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기도할 것인가, 행동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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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기도할 것인가, 행동할 것인가
  • 머레이 보도
  • 승인 2016.11.28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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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으로 기도에 몰두해야 하는지 아니면 마찬가지로 설교하는 것에도 자신을 바쳐야 하는지 의심하는 프란치스코의 이야기가 있다. 삶의 다른 모든 중요한 결정들처럼, 프란치스코는 자기의지와 자기기만의 위험을 깨닫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충고를 구한다. 그는 하느님의 뜻이 명확해지도록 기도 속에서 주님께 여쭈도록 하기 위하여 마세오 형제를 실베스터 형제와 글라라에게 보낸다.

<성 프란치스코의 작은 꽃>이란 책에서 발췌한 이 이야기의 초점은 모든 이가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는데 있어 직면하는 환상이다. 즉 그 환상의 내용은 순수한 정신의 삶이 육화적인 삶보다 어떻든 완전하므로, 다른 이들의 삶들에 관계하는 일 보다 오직 기도 속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도의 삶이 환상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만일 기도의 삶이 실제로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복잡함으로부터 도피가 된다면, 그때 나는 상처를 주거나 받지 않을 수 있는 안전한 작은 모퉁이에서 나의 삶을 격리시키려고만 하게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실베스터와 성 글라라에게서 오는 답변은 프란치스코가 사람들에게 설교를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프란치스코가 온전히 기도 속으로 들어가 있을 때조차도, 나는 그가 결국엔 사람들에게 설교를 계속 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 이유는 진실한 기도가 결코 자기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하느님께 중심을 두는 것이기 때문이고, 하느님의 얼굴은 내자신의 진실한 얼굴을 나에게 보여주는데, 하느님께서는 나의 가장 깊은 중심으로부터 이 얼굴을 이끌어내신다. 그리고 프란치스코의 진실한 얼굴은 가난하고, 돌아다니며, 모든 피조물에게 설교하는 형제의 얼굴이다.

나의 견해로 보면 실베스터와 글라라의 충고를 청했을 때 프란치스코는 이미 하느님의 대답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설교가 단순히 하느님의 사랑 안에 그의 사랑의 삶을 고립시키려는 있을 수 있는 이기적인 소망에 대한 반작용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프란치스코는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자마자, 즉시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새들에게도 설교를 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모든 피조물과 그 사이의 연관성을 상징해준다. 하느님께의 상승이 피조물 속으로의 하강으로 시작되는데, 모든 피조물들의 형제와 자매가 되고 그들을 통하여 하느님을 찬미함으로써 사람은 모든 피조물의 구속에 참여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기도의 정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통하여 그리고 그것들을 위하여 하는 흠숭이다.

이런 방식으로 프란치스코는 기도와 사랑을 결합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입는데, 그리스도께선 창조물 안으로 먼저 내려가시고 또한 우리가 어떻게 성부 아버지께 돌아가야 하는가를 보여 주시는 모형으로서 우리의 인간성을 그분 스스로 취하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인격적인 체험뿐만 아니라 예수의 삶으로부터 프란치스코는 피조물을 통하는 길이 얼마나 번거롭고 성가신가를 알고 있다.

그 길은 당신이 지닌 에너지의 계속적인 고갈, 사람들과 상호관계를 맺는데서 오는 복잡함, 사랑하던 사람들의 죽음의 아픔과 친구들에 의한 배신을 포함한다. 인간적인 차원이 너무도 압도적이 되어가기 때문에 당신은 당신 주위에 있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가면들 뒤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다. 그러면 당신은 “왜 당신께서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물으며 울부짖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이 반격할 수도 없이, 오직 하느님께로 이르는 길에 승복할 수밖에 없이, 하느님의 아들께서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는 전적인 부서짐으로 이끈다. 당신은 당신의 십자가위에 매달려있다. 그것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고 성부께로 올라가신 인간성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우리의 인간성인 것이다.

악은 우리로부터 분리된 어떤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추락 때문에, 우리 안의 어떤 것이 우리의 고통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가 우리의 수난을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행동이며, 포옹하기엔 너무도 많이 상처를 입은 인간성을 통한 거룩한 흠숭의 행동으로 내어놓을 때 구속적인 것이 된다. 그것이 성 프란치스코의 길인 기도이며 행동이다.
 

<출처> 머레이 보도의 <성 프란치스꼬의 길-모든 이에게 도전하는 프란치스꼬의 영성>, 참사람되어 2002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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