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웬] 불평과 즐거움은 공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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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 불평과 즐거움은 공존할 수 없다
  • 헨리 나웬
  • 승인 2017.04.23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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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mbrandt's "Return of the Prodigal Son,"

복음서의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큰아들이 그의 아버지를 공격하는 말들을 주의 깊게 들어보면­, 그 말들은 독선적이고 자기연민, 질투의 말들이다­. 더 깊은 불평을 들을 수도 있다. 그것은 받아야 할 것을 결코 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마음이다. 그것은 끝없이 미묘하고 한편으로 또 그다지 미묘하지 않은 방식으로 표현되는 불평이다.

이런 불평은 인간의 회한을 밑바닥까지 닿게 만든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울부짖는 불평이다: “나는 너무 열심히 노력했고, 너무 오래 동안 일했고 너무 많이 일했다. 그런데도 나는 남들이 너무나 쉽게 얻는 것을 받지 못했다. 왜 사람들은 나에게 감사하지 않고, 나를 초대하지도 나와 함께 놀아주지도 않는가? 삶을 너무나 쉽게 너무나 가볍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지나친 많은 관심을 보이면서도 왜 나를 존중하지 않는가?”

이렇게 말없이 혹은 말로 하는 불평 속에서 나는 내 안에 있는 큰아들을 알아본다. 작은 거부들, 작은 무례함, 작은 무심함에 대해 불평하는 나 자신을 자주 발견한다. 때때로 나는 내 안에서 중얼거리는 소리, 투덜대는 소리, 불퉁거리는 소리, 신음하는 소리, 잔소리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 나오는 것을 깨닫는다. 문제꺼리에 더 머물수록, 내 상태는 더 악화되어간다...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하다. 즉, 불평하는 것은 스스로 계속하는 또한 반(反)생산적인 행동이라는 것이다. 동정심을 일으키고 내가 너무나 원하는 어떤 만족감을 얻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불평을 표현할 때마다, 결과는 항상 내가 얻으려고 했던 것과 정반대이다. 불평하는 사람하곤 함께 살기가 힘들고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자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내뱉는 불평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알고 있을 뿐이다. 비극은 자주, 일단 표현된 불평이 가장 두려워하는 결과, 즉 거부를 더 많이 일으키게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아버지의 기쁨을 나누지 못하는 큰아들의 태도는 꽤 이해할만한 것이 된다. 큰아들이 들판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음악소리와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집안에 경사가 일어난 것을 알았다. 즉시 그는 의심이 일어났다. 일단 자기 거부적인 불평이 우리 안에서 형성되면 즐거움까지도 더 이상 우리를 즐겁게 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자발적인 응답은 그 힘을 잃는다. 즐거움과 회한은 함께 공존할 수 없다. 음악과 춤은 기쁨으로 이끌지 못하고 더 큰 위축감을 가져오고 만다.

­「돌아온 탕자」에서

*이 글은 1998년 미국 메리놀 출판사 올비스에서 출판된 <Henri Nouwen>(Robert A. Jonas 구성)을 부분적으로 옮긴 것입니다.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04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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