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자는 누구의 발을 씻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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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자는 누구의 발을 씻길 것인가?"
  • 죠안 치티스터
  • 승인 2017.08.07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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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찾는 이들을 위한 지혜-4

큰 수도원의 원장인 죤은 사막에서 40년 동안 살고 있었던 파에시우스 원장에게 갔다. 죤은 파에시우스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자유롭게 그와 얘기를 나누면서 말했다, “이렇게 홀로 오랫동안 살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파에시우스가 대답했다, “혼자 산 이후로 태양은 한번도 내가 먹는 것을 본 적이 없네.” 죤 원장이 그에게 응수했다, “내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산 후로 태양은 내가 화내는 것을 본 적이 없네.”


때때로 관상생활에서 낭만시 되고 자주 과장되는 요소인 고독은 물론 그것 자체에서 오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사막의 은수자들이 함축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고독을 우리 영혼이 단련되는 화로처럼 선택할 때에 우리는 복음이 말하는 것보다 더 작은 기준에 의해 영적 성숙을 판단하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다.

사람이 홀로 살 때에, 은수자들은 이것을 깨달았는데, 마치 고독의 실천을 거룩함과 혼동하기가 매우 쉽다. 영성의 측정 잣대가 단순히 엄격한 육체적인 고행과 규칙, 단식, 일상생활에 대한 성실함이라면 영적인 성숙의 과정은 단순히 어떤 영적인 산수와 같은 것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우리가 한 일, 우리가 “포기한 것들”, 우리가 피했던 것들을 세어보고 우리가 거룩하다고 계산한다. 문제는, 위대한 영적 생활의 대가들은 알았는데, 그러한 측량이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온전한 인간적인 성숙을 말할 때, 전체적인 영적 성숙을 의미할 때에 인간 공동체의 영역 밖에서 그것을 주장한다면 불가능한 것을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관상가는 하느님을 찾기 위하여 삶으로부터 물러날 필요가 없다. 참된 관상가는 다른 사람의 소리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다른 이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며 다른 사람의 뜻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아차리며 고통에 응답하고 다른 이의 호소에 귀기울임으로써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린다.

 

사진출처=pixabay.com

베네딕또회의 규칙은 주장한다. “가장 용맹스러운 수도승들은... 공동체에 사는 사람들이다... 홀로 사는 허가가 거의 주어지지 않도록 해야한다.” 동방 수도생활의 초기 지도자였던 바실리오 성인은 날카롭게 묻는다, “은둔자는 누구의 발을 씻길 것인가?" 이 말의 의미는 명백하다. 인간존재의 영적 성숙을 가름하는 것은 인간공동체이다.

죤 원장은 이렇게 가르친다: 공동체는 우리에게 다양한 관계들을 경험하도록 요청한다고. 우리는 개인적인 이기심의 지뢰밭을 걷기도 하고, 개인적인 책임의 순간들에 직면하며, 개인적인 영웅의 차원으로 우리를 이끌어주는 관계를 겪기도 한다. 그리고 날마다 개인적인 연민을 훈련해야 하는 혹독함을 체험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의 필요 속에서 우리가 포기해야 할 어떤 것을 발견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참으로 우리자신을 비우게 되는 것이다.

시대의 도전 속에서 우리는 성령을 말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경직된 고집과 완고함을 다루면서 우리는 우리자신의 죄를 이해하게 된다. 주위의 세계 속에서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깨닫게 될 때에 인류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우리의 영혼의 질을 가름하는 잣대가 된다.

우리 안에서 분노가 약해지지 않고 해소되지 않은 채 날뛰게 될 때 우리는 우리마음 속에 이웃을 자리잡게 할 수 없다. 몇 달이 지나도 이웃에게 말을 걸지 않고 그들을 찾지 않으며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기 위하여 암자에서 나가지도 않는다면 우리는 창조를 부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충고에 저항하고 삶에서 질문들을 피한다면, 하느님은 우리를 부르시는 아무런 소리도 낼 수가 없다.

관상가는 어스름한 창조의 세계에서 창조주를 바라본다. 우리는 하느님이 참으로 모든 곳에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서 우리가 보는 선함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얼굴을 일견하도록 해준다. 다른 이에게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바로 우리자신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다. 다른 이를 정중하게 대하는 것은 우리자신의 창조의 신학을 드러내준다. 다른 이들의 필요에 우리가 응답하는 방식은 우리자신의 필요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말해준다. 다른 사람에게 우리가 쏟는 주의는 우주의 넓음에 관해서 깨닫게 해주며 우리자신을 넘어 그것을 향해 뻗어나가게 해준다.

우리자신의 믿음이 비틀거릴 때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서 믿음을 지속시켜 가는 결단을 보게 된다. 우리는 일상을 넘어 우리자신의 비젼을 넓혀주는 그런 비전을 다른 이들에게서 찾아보게 된다. 우리는 단순한 대답들을 넘어서는 지혜를 다른 이들에게서 구한다. 우리는 삶에 대한 의미를 풍부하게 해주는 사랑, 말이 필요 없는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을 증명해주는 그런 사랑의 징표를 찾기 위하여 다른 이들에게 매달린다.

확실히, 인간공동체의 진지한 관상과 우리자신의 관상은 서로 연관성이 있다. 참다운 관상가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매일 다른 이들을 우리 자신의 좁은 삶 안으로 들여놔야 한다. 그리고 우리자신보다 더 큰 어떤 것을 청하는 그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원출처] <Illuminated Life, Monastic Wisdom for Seeker of Light>, Joan Chittister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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