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츠우라 주교 "군대가 없는 편이 시민은 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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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우라 주교 "군대가 없는 편이 시민은 안전하다"
  • 미카엘 고로 마츠우라 주교
  • 승인 2018.01.28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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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평화를 위한 국제학술심포지엄] ‘한반도의 평화 : 가톨릭교회가 추구하는 평화’

현대세계의 현상

지금 세계와 동북아시아는 위기 상황입니다. 자국 중심주의 확산, 극우세력 대두에 의한 난민과 이주자에 대한 배척, 또한 분쟁과 테러의 빈발 등 세계 전체가 폭력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이슬람 과격파 보코 하람(Boko Haram)이 "노예제도를 부활한다"고 공언하고, 실제로 여성을 “우리”에 넣어 “팔고 있는” 영상을 보노라면 마음이 아프고, 우리가 도대체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가 하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유럽에서는 이민 배척 운동을 비롯한 ‘네오 나치즘(Neo­Nazism)’이 부활하고, 일본에서는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가 횡행하는 등 마치 세계는 판도라 상자를 열어 놓은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차별과 인권에 반하는 행위들이 많았으나, 적어도 공적으로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며 억제시켜왔고 또한 ‘차별을 허용해선 안 된다’는 공통의 가치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차별과 배척이 일반화되어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고, 그에 따라 세계는 급속히 폭력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 같은 현실에서 많은 국가들이 테러와 비인도적 행위를 비난하고 그러한 행위에 대해 보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비난이나 보복은 또 다른 폭력을 낳고, 결국 증오와 폭력의 연쇄사슬이 끝없이 계속 이어지게 만듭니다. 우리들은 지금 잠시 멈춰 서서, 세상이 어떻게 이 지경이 되었는지 생각해보고 그 원인을 찾아내 근본 해결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교회도 일관되게 현대 세계를 주시하며 메시지를 발표해왔습니다. 1981년 일본을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히로시마에서 행한 평화 메시지가 지금 현실감 있게 느껴집니다. “각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다 강력하고 진보된 병기를 생산하여 끊임없이 전쟁을 향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쟁 준비를 하고 싶다는 의욕을 나타낸 것이며, 준비가 갖추어졌다는 것은 전쟁 개시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욱이 그것은 언제든지, 어디에서, 어떤 형태로, 누군가가 세계를 파괴하는 가공할 메커니즘을 발동시킬 위험을 무릅쓴다는 것을 말해줍니다”(히로시마 <평화 Appeal> 1981년 2월 25일).

교황의 히로시마 평화 메시지 공포(公布)에서 36년이 경과한 지금, 이와 같은 호소는 한반도 위기에서 현실로 나타날 개연성이 높아지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또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7년 세계의 평화의 날 메시지에서 세계가 ‘산발적 세계대전’(2항)에 휘말리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이 같은 상황에 놓여 있으므로 어느 한쪽에서 평화 구축의 흐름을 확인하고 연대하면서 평화를 위한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마츠우라 주교. (사진출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빈부 격차의 원인

2001년 9월 11일 뉴욕에서 동시다발 테러 ‘9.11’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미국은 ‘9.11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하며, 테러와 새로운 전쟁에 참가하도록 각국에 압력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외교문제평의회의 월터 랏셀 미드(Walter Russel Mead) 교수는 “미국의 문제는 9.11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11.9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11.9야말로 미국의 교만함의 출발점이었다.”고 하였습니다. ‘11.9’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날입니다. 즉 11월 9일에 동서 이데올로기의 벽이 무너졌으나 모든 분쟁의 원인인 남북의 벽, 즉 빈부격차는 그대로 남아있고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진영의 오만함으로 벽이 뛰어넘기 어려울 정도로 한층 더 치솟았습니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쟁의 근저에는 부의 격차 문제가 내재되어 왔고, 그 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세계 상위 8명의 대부호와 하위 36억 명의 총자산이 맞먹는 단계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도 군사력을 통해 격차를 더 고정화시켜 온 것이 증오의 사슬을 만들었고 마침내 IS (이슬람 국가)와 같은 집단을 낳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연쇄 사슬을 끊기 어렵게 만드는 군수산업의 이권을 덧붙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과격집단을 지금과 같이 군사력으로 ‘말살’하는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고, 그렇게 하면 또 다른 그룹이 출현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목전(目前)의 폭력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나 근본적으로는 지금까지 자본주의 진영의 오만함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반성하며, 빈곤문제 해결에 국제사회가 본격적으로 나서는 것이 필요합니다.

냉전이 지속되는 동북아시아

2001년 당시 코피 아난(Kofi Annan) 유엔 사무총장은, 분쟁 예방을 위해서는 시민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보고 NGO 국제회의와 무력충돌예방을 위한 세계적 연대, 즉 GPPAC(Global Partnership for the Prevention of Armed Conflict) 구축을 제창했습니다. 그 준비의 일환으로 세계를 15개 지역으로 나누어 각 지역에서 준비한 과제와 제언을 기초로 최종문서를 채택하고,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호응을 촉구하였습니다.

동북아시아 지역에서는 2005년 2월 도쿄 유엔대학에서 준비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일본 가톨릭 정의·평화협의회를 담당하였던 관계로 위원 1명을 준비회의에 파견했습니다. 그때 참가자의 보고 내용이 대단히 흥미로웠습니다.

유엔대학에서 개최된 준비회의에 참석한 일본 이외 NGO들의 현상 인식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첫째, 동북아시아는 한국과 북한, 타이완과 중국의 관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냉전지대이다.

둘째, 일본은 군국주의 국가이다.

셋째, 이와 같이 긴장된 지역에서 해결 수단이 되는 것은, 전쟁 포기, 전력의 불(不)보유, 교전권의 부인을 규정하는 일본 헌법 제9조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한반도 위기를 포함한 동북아시아에서 평화에 관한 일본의 책임이 무겁다고 하겠습니다. 후반에 다시 설명하겠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일본정부는 그와 같은 책임을 수행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보통 국가’를 내걸고 개헌을 통해 군대를 보유함으로써 대국의 길을 걸으려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아시아의 NGO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일본은 계속하여 군국주의를 지향하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일본의 자세는 동북아시아 특히 한반도 위기를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안전보장 딜레마’

현재 긴장 관계에 있는 동북아시아에서 ‘안전보장 딜레마’와 ‘자기 성취적 예언’이라는 문제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안전보장 딜레마’는 국가의 안전보장을 위한 준비, 동맹 등의 대책이 기대와 달리 타국으로부터의 위협으로 간주되고, 다른 국가들도 군비증강으로 대응하게 됨으로써 군비확장 경쟁이 유발되어 국가의 안전보장이 오히려 위태롭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성취적 예언’도 ‘안전보장 딜레마’와 연관성이 있는 개념입니다. 즉 미래에 대한 우려와 불안에 대해 취했던 대책이 역설적으로 피하고자 한 상황을 현실화 시켜버리는 경우를 가리킵니다. 마치 제1차 세계대전의 계기가 되었던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사건에 대한 주변국의 대책이 바로 그 전형적인 예라 하겠습니다. 즉 주변국가가 그 사건으로 인해 예상되는 위협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하자 오히려 쌍방의 위협이 증폭되어 현실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점에서, 한반도 긴장과 중국의 군비확충에 대한 일본의 과도한 반응과 대책은 오히려 동북아시아에 위협이 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반도의 분쟁 등은 일본 정부가 의도적으로 부추기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평화에 역행하는 일본정부의 동향

아베 정권은 2006년 9월 출범하면서부터 무리하게 헌법을 개정하려는 시도를 되풀이하였습니다. 제1차 아베정권 때는 국민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정권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2012년 12월 제2차 정권에 들어서서는 국회에서 안정적 다수를 배경으로 다시 개헌을 향해 돌진해왔습니다.

이번에는 이전의 실패를 경험 삼아 성문(成文) 개헌은 일단 접어두고 헌법 해석을 바꾸어 현행 헌법을 유명무실하게 하는 방법, 또는 입헌주의의 근간인 정부에 대한 속박을 제거하고, 국민의 알 권리를 제한하는 등 위헌 소지가 있는 법률을 잇달아 제정하고 있습니다.

2013년에는「특정비밀보호법」의결을 강행하여 정부가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사안을 마음대로 비밀로 지정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연이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2014년 7월 1일 각의에서 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하는 결정을 내리고 이를 법제화하기 위해 2015년 9월 19일 안보 관련 법안을 가결·제정하였습니다. 헌법 학자들의 95%가 집단적 자위권은 위헌이라는 견해를 표명하였는데도 말입니다. 더군다나 2017년 3월 21일에는「테러 등 준비죄」를 법제화하여 감시사회의 발단이 되게 했습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법률은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헌법에 의한 권력에 대한 제약, 즉 입헌주의를 없애버리는 것, 말하자면 ‘헌법파괴 쿠데타’가 자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국민의 안전과 안심을 위한’이라는 명분을 걸고 민주주의의 토대를 파괴하고 만 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안보법 법제화에 따라「민간 NGO 등의 긴급요청에 따른 경호」를 위해 자위대가 해외에서 무력행사를 할 수 있는 길을 터주었습니다. 게다가 지금까지 헌법 제9조의 엄격한 규제와 무기수출 3원칙이 있어 무기 수출이 실질적으로 전면 금지되어 왔으나 집단적 자위권 용인에 따라 방위장비청이 신설되어 무기 수출과 무기 개발을 당당히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경제단체연합회는 ‘엄청난 비즈니스 찬스’라고 싱글벙글하며 기자회견을 가졌습니다.

물론 시민들은 이와 같은 움직임에 대해, 일본에서는 아주 드물게 많은 젊은이들도 참가하여 전국 각지에서 반대 데모와 집회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아랑곳 하지 않고 국회에서 안정적 다수를 확보하고 있는 지금을 호기로 보고 모든 안보관계 법안 의결을 강행하여 법제화했습니다.

이와 같은 일본의 동향은 미국과 군사동맹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나, 이런 움직임이 ‘안전보장 딜레마’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본은 중국과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부추김으로써 군사화를 추진하고 있으나, 일본이 헌법 9조에 의한 제한을 제거하여 미국과 군사동맹을 실질적인 것에 근접시켜 나가면 북한과 중국은 더 긴장하고 군비확장 착수에 나설 것입니다.

일본 헌법 제9조를 평화의 도구로

2005년 가톨릭계 난잔 대학교에서 일본과 오스트레일리아의 평화를 연구하는 학자 15명이 참가한 가운데 ‘9·11’이후의 세계 평화에 관한 흥미 있는 워크숍이 개최되었습니다. 이 워크숍에서 안전보장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본 헌법 제9조가 유효하다는 결론을 도출하였습니다. 요컨대 일본은 자위대라 하지만 세계 10위권에 들어가는 군사비를 지출하고 고성능 장비를 갖춘 세계 유수의 군사력을 갖추었음에도 주변국에 위협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일본의 군사력이 전수방위에만 사용되고 해외에서는 일체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이론에 따르면, 예컨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유지하는 미국이라 하더라도 만약 ‘제9조’가 있다면 어떤 국가에 대해서도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전 세계 국가가 ‘제9조’를 가짐으로써 안전보장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론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제9조’가 있지만 집단적 자위권 행사가 가능하다고 무리하게 헌법해석을 하였기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지긴 합니다만 이것이 안전보장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는 실제 사례임에 틀림없습니다.

제가 일본 가톨릭 정의·평화협의회를 담당하고 있을 때, 미국 가톨릭 평화단체인 ‘팍스 크리스트(Pax Christi)’와 제휴하여 미국 각지에서 강연회를, 워싱턴에서 로비 활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일본의 군사화 움직임에는 미국의 압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과거 두 차례 한국의 가톨릭교회에서 일본 헌법 9조에 대해 강연했습니다. 한국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 한국에서 일본 헌법에 관해 강연을 할까 하는 의문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저 나름의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제9조를 지키는 것이 과거 침략전쟁에 대한 보상의 길이라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일본이 전쟁으로 아시아에서 많은 희생자를 낸 것에 대한 보상의 길은 두 번 다시 전쟁을 하지 않는 것과 평화를 위한 국제공헌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개헌 움직임이 점차 힘을 얻는 가운데 그 변천의 과정을 한국인들에게 이해시켜 한국과의 연대 고리를 넓히기 위함입니다.

둘째, 헌법 제9조가 세계의 간절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이른 역사를 간략히 언급하고자 합니다. 20세기는 전쟁의 세기였습니다만,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국제사회는 어떻게 하면 전쟁 피해를 최소화하고 무고한 일반 시민의 피해를 없앨 수 있을까 하는 등, 인도적 관점에서 전쟁에 제약을 가하는 한편 전쟁 그 자체를 없애기 위해 전쟁 위법화를 추진해온 세기이기도 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 참화 직후부터 미국에서는 ‘전쟁 비합법화 운동’이, 한편 유럽에서는 집단적 안전보장에 의한 전쟁억지를 모색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전쟁 비합법화 운동은 침략 뿐 아니라 자위와 제재를 포함한 일체의 전쟁을 비 합법화하려는 사상입니다. 전쟁을 도발하려는 국가는 언제나 자위라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다수 국가의 서약과 여론, 국제재판소, 전쟁처벌법 등을 담보로 하여 생각해 왔던 것입니다.

한편 제재를 인정하는 집단안전보장의 흐름이 국제연맹을 탄생시켰습니다. 두 가지 흐름은 1928년 파리의 부전(不戰)조약에 합류하여 전쟁을 위법으로 규정하였습니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쳐 유엔 헌장과 일본헌법 제 9조에 계승되었습니다. 일본 헌법에는 이와 같은 국제법이 도달한 인권, 평화 이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로서는 특히 헌법 전문과 제9조는 세계가 준 보배라 자리 매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이것들을 손에서 뗄 수 없고, 오히려 이를 세계에 확산시켜 나가야 할 사명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헌법학자 C·손다즈는 “장래 국제헌법을 제정할 수 있게 되면, 일본 헌법 제9조를 모델로 할 수 밖에 없으며 9조의 존재는 세계 평화 구상에 많은 자극을 주고 있다.”고 언명하였습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무력충돌 예방을 위한 세계적 연대(GIPPAC)’는 2005년 7월 유엔 본부에서 세계 회의를 개최하였습니다. 118개국, 900명 이상이 참가한 회의에서 확인된「세계행동선언」은 헌법 9조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지구상에 규범적·법적 서약이 지역의 안정을 촉진하고 신뢰를 증진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발휘하고 있는 지역이 있다. 예를 들면 일본 헌법 제9조는 분쟁해결의 수단으로서 전쟁을 포기함과 동시에 그 목적을 위한 전력의 보유도 포기하고 있다. 이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집단안전보장의 토대가 되고 있다.”

평화를 위한 가톨릭교회의 사명

1981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일본을 방문하여 히로시마에서 발신한 ‘평화 호소’는 일본 가톨릭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처음으로 ‘일본교회’라는 인식이 싹텄습니다. 그전까지 메시지를 낼 때에는 각 주교가 연명으로 서명했으나 이번에는 전원 찬동을 뜻하는, 주교단 명의로 발표했습니다. 이것은 사회에 대한 일본교회의 책임을 자각시키는데 기여했습니다.

‘평화 호소’에서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은 장래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라 표명하였기에 1995년 전후 50주년부터 10년마다 주교단 메시지를 발표하여 과거 전쟁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언급하고 평화를 다짐해 왔습니다. 또한 야스쿠니 신사 문제, 신교자유의 문제, 헌법 9조를 삭제하려는 책동에 대해 비폭력에 의한 평화를 호소하는 메시지를 발표하는 등 자주 목소리를 높여 왔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교회와 연결하는 것이 갖는 의미는 대단히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금년에 23번째가 되는 한일 주교교류회는 매년 대부분의 주교가 참가하고 있고, 처음에는 양국 주교단 레벨에서 역사인식을 공유하자는 취지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이 교류회를 통해 한일 학생교류회도 탄생하는 등 교회 차원의 활발한 교류가 축적되어 온 것은 앞으로 평화구축에 큰 힘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 교류회를 계기로 몇 개 교구에서는 구체적인 협력관계를 시작하는 등 좋은 결실이 맺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교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양국 신자들을 위해서도 아주 큰 표징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사회 문제나 평화에 관한 주교단의 대응 보고와 학습은 쌍방에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자극을 주고 있습니다. 원자력 발전소 문제에 대해 상호간 자극을 주면서 메시지나 해설 본을 같은 시기에 발표하고 있습니다.

평화에 관해 가톨릭교회, 그리고 교회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종교인들의 역할이 앞으로 더 중요하게 되는 것은 평화가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인류 공통의 소원으로 모든 사람이 다 화제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평화’라는 동일한 어휘를 사용하더라도 그 의미하는 바는 대부분 다릅니다. 그 때문인지 세계를 둘러보면 실제로는 평화가 가까워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멀리 사라지고 세계는 점점 더 혼미해지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누구에게 평화인가 하는 점입니다. 가장 먼저 가정의 평화, 국가의 평화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정치가들도 자주 평화를 강조하고 국익을 위해 활동하기 때문에 지지를 받습니다. 본래 국익은 반드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익이 아니라 국가체제의 이익 또는 권력 측에 있는 일부 인간들의 이익입니다. 문제는 그 평화가 과연 모든 사람들을 포함한 보편적인 것을 지향하는가 여부입니다.

자국의 평화와 국익을 지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여타의 다른 국가나 국민을 자국의 평화와 국익에 대해 위협적인가, 아닌가 하는 관점에서 보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되면 국가는 때로 국익을 위해 타국의 자원을 탈취하고 전쟁을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국민들도 국익 제1주의를 생각함으로써 다른 나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에 대해 무관심하게 되고 정부를 지지하게 됩니다. 추구하는 평화와 그 토대인 인간의 존엄도, 국익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이 아니면 세계에 평화는 실현되지 않습니다. 

재단법인 히로시마 평화문화센터 스티븐 리퍼(Steven Leeper) 이사장은 평화 관련 종교 지도자에 대한 기대로서 “종교인의 세계관은 어떤 경우에도 자국을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평화스럽고 행복하게 살게 되기를 바라고 국가를 초월해야 한다.”고 언급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 지도자의 책임과 역할이 무겁다고 하겠습니다.

‘피스 존(Peace Zone)’으로서의 평화지대를

제가 과거에 관여했던 캠페인 중에 ‘무방비지역선언 운동’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 운동은 제네바 조약 추가 제1의정서 59조에 근거하여, 국가 레벨이 아니라 어떤 도시가 정하는 조건을 충족하고 무방비 지역임을 선언하면, 전쟁이 발발할 때에도 그 지역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국제법을 활용한 평화 운동입니다. 이것은 군대가 시민을 지키지 못하고, 오히려 군대가 없는 편이 시민은 안전하다는 국제법을 원용한 현실적인 방법입니다.

실제 사례가 있습니다. 태평양 전쟁 말기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 군인이 주민들을 말려들게 함으로써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고, 민간인 사망자가 군인 전사자 9만 명을 상회하는 1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와 같은 상황이었음에도 군대가 주둔하지 않음으로써 전쟁의 참화를 막은 곳이 있었습니다. 장소는 오키나와 케라마 제도의 마네 섬입니다. 일본군은 전투 준비를 위해 군부대를 마네 섬에 주둔시키려 했습니다. 그때 초등학교 분교장이 자신의 체험과 지식에 의거하여 미군의 공격을 회피하기 위해 일본군의 마네 섬 상륙을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그 결과 일단 섬에 상륙한 미군도, 일본 병사가 주둔하지 않은 마네 섬을 ‘비(非) 방어지구’로 인정하여 공격하거나 주민들을 포로로 삼지도 않고 오히려 식량을 두고 철수하였던 것입니다. 오키나와 전투의 비극적 상황 중에서도 마네 섬은 단 한 사람의 희생자가 없었고 손상을 입지도 않았습니다.

이 같은 예는 또 있습니다. 제2차 대전 중의 파리가 독일군에 대해 ‘개방도시’를 선언하고 무혈입성을 허용함으로써 파리 시민들의 희생을 막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소위「Peace Zone」사상은 일본뿐 아니라 콜럼비아의 전쟁 비협력을 선언한「Peace Community」, 필리핀의「Peace Sanctuary」 및 「Non­military Zone」, 「Neutral Zone」 등의 명칭으로 세계 각처에서 평화지대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한국과 북한 간에는 38도선의 완충지대가 있습니다. 무단으로 출입할 수 없는 구역입니다만, 생각에 따라서는 38도선의 폭이 넓어지고 그 속을 병사도, 무기도 없는 지역으로 한다면 그곳이야말로 평화 구역이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난민이라도 그곳으로 도망쳐 들어가면 습격을 당할 걱정 없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장소가 됩니다. 세계의 작은 지역에서 시험적으로 선보이고 있는「Peace Zone」이 한반도에서도 유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미카엘 고로 마츠우라 주교
일본 나고야교구 교구장

* 이글은 2017년 12월 2일 참회와 속죄의 성당에서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주관으로 열린 제1회 국제학술심포지엄 발제문입니다. 해당 연구소의 허락을 얻어 전문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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