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밑바닥에서 오히려 행복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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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밑바닥에서 오히려 행복한 교회
  •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7.01.16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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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와 요한의 복음서-4

예수님께서는, 신학적 용어로 “과월절 신비”로 불리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 말을 듣지만 최초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무슨 뜻인지 묻지않는다. 그 말이 정말 종교적이며 막연한 무엇을 뜻한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안전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저 그분과 우리의 삶에 관해 말씀하신다. 그분은 그분의 독특한 삶에 이르는 길은 우리의 일상적인 종류의 삶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과월절 신비는 죽음을 통해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는 경험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 식의 삶이 인간의 기준으로 볼 때 역설적임을 인정해야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예수님이 이끄시는 길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가려고 하는 길이 아니다. 다음 장면에서 마르코는 이 점을 분명히 한다:

그들은 가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께서는 집에 들어가시자 제자들에게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은 길에서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가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기 때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예수께서는 자리에 앉아 열두 제자를 곁으로 부르셨다. 그리고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설명하셨다. (마르코 9,31-35)

섬기는 꼴찌가 구원된다...그래서 좁은 문

열두 제자와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첫째가 되기를 원하나 예수님께서는 밑바닥에서 행복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신다. 우리는 최고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나 그분은 우리가 종이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어른이 되고 존경받기를 원하나 그분은 어린아이 같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많은 것을 성취하고 싶어하나 그분은 우리가 많이 받을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르코 10,15)

이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 것 같이 보인다. 그래서 마르코는 여기에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끼어 넣는다. 그는 좋은 사람이다. 그는 계명을 다 지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재산을 포기하라고 하셨을 때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재물이 하느님 나라의 풍요로움을 경험하는데 얼마나 걸림돌이 되는 지를 지적하신다. 가끔 종교도 자기포기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의 소유물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 자신을 내어놓으라고 하신다. 불행하게도 그 젊은 청년은 돌아가 버린다. 부자들, 종교인들, 오만한 사람들은 자신을 포기하는 것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굉장히 위험한 삶의 방식이라고 말씀하신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마르코 10,25)

생명에 이르는 길은 험하고 좁은 문을 통과하여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당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자들에게 다시 말씀하신다: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유대 지도자들 손에 넘어가 사형선고를 받고 로마인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을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고 마침내 죽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날것이다." (마르코 10,33-34)

여러분은 제자들이 이제는 그 뜻을 알기 시작하였을 것이라고 생각 할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그들은 어리석다. 그들은 과월절 신비에 대해서 들었으나 그 의미를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같이 어리석다. 제자들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야고보와 요한은 순진하게도 주님께 청을 한다. 그들은 예수께서 메시아 왕국을 세우시면 그분의 옆자리에 앉는 영광을 달라고 한다(마르코 10,35-37).

예수의 한숨 소리

그분이 그들의 요청을 들으실 때 여러분은 예수님의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한숨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 무지한 열두명의 남자를 참을성 있게 계속 사랑한다는 것이 그분께 얼마나 고통이셨겠는가! 그들에게는 그분이 말씀하시는 영성적 실제에 관한 의식이나 그분이 선포하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깨달음이 없었다. 그래서 그분은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단 말이냐?"(마르코 10,38)

예수님께서는 고통받는 종이라는 당신의 현실로 그들을 불러오려고 하신다. 그분은 당신이 마셔야 하는 고통의 잔, 받으실 고통의 세례에 관해서 말씀하신다. 그분은 하느님 나라로 가는 유일한 길인 고통을 암시하신다.

다른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이 요청하는 것을 들을 때 화가 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앉히시고 설명을 하신다:

"너희가 알다시피 이방인들의 통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또 높은 사람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가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겨야 한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모든 사람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그의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르코 10,42-45)

만일 교회가 지난 2000년 동안 철저하게 예수님의 하향 지향성을 공유 했었더라면! 만일 우리가 그분을 진지하게 믿기만 했다면, 우리는 훨씬 더 빨리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우리가 참으로 복음에 귀를 기울였다면 서양의 역사가 얼마나 다르게 펼쳐졌을까! 대신 우리는 하느님과 교회의 이름으로 권력, 권세, 소유와 아주 쉽게 친구가 되었다.

그 많은 조직들이 교회를 구원할까?

우리는 그리스도 이름을 이용하고 우리가 하는 일에 근사한 신학적 용어를 붙인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우리는 정부나 기업이 하는 식으로 교구나 본당을 운영한다. 우리는 기금 조성자, 전략가, 연설가들이 하는 일을 한다. 비록 하느님께 도와 달라고 기도를 하지만 계획을 잘 세우고, 열심히 일하거나 신학적 이유, 효율성, 그리고 조직들이 교회를 구원할 수 있을 것 같이 행동한다.

그러나 고통받는 섬김의 길만이 교회를 구원 할 것이다. 신앙의 길만이 믿음의 공동체를 세울 것이다. 다른 쉬운 길이 없다. 다른 세상적인 방법이 없다. 자신을 비우고 작은 사람들이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만이 믿음의 공동체를 세우는 유일한 길이다. 예수를 우리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예수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교회의 마음이며 영혼인 하느님 나라를 결코 알지 못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가치 위에 세워진 믿는 이들의 연대망에 일원이 되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소속되고, 참가하고 기부를 했으나 결코 진정으로 새롭게 살지 못했다. 그들의 삶은 세상 속의 삶에 대해 진정한 대안이 되지 못했다.

하느님 나라가 오는 곳에 교회가 살아난다

하느님 나라는 올바른 관계가 이루어 질 때 온다. 먼저 매일 개인적인 기도시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있을 때 그 나라가 온다. 사람들이 제자가 되라는 그리스도의 부름을 들었을 때에, 또 성서 속에서 그분의 말씀을 읽는 사람들, 마음으로 그분의 말씀에 응답하는 사람들, 예수께서 가르치고자 했던 것들을 배우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그 나라가 온다. 그 나라는 그분을 따르는 것이 무슨 뜻인지, 과월절 신비대로 사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수년간 주님께 배운 후에 온다.

둘째, 하느님 나라는 다른 사람들과 서로서로 개인적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있을 때 온다. 그들은 어떤 역할을 해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선생, 학생, 사목자, 본당신자, 성직자와 평신도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서로 웃고 울고, 서로 돕고, 서로 상대방의 짐을 나누는 서로 서로에게 진정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서로에게 정직하고 질문과 의문을 공유하고, 다른 이들과의 경험에서 또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서부터 배운다.

하느님 나라는 결코 완성된 모습으로 오지 않으나 종종 하느님 안에서 사는 사람들과 찬미드릴 때 권능과 영광으로 온다. 또한 때때로 서로가 하나되는 순간에, 사람들이 다른이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도움을 줄 때, 서로의 다른점을 극복하고 용서를 경험할 때 하느님 나라는 온다. (우리의) 새 예루살렘 공동체에서도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것을 아는 순간,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서 역사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성령 안에서 살게 해주신다는 것을 아는 순간,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강해지고 치유되는 것을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를 한 머리로 하고 한 몸으로 결합되는 순간, 우리는 교회가 무엇인지를 경험으로 알게된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속해 있는 더 큰 교회의 마음과 영혼과 교감을 갖게 된다. 우리는 교회가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너무 잘 안다. 그러나 교회는 하느님이 살아나는 곳에, 하느님 나라가 올 때마다 그곳에 있다. 또한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오는 곳이면 어디든지, 언제든지 교회가 살아나는 것을 보아왔다.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신약>,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참사람되어 2000년 7월호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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