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의 "복되도다"는 "해피"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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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의 "복되도다"는 "해피"가 아니다
  • 짐 포레스트
  • 승인 2017.06.11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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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의 사다리-7

산상수훈의 배경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자 제자들이 곁으로 다가 왔다. 예수께서는 비로소 입을 열어 이렇게 가르치셨다.” (마태 5, 1-2)

“무리를 보시고”라는 구절은 예수가 그날 가르치고 있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가 말해야 했던 것은 단지 제자들 같은 정예그룹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을 위한 것이어야 했다. 산상수훈 구절이 나오기 바로 전에 마태오는 군중을 이루고 있었을 사람들에 대해 묘사한다: “그들은 갖가지 병에 걸려 신음하는 환자들과 마귀달린 사람들과 간질병자들과 중풍병자들을 예수께 데려왔다. 예수께서는 그들도 모두 고쳐주셨다.”

“그는 산위로 올라갔다.” 산들은 천국(하늘)을 향해있는 지상의 모습을 상징한다. 따라서 산들은 창조주와 창조물이 만나는 자리이다. 예수가 진복팔단을 선언했던 “산”은 전통에 따르면 가파르나움 근처에 있는 돌출한 언덕으로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기에 아주 이상적인 장소였다.

1985년 우리 가족은 그 언덕 꼭대기 근처에서 피크닉을 한 적이 있는데, 우리는 갈릴래아 호수를 한눈에 바라보며 감탄하였고 그때 시카고에서 온 한 흑인목사가 영감에 가득찬 모습으로 미국 순례객들에게 산상 수훈을 설명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 목사는 우리가 있는 곳에서 약 50야드 정도 떨어져 있었으나 우리는 그의 목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2천년 전 같은 장소에서 더 많은 군중들이 예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리라고 짐작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진복팔단이 선포된 산은 성서적 의미에서 보면 훨씬 더 방대한 지리적 기념비인 시나이산과 연결되는데, 시나이 산은 남부의 시나이 사막에 있는 외지고 황량한 돌로 된 요새 같은 곳이다. 시나이산 꼭대기에서 모세는 짙은 구름 속에 번개가 번쩍이는 가운데 하느님과 말했고 십계명이 새겨진 돌 판을 받았다. 그러나 진복팔단의 푸른 언덕과 시나이의 돌 봉우리 사이에는 지리적인 여건보다 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시나이에서는 오로지 모세만이 가까이 가도록 허용되었으나 갈릴래아에서는 하느님의 아들이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원칙들을 설명하고 있을 때 관심이 있고 듣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참여하도록 환영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앉았다.” 앉았다는 표현은 전통적인 세계에서 선생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마태오가 이렇게 자세히 표현하는 까닭은 예수의 가르침이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정식으로 형태를 갖춘 가르침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이와 비슷하게, 랍비도 회당에서 설교를 할 적에 앉아서 한다. 대학에서도 어떤 “의자들”(교수의 자리)은 영구적으로 고정되어 있다. 주교좌 성당은 주교의 의자가 그곳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그는 입을 열어 그들에게 가르쳤다.” 이런 표현은 유대문화 배경 속에서 권위가 있는 어떤 선포, 선언을 나타낸다. 이 표현은 단순히 말한다는 뜻이 아니다. 산상수훈 사건의 무게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더 특별한 표현이 요구된다. 산상수훈은 예수의 공적인 선언, 연설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복되도다

영어로 산상수훈의 첫 구절들은 '진복팔단'이라고 불린다. 러시아의 전통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진복팔단은 “복됨의 계명들”이다. 각 진복 구절의 첫 번째 단어는 보통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 아니다. 그래서 복되도다와 진복의 의미가 무엇인지 먼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진복(혹은 지복)은 라틴말인 '베아투스'(beatus)에서 나온 것으로, “행복하다, 행운이다, 더없이 행복하다”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극락세계에서 최상의 행복, 순수지복의 상태를 뜻한다. 4세기 후반에 성 예로니모는 “복된 사람들이다”라는 구절을 번역할 때에 이 beatus라는 단어를 선택해서 썼다.

라틴어학자 해롤드 이스벨은 “나는 다른 많은 라틴어 작가들처럼 성 예로니모도 이 beatus의 의미가 성서원문의 상황 속에서 확대될 것이라고 가정했다고 생각한다”고 나에게 말한다. 또한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그러나 그리스말이 더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는 언어이기 때문에, 실제적이고 딱딱한 로마인들이 결코 상상할 수 없는 다양한 의미들을 전달할 수 있는 가능성도 배제해서는 안 된다. 또한 서구의 그리스도교 전통 속에서 특히 하느님의 비전에 관해 언급할 때에 쓰여지는 단어로 ‘지복지관’이 있는데, 이때의 지복이라는 단어는 하느님을 직접 보게 될 때에 느끼는 기쁨을 표현하는 매우 적절한 단어이긴 하나, 이 지복은 하느님의 창조적인 행위로 얻게 되는 무상의 선물이다”

또한 대부분의 영어성서들은 “복되도다"(blessed)라는 단어를 쓰지만, 어떤 최근의 영어본들은 “행복하다(Happy)"라고 번역하기도 해서, “영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한다.

랍비 스티븐 슈왈츠챠일드는 어느 날 나에게 “행복하다(Happy)로 충분치 않다”고 말했다. “그런 단어를 쓰는 성서번역가들은 행복한 종말로 끝나는 TV 코미디를 쓰는 사람으로 직업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복되도다(blessed)'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영어에서 그것을 대신할 다른 단어가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아마도 복되도다라는 말 대신 쓴다면 ‘바른 사고방식’이나 “올바른 방향으로 가기”라는 구절을 사용할 수도 있겠다. 죄란 궤도를 벗어나는 것이며 목표를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되도다’라는 상태는 길을 잃어버리지 않은 상태, 창조주가 당신에게 바라는 길에 제대로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당신이 복됨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궤도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는 고통으로 보일 수 있다. 따라서 ‘복되도다’를 ‘행복하다(Happy)’ 로 바꾸는 것은 성서적 단어의 의미를 축소시키는 것이 된다. 마치 성서의 주제를 ‘좋은 하루 지내(Have a nice day)’ 쯤으로 요약해버리는 것이 되어버린다.”

“행복하다”는 단어는 어떤 측면에서 불행한, 행복하지 않은 번역을 만든다. Happy의 어근인 hap은 “luck"(운)이라는 중세영어이다. 일어나다 happen이라는 단어는 hap의 자어이다. 삶에 대한 우연적인(happenstance) 접근방식은 일이 일어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는, 주사위의 역할에 의존하는 방식이다. 우연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기회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운이 나쁘다는 것은(hapless) 불운한 것이고, 행운을 가지는 것은 승자가 된다. 운이 좋은 사람, 행복한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해 가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행운의 별자리를 갖고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들은 온갖 것들, 외모에서부터 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사진출처=pixabay.com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행복은 인간의 권리와 사회적 의무 중간쯤에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행복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어떤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복되도다라는 말은 어떤가? 이 단어는 성서 번역자들에 의해 17세기에 쓰여진 말이다. 복되도다는 “하느님께 봉헌된 어떤 것이나 그분께 속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몇몇 히브리단어들이 “복되도다”라고 번역되었는데 그럴 경우 “그리고 하느님은 그들(첫 번째 남자와 여자)을 축복하였고, 자식을 낳고 온 땅에 퍼져라”(창세기 1,28)에 나오는 것처럼, 바룩(baruk)으로 시작되었다.

"Baruk은 자주 하느님에 관해 표현할 때 쓰여지는데, 참으로 berakah는 독특한 유대기도이다” 라고 만체스터의 성 안드레아 수도원 대원장인 에프렘 라쉬가 나에게 설명하였다. “전형적인 유대기도는 ‘우리의 하느님 주님이시여, 당신은 복되십니다’로 시작한다... 이 부분이 그리스도교로 합쳐졌는데, 특히 정교회에서는 이 기도 없이 아무런 예식도 시작될 수 없다 ­ 반드시 ‘우리들의 하느님께서는 이제와 영원히 그리고 세세대대로 복되십니다’ 혹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나라는 복되도다’라는 기도로 시작되는 것이다”.

Ashre는 “복되도다”라고 번역되어 온 또다른 히브리말이다. 이 말은 감탄의 뜻이다 ­ “아, 행운이여!” 이 단어의 밑바닥 의미는 “똑바로 가다, 앞으로 가다”이다. ashre ha-ish라는 단어는 상황이 궤도에 놓여있는 사람, 올곧게 나아가는 사람,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을 의미한다. 시편 제 1장의 다음 글귀에서 보는 것처럼, 시편에서는 이 단어가 자주 사용되고 있다: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하고,
야훼주님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그 다음 구절은 복된 사람이 “시내물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다는 은유를 제시한다.

Ashre와 비슷한 히브리말 중에 ashar가 있다. 잠언서에서 이 단어는 이상적인 여성을 묘사하는 구절에 나타난다:

"그래서 그 여인의 아이들이 일어나 복되다 찬양하고
남편도 일어나 그 여인을 칭찬한다."(잠언 31,28)

모든 복음서들은 처음에 그리스어로 쓰여졌다. 그때에 “복되도다”가 동사형일 때, 그리스말로는 eulogeo(“축복하다”)인데, 찬양, 감사, 그리고 봉헌과 관련된 행위를 의미한다. 이런 단어는 따라서 예식의 상황에서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떼어주시며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하고 말씀하셨다. (마르 14,22)

“복되도다”가 형용사형으로 쓰여질 때, 그것은 그리스 말 마카리오스(makarios)의 번역이다. 그래서 진복팔단 전체에 쓰여진 그리스 단어는 makarios이다. 또한 우리는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또한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복되도다”라는 구절과(마태 13,16)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시니 너는 복되다”(마태 16,17) 구절에서도 이 단어를 찾아볼 수 있다.

고어 그리스말로 마카르(makar)는 불멸의 신들에 관련된 단어였다. 카리(Kari)는 “운명”이나 “죽음”을 의미하지만 부정어간 마(ma)가 붙을 때 단어의 뜻은 “죽지 않는 상태, 더 이상 운명의 대상이 되지 않는 상태”, 죽는 존재들이 얻을 수 없으나 갈망하는 조건을 의미하게 된다. 이 불멸의 조건 때문에 신들은 바로 복된 존재인 것이다.

“ashre라는 히브리말의 흥미로운 점은 내가 아는 한 절대로 하느님에 대해 말할 때 쓰여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라고 에프렘 대원장은 지적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말 makar는 정확하게 신들에 관해 사용되지만, 이 단어와 연관된 형용사 makarios는 인간들에 관해 말할 때 더 많이 쓰여진다”고 에프렘 대원장은 또한 설명하였다.

그리스도교에서 makarios를 사용할 때에 그 의미는 계속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 궁극적인 기쁨, 뜻하지 않게 잘못되는 일없는 행복을 뜻하는 것이 되었다. 그것보다 더 높은 선물은 없다. 천문학자가 밤하늘을 연구할 때에, 별들이 결코 닿을 수 없는 거리에 떨어져있으며 그것들이 발하는 빛이 우리 눈에 닿을 즈음에는 이미 수십 세기가 지난 것이며 그 빛을 발산하는 물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연구하는 것처럼, 우리는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추상적인 깨달음을 겨우 얻거나 하느님에 대해 연구하는 것 정도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미치는 축복은 거룩한 삼위일체의 일치에 참여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불멸성을 나누며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자질들을 받음으로써 복을 받는 것이다.


[출처] 짐 포레스트(Jim Forest)가 쓴 <진복의 사다리>(The Ladder of the Beatitudes, Orbis, 1999)(<참사람되어> 2002년 10월호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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