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으로 가는 모든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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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으로 가는 모든 길
  • 짐 포레스트
  • 승인 2017.06.26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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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복의 사다리-9]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우리는 부풀은 빵덩어리 속의 밀가루처럼
서로에게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합해져 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톰)

그리스도께서 진복선언의 "...하늘나라가"를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으로 쓴 것에 유의하자.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유다인들이 창조주를 하느님이라고 직접 표현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마태오 사가는 “하늘나라”라고 일관성 있게 표현한다. 다른 세 복음저자들은 “하느님나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늘나라”와 “하느님나라”의 의미는 다 같다.

천국에 관한 희화적 이미지 ­구름에 둘러싸여 있는 곳에서, 천국의 거주인들은 지상에서의 다양한 삶이 끝난 후 은퇴하였고, 보상으로 하얀 옷과 천사의 날개, 그리고 금 하프를 받았다­. 이 모습은 전형적인 지옥의 모습, 벌거벗은 사람들이 악마의 고문을 받으며 화산구덩이 속에 있는 모습처럼 전혀 환영받지 못한다. 이런 모습의 지옥은 그나마 성서적인 근거라도 있다. 그리스도께서 지옥을 “꺼지지 않는 불길”(마르 9,44)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름으로 가득찬 천국, 하프들, 목욕가운 같은 하얀 옷 등은 전혀 복음서와 연관이 없다.

하늘로 가는 모든 길은 하늘, 천국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보거나 그분의 현존을 깨달을 때마다 우리는 천국에 있는 것이다. 천국이란 하느님의 존재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늘상 가까이 있어 온 것을 보는 것인데, 항상 실제의 중심에 있었으나 어떻든 거의 알아볼 수 없었고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1코린 13,12) 보였을 뿐이다.

첫 번째 진복으로부터 우리는 갖고 있는 보물이 하느님인 사람들은 이미 하늘나라의 울타리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늘로 가는 모든 길은 하늘, 천국이다”라고 위대한 신비가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가 말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내가 길이요’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거룩한 장소로 순례하러 갔던 순례객들에 관한 중세의 격언들도 비슷하다: "당신이 찾고 있는 사람과 함께 동행하지 않는다면, 여정의 끝에 가서 당신은 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하늘나라에 관해 말할 때 그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제자들은 자주 이 질문을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서가 그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으로 꽉 차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비유로 응답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비유는 용서에 관한 것이다. 그분은 “하늘나라는 종들과 셈을 정리하고 싶은 한 왕에 비교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야기는 왕에게 만 달란트를 빚지고 있는 한 종에게 초점을 두고 있는데, 말하는 것을 볼 때 그 빚은 갚을 수 없는 것 같은 어마어마한 액수이다. 왕은 그 종의 모든 가족, 종들, 소유물들을 다 팔겠다고 말하고, 종은 무릎을 꿇고 앉아 왕에게 인내를 간청하여 결국 빚을 탕감 받는다.

그리고 나서 즉시, 종은 그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남자를 만난다(한 데나리온은 노동자가 하루에 버는 임금이었다). 더 적은 빚을 진 그 남자는 참아달라고 애원하면서 빚을 갚겠다고 약속하지만 그 청은 거절되고 그 남자는 감옥으로 보내진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용서해주었던 그 종을 질책한다: “이 몹쓸 종아! 나는 네가 애걸하기에 그 많은 빚을 탕감해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몹시 노한 왕은 그 용서하지 않은 종이 자신의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다.

그리스도는 이 비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결론을 맺는다, “그러므로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23-35)

이 비유의 핵심을 놓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늘나라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할 때마다, 피상적으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진실로” 용서할 때에 존재한다. 하늘나라는 복수가 아니라 자비가 다스릴 때마다 그곳에 있다.

사진출처=pixabay.com

하늘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마태오의 복음 또 다른 곳에서 예수는 하늘나라를 겨자씨에 비교한다. 모든 씨앗 중에 가장 작은 씨앗이지만 싹이 트고 자라면 큰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 그 가지에 깃들만큼”된다(마태 13,31-32). 그리고 이어 비슷한 이미지의 비유를 말한다. 하늘나라는 마치 “어떤 여자가 밀가루 서말 속에 누룩을 집어넣었더니 온통 부풀어 오른 것과 같다”(마태 13,33).

작은 씨앗, 아주 적은 누룩, 소금 몇 알, 어둠 속의 불빛­이처럼 작은 것들은 거대한 팽창과 변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예수는 하늘나라가 “밭에 숨겨져 있는 보물”과 같아서 그것을 찾은 사람은 기쁜 나머지 그 밭을 사기 위하여 가진 모든 것을 팔아버린다(마태 13,44)고 말한다. 또 하늘나라는 “값진 진주”와 같아서 그것을 사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팔게 된다(마태 13,45).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깨달음은 “묻혀있는 보물”이며 “값진 진주”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아름다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을 때 하늘나라로 들어간다.

마태오 복음서의 또다른 비유에서 예수는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밭에 좋은 씨를 뿌린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잠든 사이에 원수가 와서 밀밭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 밀밭 주인은 일꾼들에게 가라지를 그대로 두라고 한다. 밀까지 잘못 뽑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꾼들에게 추수 때까지 기다려 가라지를 먼저 뽑아 태워버리라고 지시한다(마태 13,24-30).

후에 예수는 이와 비슷한 은유를 사용한다. 하늘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다 끌어올리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온갖 것들을 다 끌어올린 다음에야 어부들은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을 구분해서 버린다(마태 13,47-49).

이 두 가지 비유들은 하느님의 인내에 초점을 두고 있다. 밭의 가라지가 밀과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고 똑같은 그물 속에 온갖 고기들을 다 끌어올리는 것이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의 삶이 어떻든지 그들을 존중할 때에 하느님의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르칠 때에 사용하는 단순한 이미지들에 주의를 기울여보면 하느님의 용서, 인내, 그리고 자비가 다른 이들에 대한 우리의 응답을 형성하도록 우리가 허용할 때에 우리는 하늘나라로 들어간다. 하늘나라는 우리가 최후의 심판 때에 하느님께서 징벌하도록 맡기면서 파괴하거나 벌주는 것을 거부할 때에 존재한다.

하느님나라는 바로 우리들 가운데 

루가 복음서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에게 언제 하느님나라가 오는지 묻고 있다. 그는 대답한다. “하느님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나라는 바로 너희들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루가 17,20-21). 바오로 사도는 골로사이 교회에 보낸 서한에서 이와 비슷하게 말한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시어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셨습니다”(콜로 1,13).

하느님나라는 단순하게 그리스도안에서의 삶이고, 그리스도에 관한 개념이 아니며,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필요한 원칙이라 생각하는 것들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나라는 그분의 현존 안에서 사는 것이며, 우리가 어디 있든지 간에 우리 주변의 사물과 사람들 속에서 그분을 알아보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순명하는 것이고 우리의 삶과 자원들에 관한 다른 모든 요구들은 그것들이 그리스도의 계명과 대립되지 않을 때에만 존중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시인인 예브게니 예브투쉥코가 말한 다음 이야기는 우리에게 하느님나라에 관한 갑작스러운 체험을 일별할 수 있게 해준다. 전쟁 한 가운데에서, 러시아의 크레믈린에서는 스탈린이 지배하고 히틀러의 군대가 동쪽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던 때였다.

1944년 예브투셍코의 어머니는 그를 시베리아에서 모스코로 데려갔다. 그들은 2만 명의 독일전쟁포로들이 붉은 광장을 지나 행진하는 것을 보고 있었던 거대한 군중 속에 있었다.

예브투쉥코는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길에는 구경꾼이 넘치고 있었고, 군인들과 경찰들이 교통을 차단하고 있었다. 군중은 대부분 여인들이었다­. 힘든 노동 때문에 거친 손을 가진 러시아 여인들, 그들의 입술에는 립스틱의 흔적이 하나도 없었고 전쟁의 무게 때문에 어깨들은 구부러져 있었다. 여인들은 누구나 독일인들에 의해 아버지나 남편, 남자 형제나 아들을 잃었을 것이다. 그들은 독일군인들이 나타나는 쪽으로 증오에 찬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이 나타났다. 소련 장성들이 제일 앞에서 행진하였다. 그들의 턱들은 당당하게 튀어나와 있고, 입술은 경멸을 품고 꽉 다물어져진 채 그들의 태도 전체가 러시아의 평민 승리자들에 대해 우월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나쁜 놈들, 그들에게서 향수냄새가 나네” 하고 군중 속의 어떤 사람이 증오스럽게 말했다. 여인들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군인들과 경찰들이 군중들을 뒤로 물러서 있게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갑자기 어떤 일이 군중 속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독일군인들의 마르고 면도도 하지 않은 모습들, 더러운 피묻은 붕대를 감고 목다리를 짚고 절뚝거리는 모습들, 혹은 동료의 어깨에 기댄 모습들, 고개를 떨구고 걷고 있는 모습들을 보았다. 거리에는 죽음의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그저 장화를 끄는 소리들과 목다리가 탁탁 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때 나는 한 나이 든 여인이 부서진 장화를 신고 앞으로 나가 한 경찰의 어깨를 만지며 “앞으로 나가게 해주세요”하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자 그 경찰은 여인의 기세를 느끼고 나가게 해주었다. 여인은 독일군인들에게로 다가가 코트 안에서 색깔 있는 손수건에 싼 무엇인가를 꺼내어 펼쳤다. 그것은 흑빵조각이었다. 여인은 그 빵을 한 군인의 주머니 속에 서투르게 밀어 넣었다. 군인은 너무나 기운이 빠져서 그저 발끝으로 쓰러질 듯 걷고 있었다. 이제 많은 여인들이 군인들을 향해 달려갔다. 그들의 손에 빵, 담배 등 갖고 있는 것을 안겨주었다. 군인들은 더 이상 적이 아니었다. 그들은 사람이었다.

이런 이야기는 대부분의 역사책들이 간과해버리는 이야기이다. 적의가 자비로 바뀌고 연민이 치유와 용서의 행위로 길을 열며, 물질적인 가난이 영의 가난으로 변하는 기적적인 순간들이다.

한 나이 든 여인의 행동 하나는 바오로 사도가 “원수 되었던 모든 요소들”(에페소 2,14)이라고 묘사하는 것들을 무너뜨렸다. 여인의 눈은 살인을 저지른 나치 군인들이 아니라 고통받는 독일 소년들을 보도록 열린 것이다. 여인은 응답으로 갖고 있던 작은 것을, 소중하게 간직했던 흑빵 한 조각을 내놓았다. 여인은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한 후 다른 사람들이 그의 작은 사랑의 행위에 일깨워져서 선물들이 홍수처럼 터져나온 것을 보고 놀랐을까? 하늘나라가 붉은 광장에 쏟아져 나온 순간이었다.


[출처] 짐 포레스트(Jim Forest)가 쓴 <진복의 사다리>(The Ladder of the Beatitudes, Orbis, 1999)(<참사람되어> 2002년 10월호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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