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으로 인도되는 혁명적 실천 또는 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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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으로 인도되는 혁명적 실천 또는 그 사람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4.07.08 12: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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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없는 진보], 김상봉, 온뜰, 2024.

파커 파머는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글항아리, 2012)에서 민주주의의 근간은 “마음의 습관”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른바 ‘마음공부’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매사를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에서 다루는 것을 비판하며, “자아와 세계를 이해하는 모든 것이 마음이라고 불리는 중심부에서 하나가 될 때, 우리는 자신이 아는 바에 따라 인간적으로 행동할 용기를 찾는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파커 파머가 말하는 용기는 거대한 권력에 맞서는 기백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합니다.

“온갖 절망적인 상황에서 마음이 무너지고 부서질 때, 체념하지 않고 자아의 중심을 붙들 수 있어야 한다. 엄습하는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해 맹목적인 집단 숭배에 열광하거나 사적인 안위와 소비주의에 탐닉하지 않고, 내면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응시해야 한다. 그래서 당위와 현실 사이의 비극적 간극을 가슴에 품고 견디는 ‘비통한 자들’(the broken-hearted)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부서져 흩어지는’(broken apart) 것이 아니라 ‘부서져 열리는’(broken open) 마음이 요구된다. 선악의 구도가 명확하지 않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그 ‘애매함’과 ‘긴장’을 끌어안아야 한다.”(파커 파머, 21쪽)

이 글을 읽으며 가혹한 현실에서도 꿈을 꾸려고 하는 예언자적 인간이 주춤거리고 있는 모습이 연상됩니다. 이는 집단적 광기나 달콤한 개인주의에 현혹되지 않으려는 안간힘이겠습니다. 사랑하려면 ‘상처받을 용기’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상처받을까 두려워 사랑하기를 주저하는 사람들에게 파커 파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아마도 그 부서져 내리는 사람들의 상처를 감당하며, 그 상처 안에 아직도 그대로 머물러 있는 이들에게 마음을 열고 진입하려는 사람들을 응원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투신은 사회과학적 분석의 결과가 아니라 영적 식별의 결과입니다.

영성, 세계와 하나인 나

우리 사회에서 예언자적 실천에 나서는 진보진영을 향해 파커 파머와 다른 방식으로 말을 건네고 있는 사람이 전남대학교 김상봉 교수입니다. ‘각자도생’이라고 불리는 개별적 삶이 중요한 우리 시대에 민주주의란 이해관계에 따른 거래와 흥정이 대상이 된 지 오래입니다. 1987년 유월항쟁 이후에도 촛불민주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명박과 박근혜, 윤석열 같은 이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자기중심적 민주주의의 결과입니다. 김상봉은 <영성 없는 진보>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참된 위기는 자기 자신이 세계 전체와 하나라는 영성이 이 나라의 진보 진영에서 거의 사라져 버린 데 기인한다.”고 말합니다.

“불의한 역사 속에서 상처받고 죽어 가는 이들이 그 수난 속에서도 기꺼이, 기뻐하며 미래의 역사를 위해 자기를 던질 수 있는 것은 한낱 개별자인 자신이 세계와 역사, 아니 존재 전체와 하나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 믿음에 따른다면, 자기와 전체가 다른 것이 아니므로, 전체를 위해 기꺼이 죽는 것은 자기를 영영 버리거나 잃는 일이 아니라, 자기 속에서 전체를 살려, 전체 속에서 자기를 온전히 되찾는 일이다. 그러므로 현실이 아무리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그 믿음이 살아 있는 한, 주체는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위한 길에 자기를 던질 수 있다.”

그런데 ‘대상세계와 나 자신이 하나’라는 것은 이성이 인식하거나 증명할 수는 없는데, 그것은 “이성을 넘어선 영성의 일이며 믿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김상봉은 세계가 나 아닌 타자일 때, 그것은 “인식과 형성의 대상”이지만, 세계가 나 자신과 하나일 때는, “내가 아끼고 돌보고 책임져야 할 사랑의 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이럴 때 발생하는 사랑이야말로 “죽음을 무릅쓰고 악에 맞서는 희생과 용기 그리고 헌신의 근원”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런 사랑을 발생시키는 믿음과 영성이 고통 받는 세계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고 현실의 악에 저항하고 새로운 세계를 개방하려는 실천으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이러한 실천은 동학농민혁명 이후 3·1운동에 이르기까지 조선 땅에서 혁명적 열정이 종교적 믿음에 의해 추동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시 조선 민중이 불의한 세계를 폐하고 새로운 세계를 개방하려는 노력은 자칫 맹목적인 어리석은 일로 치부될 수 있겠지만, 믿음과 영성의 차원에서는 “불가능에서 가능성을 기투하는 창조적 행위”가 됩니다. 그러나 김상봉은 이런 조선의 영적 전통이 3·1운동 이후에 쇠퇴하고, 종교는 보수화되었으며, 새롭게 등장한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은 믿음이나 영성과 무관한 세속주의적 실천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일제 말기 태평양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제의 지배가 더 야만적으로 변해 갔음에도 거기 저항하는 대규모 봉기가 없었던 것은, 이른바 민족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분열과 반목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와 공산주의 세력의 분열에 원인이 있다고 김상봉은 이야기합니다. 제주 4·3사건과 한국전쟁을 “혁명을 포기한 종교와 처음부터 영성이 없었던 혁명운동의 적대적 충돌”이라고 해석합니다. ‘나와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나 아닌 타자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곳엔 나와 다른 타자에 대한 사랑, 원수에 대한 사랑 그리고 세계에 대한 사랑 같은 것이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전태일
전태일

전태일의 그리스도교적 사랑

김상봉은 대중의 참여를 견인한 진보적 민중운동이 다시 시작된 계기를 ‘1970년 전태일의 분신’에서 찾습니다. 이 사건에서도 오래 은폐되어 있었던 것은 전태일이 “독실한 그리스도교인이었으며, 그를 분신으로 이끌었던 것은 계급 의식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사랑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전태일의 삶과 죽음에 대해 조금이라도 감동한 사람이라면, 초등학교조차 마치지 못한 가난한 청년이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놀라운 정신의 불꽃을 피워 올릴 수 있었는지 그 정신적 배경을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일은 결국 정신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전태일을 전태일 되게 만든 것은 자기 개인의 가난과 고통이 아니라 세계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자아의 경계는 고통의 경계와 같다고 합니다. 자신의 피부가 자기가 느끼는 고통의 경계인 사람에게는, 자신의 신체가 곧 자아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낄 때, 내가 느끼는 고통의 범위가 확장되는 만큼 나의 자아도 확장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내가 고통을 느끼는 대상이 확장되는 만큼 나의 존재, 나의 세계가 확장됩니다.

전태일에게 타인은 자기와 상관없는 타자가 아니라, “나의 전체의 일부”였고, 결국 “또 다른 나”였습니다. 그러므로 전태일은 자신의 일부인 “또 다른 나”의 고통에 응답했을 것입니다. 결국 “세계와 내가 하나”라는 믿음 속에서 타인의 고통은 전태일의 고통이 된 것입니다. 전태일이 독실한 그리스도교 청년이었다는 점에서, 1970년대에 도시산업선교회와 가톨릭농민회 등 천주교와 개신교가 전태일의 죽음에 응답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처럼 종교적 교리에 갇히지 않는 영성이 ‘사랑’입니다. 기성종교를 통해서, 또는 그 종교의 당파성을 넘어서 사랑하자는 게 영성입니다.

서준식, 예수 같은 사랑

서준식
서준식

김상봉은 또 다른 사례로 서준식을 꼽습니다. <서준식 옥중서한 1971~1988>(노사과연, 2015)을 보면, 17년 동안 감옥에 갇혔던 서준식은 예수의 삶에 매료되었습니다. 서준식은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베르댜예프를 반추하지만, 그 모든 사람을 합치더라도 예수 한 사람에 견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서준식은 복음서를 “내 생각에 그것은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직접적인 구원의 말씀으로서 가치가 있다기보다는, 인간 해방을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많은 괴로움에 대한 구원의 말씀인 것 같다.”고 합니다.

서준식은 ‘주여! 주여!’ 하면서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눈으로 복음서를 읽지 않고, 예수와 같은 방식으로 살려는 사람의 시선으로 복음서를 읽었습니다. 그에게 복음서는 자신처럼 고난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구원의 말씀이 된 예수를 밝히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가 짊어지고 매달린 십자가는, 이 불의한 세계에서 사랑이 겪지 않을 수 없는 끔찍한 고난의 증거이다. 그러니까 예수처럼 인간을 사랑하는 사람이 고난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든 상처받는 것이다. 무한한 사랑은 무한한 상처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감옥에 갇혀야 했던 서준식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상처받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사랑과 고난 그 자체가 사랑 때문에 상처받은 모든 사람에게는 위로이다.”

하지만 예수를 신으로 고백하지 않는 서준식은, 고난에 따른 부활 같은 신의 보상에서 구원을 찾지 않았습니다. 앙드레 지드(Andre Paul Guillaume Gide, 1869~1951)가 <좁은 문>에서 말했듯이 참된 사랑이 원하는 것은 보상이 아니었습니다.

“아니야, 제롬, 아니야. 미래의 보상을 위해서 우리가 덕을 쌓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니야. 우리의 사랑이 찾고 있는 것은 보상이 아니야. 자기 고통에 대한 보상이라는 생각은 고귀하게 태어난 영혼에게는 모욕적인 말이야. 덕이란 그런 영혼을 위한 장신구가 아니야. 그것은 그런 영혼이 지니는 아름다운 형식인 거야.”

사랑하면서도 보상을 기대하는 속물적 가치관은 예수의 것도 서준식의 것도 아니었다고 김상봉은 말합니다. 서준식이 예수에게서 발견한 것은 “예수가 보여준 사랑 그 자체의 완전성 때문”이었습니다. 완전성이란 “모든 것은 사랑에서 우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준식은 “예수의 권력에 대한 항거는 소외되고 약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난 것이지, 결코 특정 이데올로기나 체제 수립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사랑 없는 증오

예수의 분노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속류 혁명가들은 “사랑 없는 증오”에 몰입한다고 서준식은 비판합니다. 그들은 참된 사랑 없이 “공허한 이론과 기술만으로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 보겠다.”고 공언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다른 이들보다 악하거나 어리석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들의 운동 원리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모든 혁명가에게는 아름다운 이상이 있다. 짓밟히고 고난당하는 인간들의 인간 회복, 그리고 인간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아름다운 유토피아, 이런 것들이 그들을 한낱 전사나 정치꾼으로부터 구별하는 징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세계는 각박하고 무자비하다. 그래서 이상과 열성만으로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라는 토대 위에 고도로 효율이 발휘되도록 짜여진 조직적, 기술적, 전술적 원칙이라는 건조물이 세워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렇게 세워진 건조물이란, 그것이 부단히 튼튼하게 입각해 있어야 할 토대로부터 유리되고 겉돌아 그 자체로 ‘자율적으로’ 작동하는 경향이 있다. 그럴 때 혁명가의 삶은 다만 비정하고 참을 수 없이 왜소한 한낱 기술적인 것이 되어버리기 마련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은 후퇴하고 혁명가는 전사나 음모적인 정치가로 타락한다.”

그렇다고 불의에 대항해서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싸웠던 그 사람들과 그들의 시대에 대한 감사와 존중의 감정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김상봉은 말합니다. 그들의 희생이 아니라면 이만큼의 민주주의도 우리가 누릴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악과 싸우기 위해 사랑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조직과 규율이 필요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승리와 성공에 대한 열망이 인간 개개인에 대한 사랑을 삼켜버리고, 고통 받는 인간을 구하기 위해 정립된 제도 그 자체가 물신화되어 억압기제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는 속류 혁명가들이 빠지기 쉬운 위험에서 구원할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예수는 “인간 개개인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에 굳건히 발 디딜 것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는 무조건 쉬라고 가르친 율법도 처음에는 약자들을 위한 해방의 규범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시대에는 안식일에도 일해야 먹고사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서준식은 예수를 통해 “모든 이념이 자율적인 것이 되어 버릴 때, 그것이 인간을 얼마나 무자비하게 억압하는지” 깨달았습니다.

역사에 대한 믿음

여기서 김상봉은 굳이 한 개인의 구원이나 영생에 관한 믿음을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 믿음은 모든 종교가 약속하기 때문이고, 그런 믿음은 세상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싸구려 장신구 같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런 믿음은 세상의 고통으로부터 자신만 벗어나려는 이기적 욕망의 표현이며, 그런 신앙이 이 세상에 아무리 넘친다 한들 이 세상을 고통에서 구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김상봉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역사적 종교임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역사와 유리된 신앙이란 허망하고 하찮은 것이라 여깁니다. 그리고 역사적 믿음이란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을 소망하는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역사에 대한 믿음이란, 역사가 우연도 맹목도 아님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에 뜻이 있음을 믿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일어난 다른 모든 일을 우리가 정당화하고 그 의미를 말할 수 있다 할지라도, 누가 감히 그 속에서 무고하게 흐른 피눈물의 의미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역사에 대한 믿음이란, 사실 불가능한 믿음이다.”

그래도 그 불가능한 것을 믿는 게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역사에 뿌리를 박은 믿음은 어쩌면 그 속에서 스스로 믿음의 모범이 된 사람들이 선구적으로 보여주었던 그런 믿음일 것입니다. 이를테면 “최제우와 한용운과 전태일의 하느님,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이 미래로부터 우리에게 도래하는 새로운 하느님일 것이다”라고 고백하는 게 옳다고 말합니다. 아직 어두운 밤이지만, 머지않아 그런 신새벽의 사람을 통하여 새벽이 오리라는 믿는 게 신앙이라고 전합니다.

 

우리 믿음의 뿌리와 민주주의

다시 현실로 돌아와 생각합니다. 김상봉은 “시민의 정치적 관심이라는 것이 당파적 이익에 대한 관심을 넘어서지 못하다 보니, 한국의 민주주의 자체가 위기에 처해 있다.”고 말합니다. “나라야 어찌되든, 내 편이 권력을 잡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이 한국인들의 평균적 정치의식”이라는 것이지요. 김상봉은 그 원인을 살피면서, 한국정치의 파행은 “영성의 부재”에서 왔다고 해요. 다른 식으로 말하면 “믿음이 병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치료제가 있냐는 것입니다. 김상봉은 우리 운동이 벌거벗은 ‘세속주의’를 벗어나야 한다고 다짐합니다. 운동의 영적-종교적 원천을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김상봉이 말하는 영성이 “나와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이며, 이를 두고 오구라 기조(小倉紀藏)의 <조선사상사>(길, 2022)의 표현대로 ‘조선적 영성’이라고 부릅니다. 그에 따르면, 조선적 영성은 신라의 고승 원효의 ‘일심’(一心)에서 퇴계 이황의 ‘천인합일’(天人合一)이나 수운 최제우의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다)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내려온 한국사상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합니다. 표현은 다를지라도 “하느님의 마음이 곧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라는 그리스도교적 관점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1980년대의 가혹한 광주학살의 경험을 통과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봇물처럼 운동을 잠식하면서 영성 없는 진보운동이 가속화된 것이 우리 민주주의의 비극입니다.

그 후로 격렬한 투쟁으로 형식적 민주주의를 성취했지만, 그 형식을 채울 영성이 부재한 상태였습니다. 어찌 보면, 노무현과 노회찬의 죽음이 그 믿음의 마지막 불씨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후 각박하고 지지부진한 진보정당의 민낯이 드러나고, 나 없이 너를 살리는 운동이 사라진 것은 영성의 결핍 때문입니다. 이른바 적당히 효율성을 추구하며 시민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지식인들이 범람하고, 여전히 바닥에서 헌신하고 있는 활동가들은 정치권 밖에서 고투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형식적 좌파가 돈이 되는 나라, 급진적 운동은 여전히 배고프고 환영받지 못하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김상봉은 ‘영성 없는 진보’의 얼굴을 드러내며, 우리에게 ‘믿음’을 다시 찾으라고 안타깝게 읊조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와 서준식과 전태일이 다시 절실히 그리운 까닭이 여기에 있을 겁니다. 그러니 다시 그분들의 이름을 호명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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