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웬] 희망은 낙관주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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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 희망은 낙관주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 헨리 나웬
  • 승인 2017.05.22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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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pixabay.com

우리는 사람들이 희망에 대해 별로 알고 있지 못한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바램들에 대해서 안다. 성탄절기 내내 바램으로 가득하다. 나는 이걸 원하고 혹은 이걸 바란다. 이런 바램은 매우 구체적이다. 나는 장난감이나 자동차 혹은 새 직장을 원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특정한 요구들이다.

그러나 희망은 정확히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하느님이 어떻게 그분의 약속을 실현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분이 약속을 실현할 것이라고 알며 그래서 나는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인식으로 현재를 살 수 있다.” 그러면 나는 내 존재의 가장 깊은 갈망이 실현될 것이라고 알고 믿을 수 있다. 이런 방식은 미래를 매우 열려있게 해준다.

희망은 낙관주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많은 사람들은 희망이 낙관주의라고 생각한다. 삶의 긍정적인 측면을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는 희망에 대해 전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예수가 미래나 세상의 종말에 대해 말할 때, 그분은 전쟁들, 불안 속에 있는 사람들, 나라가 나라를 거스르는 것, 그리고 지진에 대해 묘사한다.

“어느 날 모든 것이 다 훌륭해 질 것이다”라고 예수가 말하는 대목은 없다. 그분은 어마어마한 고통에 대해 말하지만, “너희들, 너희(나의 사랑하는 사람들)는 너희의 마음을 나에게 항상 집중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하라. 사람의 아들 앞에서 너희의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일어나라. 모든 것 때문에 혼란스러워하지 말라. 계속 집중하라.” 일들이 정리 될 것이고 마침내 고통이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예수는 세상이 어둡고 여전히 어두운 채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만일 당신이 희망을 갖고 산다면, 현재에 깊이 현존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신의 마음과 삶 안에 하느님의 발자취를 언제나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미 무슨 일이 다가올지 감지하고 있다. 그리고 영적인 삶 전체는 하느님이 바로 우리와 함께, 지금 우리와 함께 있으므로 그분의 오심을 기다릴 수 있고 이 기다림은 희망 속의 기다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희망으로 기다리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이미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키워야 한다. 여기 그리고 지금이 중요하다. 하느님은 현재의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영원의 하느님이기 때문에 현재의 하느님이다.

희망은 하느님이 우리 자신의 상상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우리 안에서 그분의 일을 하도록 우리 자신을 열어 놓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했듯이, “네가 젊었을 때에는 허리띠를 두르고 네가 원하는 대로 갔다. 그러나 영적으로 나이가 들 때에 너는 팔을 벌리고 다른 사람들과 하느님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이끌어가도록 허락하게 된다.” 이것이 희망이다. 새로운 자리로 이끌려가도록 우리 자신을 맡기는 것.

­「“헨리 나웬을 기리며: 1932-1996,”」에서

(브라이언 스틸러 신부 인터뷰)

*이 글은 1998년 미국 메리놀 출판사 올비스에서 출판된 <Henri Nouwen>(Robert A. Jonas 구성)을 부분적으로 옮긴 것입니다.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04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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