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웬] "신학과 강론, 그건 단지 말에 불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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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웬] "신학과 강론, 그건 단지 말에 불과해"
  • 헨리 나웬
  • 승인 2017.01.16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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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길-11

나의 말까지 포함하여 말들은 그 창의적인 힘을 잃고 있다. 말의 한없는 증가는 말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게 하고 자주 “그건 말에 불과해”라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선생들은 학생들에게 6년, 12년, 18년 그리고 때로 24년 동안 말한다. 그러나 학생들은 자주 “그건 단지 말에 불과할 뿐이야”라는 느낌을 경험한다.

사제들은 매주마다 해를 거듭하며 설교한다. 그러나 본당신자들은 여전히 똑같고 자주 이렇게 생각한다, “그냥 말일 뿐이야.” 정치가들, 기업인들, 장로들, 교황들은 “절기에 맞추어 또한 절기가 아닌 때에도” 연설하고 성명서를 발표하지만 듣는 사람들은 말한다: “그냥 말들이야, 또 다른 혼동이고 산만함일 뿐이야!”

사진=한상봉

이런 현상의 결과로 말의 중요한 기능인 의사소통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말은 더 이상 소통시키지 않고 더 이상 공동체를 만들지 못한다. 그러므로 말은 더 이상 생명을 주지 못한다. 말은 사람들이 서로 만나고 사회를 세울 수 있는 믿을만한 바탕을 더 이상 제시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과장인가? 잠시동안 신학 교육에 대해 생각해보자. 신학 교육이 우리를 주님이신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고 그래서 그 분을 우리의 온 마음과 영혼과 정신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위대한 계명(마태오 22,37)에 더 충실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외에 또 다른 목적은 무엇인가?

신학원과 신학교는 신학전공 학생들이 하느님과 더욱 더 일치하고 서로간에 또한 동료인간들간에 더 일치를 이룰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신학 교육은 우리의 온 인격이 그리스도의 정신과 갈수록 깊은 일치를 이루도록 양성하는 것이어야 하고 그래서 우리의 기도하는 방식과 믿음의 방식이 하나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신학을 공부하거나 가르치는 우리들은 하느님에 관하여 또한 “하느님과 관련된 문제들”에 관한 복잡한 토론, 논쟁, 대립의 구도 속에 갇혀서 하느님과의 단순한 대화나 하느님께 단순한 현존하는 것이 자주 실제로 불가능하게 된다. 고도화된 어휘적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수많은 구분을 가능하게 하지만, 때때로 이런 현상은 생명이신 말씀에 대한 올곧은 투신을 초라하게 대체하는 것에 불과하다.

신학 교육에서 위기가 있다면 그것은 먼저 무엇보다도 말의 위기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비판적인 지적 작업과 섬세한 분별이 신학적 훈련에 필요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세계는 거룩한 말씀 안에서 그리고 말씀을 통하여 창조되고 구원되었는데, 우리의 말이 그 말씀을 더 이상 반영하지 않을 때, 그 말은 기반이 되지 않고 약을 팔기 위한 선전말 처럼 유혹적이며 잘못 인도하는 말이 되고 만다.

신학 교육의 확실한 장소가 수도원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말들은 침묵으로부터 나왔고 사람들을 더 깊은 침묵으로 이끌 수 있었다. 이제 수도원들은 더 이상 신학 교육의 대중적 장소가 아니지만, 침묵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신학 교육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영원한 침묵에서 나오며, 우리가 증언하려는 것은 바로 이 침묵에서 나오는 말씀이다.

헨리 나웬의 <마음의 길>에서

* 이 글은 1998년 미국 메리놀 출판사 올비스에서 출판된 <Henri Nouwen>(Robert A. Jonas 구성)을 부분적으로 옮긴 것입니다.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04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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