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마리아, 성령이 네게 내려오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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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마리아, 성령이 네게 내려오시고
  •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7.06.06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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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가 복음과 사도행전-9 : 루가 복음서의 마리아

신약성서 가운데 루가에 의한 복음서는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인류의 상징으로서의 마리아에 대한 설명을 완전하게 하고있다. 그녀는 실제로 어머니이자 완전한 인간이시다. 그녀는 석고상도 아니고 예술가가 만들어낸 마돈나도 아니다. 그녀는, 최대의 신비인 아들과 함께 여인으로 성장하는 한 유대 소녀다. 그것은 오늘날의 어떤 어머니라도 증언할 수 있는 매우 사실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그녀는 특별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여인이다. 이 신앙 때문에 그녀가 따로 선별되었고 우리들의 표본이 된다. 비록 그녀가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요구하신 것을 완전히 이해 하지는 못했을 지라도 그녀는 온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믿었고 그 믿음에 따라 행동한다.

비록 루가가 마리아에 대해 영광스럽고 비현실적인 자화상을 보여 주지 않지만 그렇다고 있는 그대로의 사진을 보여 주지도 않는다. 복음서는 신문기사가 아니라 신앙에 대한 문서로서 1세기 당시 교회의 믿음을 증언하는 글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루가 복음 처음 세 개의 장(章)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신학적인 설명이다. 그것은 창세기, 출애굽기, 유딧서, 룻기, 이사야서, 다니엘서, 시편과 구약성서의 다른 많은 책들에 대한 암시들로 되어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루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전체성서와의 관련 속에 놓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작품에 더 큰 중요성을 주고 있다. 그는 개인들에 대해서 말할 뿐 아니라 모범적인 개인들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어떤 특정한 사건을 묘사하는 것보다 오히려 그런 사건이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의미를 더 중요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루가 복음 맨 처음에 마리아의 삶에서 일어난 사건을 공부할 때 우리는 마리아를 한 개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인간의 표본으로도 생각해야 한다. 그녀는 한 특정한 여성이지만, 모든 여자, 남자들의 신앙의 본보기이시다. 그리고 루가가 묘사하고 있는 사건은 한 여자의 삶에서 일어난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이런 사건들은 모든 신앙의 삶이 가지고 있는 영원한 의미를 표현한다.

Fra Angelico, Annunciation, 1440-43, hallway, monk's dormitory, San Marco

성모영보

첫 번째 사건은 영보인데 이때 마리아는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리라는 소식을 듣는다. 천사가 아직도 왜 그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는지 잘 모르고 있는 여인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그림은 화가들 덕분에 우리에게 아주 익숙하다:

“은총을 가득히 받은이여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마리아는 이 말에 몹시 당황하며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히 생각하였다. (루가 1,28-19)

천사는 마리아에게 "기뻐하십시오"라면서 인사를 건네는데, 이는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하실 때는 언제나 좋은 소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들었는지 아니면 우리가 상상하는 것인지 금방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는 의아해 하면서 더 듣는다:

그러자 천사는 다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마리아, 당신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라고 말한다. (루가 1,30)

하느님은 그녀를 신앙의 길로 부르신다. 그것은 두려운 길이 아니다. 주님께서 계실 때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주님께서 부르실 때 단 한가지 필요한 것은 믿는 것이다. 그 여인은 하느님의 은총, 하느님의 사랑의 선물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스어로 “호의”는 카리스(charis)인데, “은혜, 은총(grace)”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마리아에게는 은총의 경험이다. 모든 사람들의 은총에 대한 경험과 마찬가지로 마리아의 경험도 하느님의 호의와 받아들임에 관한 것이다.

우리들 각자에게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홀로 하기를 요청하시며, 주시는 고유의 소명이 있다. 이 소명은 개인적으로 개별적으로 온다. 이 부르심은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와같이 마리아는 지금 이 순간에 주님께서 그녀에게 원하시는 것을 전하는 천사의 말을 듣는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시어 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되겠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루가 1,31-33)

그녀는 이 말을 듣고 다시 의아해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녀는 분별력을 원한다. 그녀는 묻는다: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가 1,34)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로 마리아는 분명한 것을 묻는다. 그녀는 약혼자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째 단계에서 그녀는 우리 모두를 대신해서 말한다.

성서에서 말하는 처녀성이란 단순히 육체적인 순결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영성적인 비움을 말한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 안에 씨를 뿌리지 않으시면 우리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도록 허락하지 않으면 우리는 영적으로 메마르게 된다. 그래서 천사는 그 여인에게 그녀의 메마름이 극복 될 것이라고 설명을 한다:

“성령이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나신 그 거룩한 아기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 네 친척 엘리자벳을 보아라.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고들 하였지만 그 늙은 나이에도 아기를 가진지가 벌써 여섯 달이나 되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되는 것이 없다.“ (루가 1,35-37)

마리아를 통해서 루가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는 독자들에게 신앙의 길은 들어보지 못했던 가능성의 길이라고 말한다. 성령의 힘은 불가능도 가능케 한다고 말한다. 꿈도 꿀 수 없던 것들을 꿈꿀 수 있게 되고 그런 꿈들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런일이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자동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런일은 주님을 완전히 믿는 사람들에게만 일어난다. 루가가 계속 말한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마리아가 말했다. (루가 1,38)

이런 말들로 마리아는 야훼의 부르심에 따라 광야를 건너는 아브라함의 믿음, 불타는 덤불 앞에서 무릎을 꿇는 모세의 신앙, 자기들에게 온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예언자들의 믿음, 혼란 한가운데에 서있는 욥의 신앙을 요약한다.

사실상 마리아는 “나는 인간이나, 주님은 하느님이십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그분은 주인이십니다. 이런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저는 모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저는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의 말씀에 거짓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그대로 일어나게 하십시오! 저는 하느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분이 저를 실망시키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압니다.”

마리아는 정말로 진실인 것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로 하느님의 말씀에 응답한다. 그녀는 자신에게 들려 오는 말씀에 마음을 고정시키고 그 말씀이 그녀에게 진리를 말하고 있다고 신뢰한다. 진실과 대화를 하면서 그녀는 자신에게 들려 오는 진실이 실제가 되도록 허락한다. 그녀는 진리로부터 숨지 않는다; 그녀는 그것과 마주 한다. 그녀는 진실로부터 달아나지 않는다; 그녀는 그것을 기꺼이 끌어안는다. 그녀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보고 그렇게 함으로써 진리가 그대로 이루어지게 한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기도의 표상이다. 기도란 실제와 교류하는 것이고, 그 실제가 우리에게 말을 하도록 하는 것이며 우리에게 온 말씀을 육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그것이 일어나도록 놔두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일어나게 만들지 않는다. 기도 중에 하느님께 “예”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그 말씀을 들었다고 인정하는 것만이 아니다. “예”라고 하는 것은 그 말씀에 따라 우리의 삶이 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 말씀을 우리 전 존재에 접목시켜 그것이 우리 존재를 변화시키도록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는 생명과 생명 사이의 대화, 신적인 생명과 인간적인 생명 사이의 대화, 영적인 생명과 육적인 생명 사이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육화하여 그것을 우리 안에서 구체화시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 세상 안에서 실제 일 수가 없다.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신약>,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참사람되어 2000년 7월호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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