 간에 정당한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상에서 인간이 집단생활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세계질서는 사회 규범과 가치들이 인간관계에서 합당한 질서로 기능했던 부족 공동체 질서와 함께 시작되었다. 이러한 규범과 가치는 문화와 문명들에서 나온 것이다. 종교와 문명 생활에서 전형적으로 발견되는 질서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유다-그리스도교, 불교, 이슬람, 힌두교, 그리고 유교와 같은 서로 다르고 대비되는 문명들은 세계의 다양한 인구 집단들이 설정한 공동체 규범, 가치, 믿음, 그리고 윤리적 지침들 위에 형성된 세계 질서의 근간(根幹)이었다. 이러한 관행들은 중세와 근대 초까지 이어졌다. 중세와 달리 근대는 마키아벨리 이론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영적인 마음보다 군사력과 물리적 힘이 지배했다. 이것이 식민주의가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세계질서는 물리적 지배를 규범으로 하는 군사주의에 의해 형성, 유지되었다. 세계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포함한 큰 규모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두 나라가 이념과 삶의 방식을 달리하는 패권국이 되었다. 미국과 미국의 동맹국들이 제1세계 블록을 형성하였고, 소련도 이에 대응하여 제2세계 블록을 형성하면서 양극적인 세계질서가 구축되었다.

제1세계와 제2세계 틈에 낀 세계정치체제의 나머지 부류들이 제3세계가 되었다. 이 양극적 세계질서가 소위 ‘냉전’체제를 형성했다. 그러나 제3세계는 두 패권국의 먹잇감이 되고 말았다. 두 패권국은 재빨리 대규모 군비경쟁에 뛰어들었다. 그에 따라 수많은 대량살상무기 특히, 핵무기가 축적되었다.

이러한 무기들이 대량 생산되면서 두 패권국에는 치명적인 무기들로 포화상태가 되었다.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남아프리카공화국, 이라크, 리비아 그리고 북한 등 두 패권국들보다 힘이 없는 나라들은 핵보유국이 되고 싶은 불타는 욕망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한반도는 세계 권력구조의 불안정한 지형위에 자리하고 있다.

 

1. 양립 불가능한 두 체제로의 진행

개인과 마찬가지로, 정치 체제도 역사적 맥락의 산물이다. 한국에서 상호 대립적이고 양립 불가능한 체제 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행사한 역사적 맥락들은 다음과 같다.

1.1 일제 식민주의(1910~1945년)

북한이 역사적으로 출발하게 된 계기는 1945년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일본 식민제국이 항복하면서다. 김일성이 젊은 시절 중국에서 유격전을 수행할 당시, 그와 그의 무리들은 일본의 강한 군사력에 압도당했었다. 김일성은 그런 일본제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생긴 두 개의 버섯구름 때문에 갑자기 항복하는 데 놀랐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독립 주권국가의 지위를 얻고 이를 유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핵무기를 획득하는 것이라 결론지었다.

휴전협정 체결과 함께 한국전쟁이 끝나자마자, 김일성은 1950년대 후반 자신의 권력기반을 공고히 했다. 그 후 재빨리 많은 북한 과학자들을 러시아에 파견하고, 러시아 과학자들을 평양으로 불러들여 핵무기 개발을 시작하였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핵폭탄을 만들 수 있는 북한 토종 핵과학과 핵기술을 개발할 수 있었다.

1.2 민족 분단(1948년)

한국은 하나의 민족, 하나의 언어뿐 아니라 수천 년 역사와 문화유산을 공유한 동질성이 높은 나라였다. 하지만 38선을 경계로 이뤄진 분단과 곧 바로 이어진 수십 년간의 미소 두 강대국의 ‘이념과 패권’ 갈등으로 두 개의 상반된 한국 체제가 형성되었다. 이에 대하여는 뒤에서 더 논의할 것이다. 민족 분단은 주로 국제 세력정치(power politics)의 역학이 변화된 데서 비롯되었다.

 

1.3 한국전쟁 (‘1950~1953’과 그 이후에서 현재까지)

한국전쟁을 단순히 한국 사람들끼리, 즉 서로 다른 파벌이 일으킨 내전이라 보아선 안 된다. 54,000명 이상이 전사한 미국을 포함, 남한 쪽으로 참전한 열다섯 개 나라 군인들과 남북 양쪽의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중 북한, 특히 평양은 미국의 공중 폭격으로 철저히 파괴되었다. 평양은 폭격으로 거의 평지가 되었고 거의 전부에 해당하는 약 2백만 명의 평양 주민들이 사라져 버렸다! 이처럼 철저한 파괴를 경험하면서 북한 지도자들은 벙커버스터로도 뚫을 수 없는 지하 벙커를 만들어야겠다는 욕구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평양에 지하철을 놓을 때, 그 밖의 다른 지역에 깊이가 평균 지하 100미터에 달하는 대피소를 만듦으로써 이를 실현하였다.

한국전쟁으로 남북을 합쳐 직계 가족을 잃은 이산가족이 수천만 명에 가까웠다. 1950년 6월에 발발한 이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휴전협정 자체가 전쟁터에서의 ‘정전(cease fire)’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극도로 좌절했다. 한국 전쟁은 군사적으로 자부심이 강한 그들이 수치스럽게 정전을 해야 하는 첫 번째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휴전협정 체제는 냉전기 수십 년간 이어져왔고,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1.4 냉전과 지구적 양극 체제의 영향

냉전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양극체제가 형성되기 전에는 국제정치 사전에서 찾아볼 수 없는 개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이었던 미국과 소련은 서로 대립되는 삶의 방식과 가치와 함께 이념적으로 분리되고 서로 합치할 수 없는 체제를 발전시켰다. 세계 양극 체제의 극단에 서서 제로섬 게임인 세계 세력구조 안에서 상대방을 굴복시키고 싶은 강박적 욕구에 사로잡혀 있었다.

1) 이념 양극화(Ideological Polarization)

냉전 정치학을 자본주의/민주주의와 사회주의/­공산주의라는 두 대립되는 이념 체계로 표현할 수 있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을 종결하고,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내기 위해 핵폭탄을 사용한 미국은 민주주의 블록에서 지도자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또 다른 주요 승전국이었던 소련은 중국과 동독을 포함한 동유럽 국가들 같은 사회주의 국가들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냉전 체제에서 이 두 이데올로기 블록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패권국가의 통제와 영향아래 있게 되었다. 한반도에 부과된 두 개의 신념체계, 가치, 그리고 규범들로 인해 매우 대조적인 삶의 방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 이 두 체제는 대립하는 냉전 체제 두 블록의 첨병이 되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은 그 결과 양립할 수 없는 극단으로 치닫게 되었다.

 

2) 안보 강박(Security Obsession)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 사이에 또 다른 큰 전쟁을 피할 수 있게 한 핵심 사안이 ‘상호확증파괴’(Mutually Assured Destruction)라는 새로운 개념이었다. 이 개념은 양측이 확보한 무기가 상당량에 이를 때, 상대방의 보복 공격으로 인한 파괴에 대한 두려움이 때문에 선제공격을 못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상호파괴에 대한 두려움으로 모든 행위자는 군비확장 경쟁을 위해 자원과 에너지를 축적한다. 양측이 보유한 핵무기를 포함, 파괴적인 무기들의 양이 비상식적일 정도로 많다. 수십 년간 이어진 냉전 동안 미국과 소련이 축적한 핵무기 숫자는 몇 백이 아니라 수만이었다. 두 블록에 속한 나라들은 국가안보와 생존을 각각 미국과 소련에 완전히 의지함으로써 사실상 두 패권국가의 식민지가 되었다.

한국전쟁과 1953년 휴전협정 이후, 남한은 문화 종교 영역에서 경제, 사회 영역, 정치, 안보 활동 영역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전적으로 미국에 의지하였고 또 영향을 받았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한국이 단지 미국의 복사판에 불과한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는다.

반면 북한은 소련의 모든 것을 모방할 수도 없었고, 그리 하지도 않았다. 정치 이념과 문화적 가치의 관점에서 매우 동질성이 높았던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블록과 달리, 공산주의 블록은 패권국 지위를 놓고 소련과 경쟁 관계에 있던 주요 세력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부상(浮上)에 대처해야 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중반까지 제2세계(the Second World)에서는 소련과 중국의 영토 분쟁과 긴장 상태가 첨예해졌다. 북한의 김일성은 강한 공산주의 이웃들 가운데 어느 한편에 설 수 없었다. 대신 김일성은 ‘주체’(Self­Reliance, 自助)라는 중립 노선을 추구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두 개의 한국 사이에 존재하는 ‘대립적인 생활 패턴’을 파악할 수 있다.

3) 문화와 경제의 군사화(Militarization of Culture and Economy)

남한과 북한 두 체제는 군사주의로 더 첨예하게 대립하게 된다. 남북 양쪽은 사회화와 교육영역에서 항상 국민에게 강력한 군사 문화를 주입시키려 골몰했다. 양 체제 모두 군수산업이 경제 체제의 주축이었다. 북한이 군수산업을 발전시켜 외자(外資) 유치의 주요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반면 남한은 미국의 군사력에 상당 부분 의지했다.

1976년에 시작된 미국과 한국의 합동훈련은 매년 신무기 개발을 위해 천문학적 재원을 투자해왔다. 최근 한국은 미국산 무기 10대 수입국에 들었다. 남한의 역대 모든 정부는 북한에 대한 방어를 명분으로 이러한 군사력 증강을 정당화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4) 군산복합체(Military Industrial Complex, MIC)

1961년 미국 의회에서 열린 대통령 퇴임식에서 드와잇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가 연설 중에 경고한 이후 군사적 야망과 산업적 이해관계의 결탁은 서로 나뉠 수 없을 뿐 아니라 광범위하게 확대되어 왔다. 미국 항공 산업에서 볼 수 있듯이, 폭격기 같은 정밀한 항공기들은 대부분 방위산업체들이 생산한다. 납세자들이 내는 세금으로 조성된 공공자금이 무기 구입에 사용되고, 자본주의적 경쟁을 회피하는(독점 계약이라는 의미) 이 결탁은 부패와 부정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발전된 군산복합체가 안보에 집착하는 저개발국가와 접촉할 때 이 나라들은 군산복합체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남한도 미국의 영향을 받아 나름의 군산복합체를 발전시켰는데, 이는 부정과 부패의 온상이었다. 남한은 항상 북한을 핑계로 이러한 무기 구입을 정당화하였다. 미국과 한국의 합동 군사 훈련도 두 나라 정부와 군산복합체의 유착 관계를 보여준다. 이러한 유칙관계로 말미암아 군사훈련 규모를 줄이거나 폐지하는 일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5) 남북 간 정당성 전쟁(Inter-Korea Legitimacy War)

한반도에 두 국가가 들어선 이래, 남북은 각자 한반도 전체를 자국 관할권으로 상정하였고, 이는 상호 적대적이고 양립할 수 없는 환경을 조성하였다. 둘은 각자 자신이 유일한 합법 국가라 주장한다. 정책과 정치적 수단을 정당화할 때도 상대 체제를 부정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 근저에는 두 체제가 공존할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즉, 둘 중 하나는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두 나라 모두 상대 체제의 전복을 전제하는 국가안보를 추구한다. 이러한 제로섬 경쟁에서 양측은 최고도로 정밀한 무기들을 축적해왔다. 북한은 결국 핵보유국이 되었고, 남한은 미국과의 협력을 통해 가공할만한 군사 국가가 되었다.

 

1.5 상호 적대적이고 양립 불가능한 체제로의 진화
(The Evolution of Mutually Hostile Incompatible Systems)

남한과 북한이 서로 분리된 채 지낸 지난 70년 동안 두 체제는 물과 기름처럼 다르고 상반된 성격과 삶의 방식을 형성하였다. 다음에서 살펴보려는 것처럼 상호 양립 불가능한 속성들 탓에 섞이기 어렵다.

1) 집단주의 대(對) 개인주의(Collectivism vs. Individualism)

북한은 유교 전통의 연장에서 주민들이 집단주의적 가치를 익혀 온 고도의 집단주의 체제이다. 물론 사회주의적 공산주의 자체가 본질적으로 집단주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북한은 내부의 역경과 외부의 적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교육과 사회화의 원리로 협력과 공유라는 집단주의 가치를 발전시켜왔다.

반면 자본주의 체제인 남한은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과 같은 이념적 가치를 기반으로 하는 개인주의를 발전시켜왔다. 북한에서는 개인에 의한, 그리고 개인을 위한 경쟁이 존재하는 남한과 달리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고 증진시킬 때만 경쟁을 수용했다.

2) 민족주의 대 세계주의(Nationalism vs. Globalism)

북한에서는 모든 정책이 국가의 공동이익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개인의 삶도 그것이 얼마나 국가를 위해 공헌하느냐를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 여기엔 나름 이해할만한 이유들이 있다. 북한은 자신의 체제 안에 갇혀 살았고, 이로 인해 체제의 민족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상태를 유지하기 쉬웠다. 북한은 김일성이 태어난 해인 1912년을 기원(紀元)으로 하는 자체 달력을 만들었다. 이 달력이 ‘주체 달력’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북한은 신정(神政)의 한 형태다.

3) 평등 대 자유(Equality vs. Liberty)

자유 민주주의는 자유라는 규범적 가치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반면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평등을 지키고 증진시키도록 고안되었다. 북한의 중심 가치는 분배의 평등이고, 남한은 개인의 자유다. 분배할 자원들이 제한적일 경우, 평등한 분배는 더 절실해지기 마련이다. 북한의 경제 자원은 매우 제한적이나 평등 수준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높다. 따라서 평등이라는 사회정의의 수준이 일반 주민들에게 놀라우리만큼 높다. 북한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가난한 반면, 남한 사람들은 풍요롭지만 평등과 사회정의를 박탈당한 상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대립 때문에 자력갱생을 추구하게 되었다. ‘주체’는 쉽게 말해 신학적 관점이 들어간 자기 완결적인 철학적 세계관과 유사한 사상 체계다. 전체적으로 주체사상은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관념 체계다. 주체교육은 그리 간단치 않다. 이 교리의 발전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사유 과정이 필요하다. 반면, 남한에서는 경제적 실용주의가 전 사회에 팽배해 있다.

4) 전통 대 근대(Traditionalism vs. Modernism)

북한은 체제의 정통성을 민족주의와 김일성의 독립 운동에서 찾고 있기에, 체제가 위대하다는 주장의 근거를 과거 역사와 그들이 선택적으로 추출한 유산들에서 찾아왔다. 북한은 고구려 왕조(B.C.37~A.D.668)와 고려 왕조(935~1392) 둘 다를 중국 대륙까지 영토를 확장한 통일되고 강력한 독립 국가로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들의 국력은 역내(域內)에서 상당하였고, 문화와 과학의 영향력도 세계적 수준이었다. 평양 역사박물관은 역사 유물들을 보관하고 전시함으로써 선조들의 과학적이고 예술적인 성과가 대단했으며 그들이 이웃과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우수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북한에는 조상들이 “흰 쌀밥을 먹고, 기와집에 살며,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삶”을 꿈꿨던 과거 시절을 언급하며, “우리는 조상들이 갖기 바라는 모든 것을 가진 지상 천국에 살고 있다”는 표어를 내걸었다. 또한 북한 사람들은 김일성이 단독으로 수행한 항일 게릴라 운동 덕택에 한국이 일본 식민주의의 굴레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주장을 반복해서 떠올린다.

반면, 남한은 그들의 민족주의 유산 또는 일본 식민주의로부터 독립할 때 이승만이 한 공헌에 대해 자랑하지 않는다. 하지만 박정희(1961~1979)가 경제성장과 현대화라는 형식적인 토대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미국과 일본식의 경제와 사회 근대화를 통해 남한은 발전 모델의 세계적 전형을 창출하였다.

5) 가부장적 사회주의 대 촛불 민주주의

오랜 역사 과정을 거쳐 북한은 마침내 가부장적 사회주의라 부를만한 체제를 구축하였다. 이것은 가족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유교적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고, 가족과 가장에 대한 충성을 매우 신성하게 생각하는 체제다. 독특한 점은 국가라는 공동체를 가족의 확장으로 보는 것이다. 북한에게 국가는 정점에 있는 한 명의 아버지와 그 밑에 2,300만 명의 동질적인 구성원들로 구성되는 한 가족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남한이 경험한 정치체제 또한 매우 독특하다. 문재인 대통령 당선은 수백 만 명의 일반시민들이 정치적 부패와 부정을 일으킨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요구한 결과다. 이것은 단순히 위 혹은 아래로부터가 아닌 ‘모든 방면에서 시작된 혁명’이라 볼 수 있다. 대중 운동의 한 형태로 생생하게 민주주의를 느끼게 해준 정의와 평등을 요구하는 목소리였다. 이렇게 두 한국 사이의 분단선을 가로지르는 대조적인 두 정부 형태에 공통점이 거의 없고, 이로 인해 통합도 통일도 되기 어려울 것이다.  

박한식 교수
조지아대학교 명예교수

* 이글은 2017년 12월 2일 참회와 속죄의 성당에서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주관으로 열린 제1회 국제학술심포지엄 발제문입니다. 해당 연구소의 허락을 얻어 전문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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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연 2018-11-24 11:55:21
극우보수인사들이 알면 박한식 교수님 몰매맞을까봐 걱정되요~!!!! 특히 개신교극우목회자들같았으면 빨갱이 종북세력이라고 욕했을듯~!!!!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