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마리아, 자궁 속에 품은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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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마리아, 자궁 속에 품은 혁명
  •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7.06.28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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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가 복음과 사도행전-12 : 루가 복음서의 마리아

가톨릭교 전통에서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어머니일 뿐 아니라 교회의 어머니로 불려 왔다. 물론 그분은 초기 공동체 구성원들의 실제 어머니는 아니다. 그러나 그녀의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신뢰와 헌신의 태도는 초기 공동체의 신뢰심과 투신을 이끌고 모범이 됨으로써 그녀는 모든 제자들의 영적 어머니가 되었다. 마리아는 성령을 처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오순절 성령의 오심을 예시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예수님을 출산함으로써 초기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육화에 대한 본보기가 되었다.

마리아는 어머니이지만 또한 동정녀이다. 교회는 세상적인 아버지가 없다. 교회의 아버지는 우리 주님의 아버지이시다. 예수님께서 아빠이신 그분에게 기도하셨고 그분안에 당신의 믿음을 온전히 맡기셨다. 교회의 성령은 아버지의 성령이며 이분은 교회에 용기, 확신, 보살핌, 약속을 충만히 베푸신다. 성령은 오순절에 제자들 위에 내리셨고 그들 안으로 들어오셔서 그들을 이 세상에서 새로운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들었다.

예수의 탄생과 관련해서 마리아는 이처럼 어머니라고도 불리고 동정녀라고도 불리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특히 동정에 대한 성서적 의미가 이해되지 못할 때는 이 동정성이 단지 육체적인 순결성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그러나 예수님과 관련된 마리아의 동정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성서에 나와있는 동정의 뜻을 이해해야 한다. 성서적인 의미의 동정을 이해하면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영적으로 동정이라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다. 같은 방법으로 우리가 성서적 의미의 모성을 이해하면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모성과 교회의 모성을 더 깊이 이해 할 수 있다.

Avià 제단화. 스페인 바르셀로나 카탈루냐 국립미술관, 13세기

우선, 우리는 신체적 동정성이 젊은 미혼여인의 적합한 조건이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스라엘인들이 그렇게 큰 가치를 두지 않았음을 이해해야 한다. 유태인 소녀는 꽤 어린나이에 결혼하는데 주로 가족이 중매를 하며 그 후에 그녀는 어머니가 된다. 행복한 여자란 사랑스러운 남편과 결혼해서 아이들을 많이 낳는 축복을 받는 사람이다.

결혼을 했으나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는 가장 불행한 여자이다. 그녀는 불임이며, 열매를 맺지 못하고, 채워지지 않은 것이다. 말하자면, 그 여자는 제 때를 놓친 동정녀이다. 그녀는 생명을 가져 올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그녀는 동정녀 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 텅 비어 있고 받을 수 있어, 그녀는 자신의 밖에 있는 힘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상태에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어머니는 무언가를 이룬 축복받은 여인이다. 그녀의 결실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선물, 특별한 은혜이다. 하느님께서는 은총을 그녀 아이들, 즉 그녀로부터 쏟아져 나온 새 생명 안에서 드러내신다. 만일 여인이 자기의 빈 동정성을 채우기 위해서 하느님의 축복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마치 하느님께서 당신의 창조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여인의 처녀성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하느님의 은총은 남자의 힘만으로는 빈 곳을 생명으로 채울 수 없는 것을 극복하여 생명을 줄 수 있다.

성서에서 아이를 못 낳는 여인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그 여인들은 하느님의 능력으로 아기를 갖게된다. 창세기 17장에서 사라는 불임이었으며 아기를 가질 수 있는 나이가 지났으나 그녀는 자기가 아들을 가질 것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 약속대로 이사악을 낳았다. 25장에서 레베카는 야훼께서 그녀의 남편의 기도에 응답해주실 때까지 아기를 갖지 못하였으나 쌍둥이인 에사오와 야곱을 낳았다. 그리고 제 30장에서 라헬은 아들을 열렬히 원했으나 아이가 없었고 마침내 하느님께서 그녀의 빈곳을 채워주셔서 요셉을 낳는다.

사무엘 전서에서도 똑같은 양태가 반복된다. 한나는 야훼께 그녀의 수치심을 거두어주시고 아들을 주시기를 간청한다. 어느날 성전의 사제가 그녀의 기도를 듣고 응답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준다. 확신에 차서 그녀는 그날 밤 남편의 침실로 가서 아이를 잉태하였는데 이 아들이 자라서 예언자 사무엘이 되었다. 제 2장에 나오는 한나의 감사의 기도는 루가 복음에 나오는 마리아의 마니피캇과 아주 비슷하다. 말하자면 한나는 마리아의 영적 선조이다. 그것이 아마도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마리아의 어머니를 안나라고 하게된 이유인 듯하다.

신약에서도 우리는 하느님께서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인의 공허함을 바로 생명으로 채워 주시는 사례를 볼 수 있다. 루가 복음 처음에 마리아의 친척 엘리자벳은 사라 처럼 불임이었고 아기를 가질 수 있는 나이가 훨씬 지났다. 한나와 마찬가지로 엘리사벳도 기도하러 성전에 가는 경건한 남편의 아내였다. 그리고 사라와 한나처럼 엘리자벳이 신심깊게 기다린 덕분에 드디어 응답을 받았고 그녀는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을 선포하는 예언자를 낳았는데 그가 세례자 요한이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루가에게 마리아는 성서에 나오는 모든 선조들을 총 집약하거나 그들을 능가하는 여인이다. 그녀는 자신의 결실을 위해서 완전히 하느님께 의탁한다. 그녀는 자신을 완전히 개방하여 그분을 맞아들였고, 이러한 전적인 받아들임의 자세는 그녀에게 오시고 그녀의 자궁 안에서 육화된 하느님 말씀으로 응답을 받았다. 완전히 동정이었던 그녀가 이제 완전한 어머니가 되었다. 성서적인 동정, 순결성과 성서적인 모성의 주제가 마리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다른한편, 하느님의 은총과 호의를 상실하는 성서의 주제가 전도된다. 마리아가 낳은 아들은 완전히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님은 새로운 인간성의 시작이다. 하와가 하느님을 거역한 후 그녀는 죄인인 인류의 어머니가 되었으나, 마리아가 하느님께 순종한 후 그녀는 구원된 모든 인류의 어머니가 되었다. 성서에서 말한 추락이 반전되었다: 모든 인간이 예수의 부활에 동참함으로써 그분으로 인해 다시 일으켜질 것이다.

성서 전체에서 우리가 보았듯이 동정녀와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은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생명을 낳을 수 없다는 무능력을 상징하고 있다. 그들은 인간이 하느님 없이는 어떤 선함도 만들어 낼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에서 여인들이 기대를 갖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그분의 뜻대로 하기를 원하면 하느님께서 그녀 안에 씨를 뿌리실 것이고 그녀의 빈곳이 채워진다. 그녀는 자기 스스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힘을 받게 되어 어머니가 된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어떻게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메마른 것이 결실을 맺을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상징이다. 그녀는 하느님 은총의 징표인 믿음을 항상 가지고 있으면서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의 형상이다. 그녀는 은총으로부터 떨어져나가지 않았고, 비천함에서 높이 들어 올려 졌으며 하느님의 능력으로 칭송을 받는다. 

가톨릭교회의 성모 마리아 몽소승천의 교리는 이러한 성서적인 형상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다.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이 표상은 육신의 부활이라는 교리에 반영되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처럼 완전한 사람, 완전히 살아있는 모습으로 일어날 것임을 가르치는 것이다.

성서에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어머니가 된 동정녀의 주제와 잘 어울리는 또 다른 상징적인 주제가 있다. 그것은 하느님의 가난한 이들, 아나윔(anawim), 하느님의 구원을 기대하면서 기다리고 있는 하느님의 보잘것 없는 자들에 관한 주제이다. 특히 바빌로니아 유배 시절, 예언자들은 언젠가는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는 남은 이스라엘인들에게 말할 때 이 주제를 말했다.

예언자 스바니야는 망명객들을 “예루살렘의 딸”, “시온의 딸” (도시가 있던 언덕) 이라고 말한다. 딸이란 말의 형상은 여성적이고 동정성을 뜻하는데, 유배중인 비천한 이들이 힘없고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온의 딸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큰소리로 외쳐라.
예루살렘의 딸아, 마음껏 기뻐하며 축제를 베풀어라.
야훼께서 원수들을 쫓으셨다.
너를 벌하던 자들을 몰아 내셨다.
이스라엘의 임금, 야훼께서 너희 가운데 함께 계시니
다시는 화를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스바니야 3,14-15)

여기에서 “너희 가운데” 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구절은 다른 곳에서 “너희 자궁 안에서” 라고 번역된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자기 안에 이스라엘의 구세주를 가지고 있는 여인의 형상이다. 그녀는 “야훼의 이름 안에서 피난처를 찾는”,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구체화 한 것이다(스바니야 3,12).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시온의 딸”, “예루살렘의 딸”이라고 불리게 된 사람은 마리아였다. 마리아는 구세주를 잉태한 사람으로서만이 아니라 아나윔(anawim)과 함께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녀는 완전한 이스라엘인, 주님께 완전히 의탁하면서 사는, 보잘 것 없는 가난한 사람의 완벽한 본보기이다.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비천한 사람들이다: 그 비밀은 그들 가운데 있고 그들 안에 - 그들의 태(胎) 안에 있다. 교회를 잉태하여 낳는 이들이 그들이다. 그리스도를 세상으로 모셔오는 이들이 그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어머니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본보기이기도 하다. 


[출처]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신약>,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참사람되어 2000년 7월호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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