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은 염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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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은 염치가 있다
  • 최태선
  • 승인 2024.07.08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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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얼마 전 나는 시장에서 만났던 폐지를 수거하는 할머니에게 모아둔 깡통을 드리기 위해 전화번호를 가르쳐드린 후에 우리 집으로 한 번 오시라는 부탁과 함께 우리 집의 위치를 알려드렸다. 그분은 정확하게 우리 집 위치를 아신다. 하지만 그분은 지금까지 오지 않고 있다.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다. 물론 우리 집이 좀 거리가 있고, 언덕에 위치한 탓일 수도 있지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 오기 전 나는 거리에서 폐지를 수거하는 한 할머니를 발견하고, 그분에게 모아두었던 깡통을 가져가시겠느냐고 물었다. 폐지 수거하시는 분들에게 깡통은 ‘왕건이’다. 비교적 값이 나가기 때문이다. 그분은 카트를 끌고 우리 집까지 따라 오셔서 깡통을 받아가셨다. 그때도 전화번호를 나눈 후 그분을 만나 깡통은 물론 쌀이나 다른 물품들을 드리며 약간의 돈도 드리곤했다.

그렇게 사귐이 이어진 후 우리가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분이 우리가 신고를 하고 돈을 낸 후 버려야 할 물건들을 버려주셨다. 자기는 그런 것들을 버릴 수 있는 곳을 안다고 했다. 나는 일부러 팔 수 있는 것들을 가능한 많이 포함하여 그런 물건들을 내다 놓았고, 그분은 말없이 그것을 가져가셨다. 이사하는 마지막 날까지 그랬다. 나는 이사하기 전날 그분에게 만나자는 전화를 드렸다. 그러나 그분은 해야 할 일이 있다면서 다음에 만나자고 했다. 내가 그분을 만나려던 이유는 그분에게 돈을 주고 버려야 할 물건들의 돈의 합보다 조금 더 많은 돈을 그분에게 드리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 날 바쁘다고 나를 만나지 않던 그분은 이사한 후 연락을 드려도 나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결국 하루는 그분이 나를 만나지 않으려 하는 이유를 알려주었다. 그동안 너무 고마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선생님 같은 분은 없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은혜를 갚은 것이라며 돈을 주려는 내 마음을 알지만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그렇게 그분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나는 지금도 가끔씩 그분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다. 지금은 남편이 몸이 편찮아 원주로 이사를 가셨다.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시라는 내 말에 고맙다는 말은 하지만 연락을 해 온 적은 없다. 통장번호라도 가르쳐달라는 내 부탁에는 여전히 반응을 하지 않고 있다.

내가 그분에게서 발견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염치다. 염치란 체면을 생각하거나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다. 이 마음이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있다. 그렇다. 가난한 사람들은 염치가 있다. 그래서 남이 주는 것을 받긴 하지만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고맙게 여긴다. 무엇으로라도 받은 것에 보답하려는 노력을 하기도 한다. 나는 그분을 통해 염치란 것이 무엇인가를 뼈에 아로새겨질 정도로 확인했다.

그리고 얼마 전 만난 그분 역시 염치 때문에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분들은 재활용 쓰레기봉투에서 깡통 몇 개를 발견하면 눈이 번쩍 뜨인다. 그런데 모아 놓은 깡통을 마다할 리가 없다. 다만 그분의 염치가 내게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럴 때는 내가 전화를 드려야 한다. 수일 내로 전화를 드릴 요량이다.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염치가 있고, 부자들에게는 몰염치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하다. 부자들은 겉으로 보면 교양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해관계가 상충되어 보라.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이익 앞에서 그들에게는 염치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가난하다. 그중 권정생 선생은 유별나다. 그분은 2007년에 돌아가셨다. 임종 당시 그분의 통장에는 십억 원이 있었다. 당시 십억은 오늘날 십억과 비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분은 거지로 사시다 거지로 돌아가셨다.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다. 그분이 거지로 살기로 작정을 하고 그렇게 사셨기 때문이다.

“권정생에게 예수는 자신이 거지로 떠돌 때 친절을 베풀어준 사람에게서 거듭 새삼 부활합니다. 그들 모두는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하지만 아름다운 마음을 지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중에 권정생이 작가로 유명해져서 인세가 들아오고 형편이 나아졌지만, 그 돈과 상관없이 권정생은 내내 죽을 때까지 ‘거지처럼’ 살았습니다. 남루한 옷을 입고 헐한 옷을 입고 병고에 시달리며 … 그래도 아름다운 동화, 아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글을 썼습니다. 그에게 들어온 돈은 다른 가난한 이들과 굶주리는 북녘어린이들에게 가고, 그분은 평생 거지로 남은 채 돌아가셨던 것이지요. ‘오늘 하루 필요한 양식을 달라던’ 주님의 기도가 권정생에게서 성취되었던 것입니다.”(한상봉님 글에서 인용)

실제로 거지로 살기도 했던 권정생 선생은 나자로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설교를 듣고, 평생을 거지로 살기로 했고, 실제로 거지처럼 살다 돌아가셨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네가 살아 있을 동안에 너는 온갖 호사를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 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로 건너가고자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에게로 건너올 수도 없다.'”

우리는 이 기사에서 부자가 지옥에 가고, 나자로가 천국에 간 이유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부자는 세상에 살면서 온갖 호사를 누렸다. 나사로는 세상에 살면서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 그것이 이 둘의 죽은 후의 향방이 달라진 이유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온갖 호사를 누리려는 사람들은 있지만 누구도 온갖 괴로움을 다 겪으려는 사람은 없다. 이 너무도 분명한 현상에 대해 궁금해 하는 이도 없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없다. 모두가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 하느님의 은혜라던가, 부요하신 하느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가난하게 살 수 있겠느냐고 말하면서 고민하지 않고 세상에서 온갖 호사를 누리기에 여념이 없다.

이것을 지적하는 일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제발 정신을 차릴 수 있기를 바란다. 도대체 교회를 나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한 천주교 신자에게서 들었던 것처럼 “ 다 나 잘살자고 믿는 것”인가. 그들이 확신하는 구원이 대체 무엇인가.

권정생 선생이 깨달은 것은 헛것이 아니다. 그분은 깨달아야 할 것을 깨달았고, 깨달음대로 살았다. 나는 그분이 나사로처럼 아브라함의 품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 사실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일깨우는 것을 내 사명으로 삼았다.

그 말을 하려면 내가 먼저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거지목사”라는 글을 쓴 적이 있고, 얼마 전까지 내 이름을 검색하면 그 글이 가장 먼저 떴다. 나는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님은 내가 “거지목사”라는 사실을 흡족해하신다.

예수님은 거지셨고, 거지들은 물론 거지들을 돕는 사람들을 통해 계속해서 부활하신다. 그렇게 자주 부활하시는 그분을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는 것은 불행이 아니라 ‘폭망’이다.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은 그렇게 ‘폭망’했다.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이 말씀이 자신에게 실존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면 누구건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거나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나는 자주 내가 부자라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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