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말하는 예수, 반말하는 사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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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말하는 예수, 반말하는 사제들
  • 한상봉
  • 승인 2016.11.01 17: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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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퇴근길에 아파트에서 엘리베이터를 타자하면 늘 누군가 있는지 습관처럼 미리 살피게 된다. 좁은 엘리베이터에서 여자 분이라도 있으면 시선 처리가 좀 불편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있으니 한 걸음 늦추어 기다렸다 타곤 했다. 물론 내려갈 때는 오는 대로 탄다. 그러던 어느 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초등 3학년 정도 됨직한 아이가 큰 가방을 등에 메고 서 있다. 얼굴은 통통하고 까무잡잡한 게 건강해 보였다. 아이는 내가 오르자 곧 바로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였다. 모르는 아이였는데, 기분이 좋아졌다. “학교 가세요?” 내가 물었다. “예!” 이윽고 문이 열리고 곧이어 아이의 음성이 들렸다. “안녕히 가세요!” 참 행복한 아침이었다.

길을 걷다가 길을 묻는 어느 노인이 볼이 빨간 중학생에게 “주민센터가 어디있죠?” “고맙습니다~.” 노인들이 어린 친구들한테 점잖고 공손하게 길을 묻는 장면을 볼 때마다 잠시 울컥 할 정도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은 ‘언어’로 가장 먼저 드러난다. 나이와 상관없이 저절로 존댓말이 나오는 세상은 아름답다.

백남기 농민 농성장에서 벌어졌던 이야기 한 토막이 생각난다. 얼마 전 <청소년신문>에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농성에 참여하던 청소년들을 인터뷰하였다. 청소년녹색당에 소속된 탈학교 청소년들이다. 이들은 농성장에서 “학교 안 가고 뭐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고 했다. 밥 먹으러 갈 때도 “왔어, 아들?” 이런 식으로 얘기하고. “어른들이 반말을 너무 많이 해서 <반말하지 마세요!>라는 팻말을 써서 붙이고 다녀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아울러 남성이고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관리자인 것처럼 행동한다고 비판했다. 이불이나 그런 것도 처음 보는 사람한테 “야 그거 내꺼야!” 이런 식으로 말하고. “농성장에 자기 물건이 어디 있어요, 다 공유하는 건데!”라고 야무지게 말하는 이 청소년들은 ‘좋은 일 하자고 모인’ 농성장에서조차 자신들이 어리다고 존중받지 못하는 사실에 화가 나 있다.

사진=한상봉

그럼 성당에서는 어떤가? 먼저 2005년 번역본 <성경>부터 이야기해 보자. 여기서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반말을 한다. 심지어 빌라도 총독이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묻자, 예수님은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당돌하게 말한다. 한편 당대 최고권력자인 대사제와 총독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다. <성경>이 ‘경전’이라서 그리 번역했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이런 번역은 <성경>을 읽는 신자들에게 자칫 종교적 권위를 지니고 가르치는 예수님을 상당히 무례한 사람처럼 보이게 한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좀 묘한 상황이 연출되는 것에 정당성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

흔히 교회 안에서 사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취급된다. 이에 합당한 대접과 환경이 사제들에게 제공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제가 초라해 보이면 예수님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 같아 신자들의 마음은 안쓰럽기 마련이다. 사제는 예로부터 ‘탁덕’(鐸德)이라 불렀다. “덕을 행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사제가 ‘나이와 상관없이’ 평신도 어르신들에게 쉽게 반말을 내어놓는 것을 볼 때가 있다. 하긴 안중근 의사는 본당사제였던 빌렘 신부에게 매도 맞았다고 하니, 사제들의 위세가 복음서의 대사제나 총독만 했던 것 같다. 신자라면 늘 읽어야 하는 <성경>에서 예수님도 아무한테나 반말을 하고 있으니 사제들의 무례한 처신에도 따지기 어렵다. 물론 지금 한국교회에서 사제들의 위세는 많이 수그러진 상태이고, 심지어 사제를 아예 능멸하는 신자들도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겸손'을 더 많이 배워야 할 사제들이 많다.  

중요한 것은 상호존중이다. 분도출판사에서 나온 200주년 기념 번역본 <신약성서>에서는 예수님께서 누구에게나 존댓말을 쓰고 있다. 심지어 대사제와 총독이 반말로 심문하는데도 그들에게 존댓말로 응수하신다. 그분에게는 악인이거나 선인이거나 ‘하느님의 평등한 자녀’였다. 나이나 신분과 상관없이 공평하게 ‘사랑을 주고 존중심을 드러내야할 사람’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비열한 사람은 강자에게 비굴하고 약자에게 가혹한 사람이다. 그런 자에게 구원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섬기러’ 오신 분이라고 말씀하실 만큼 겸손하신 분이다. 낮은 목소리로 누구에게나 심지어 원수에게도 스스로 낮추어 말할 수 있다면, 세상은 그만큼 아름다워질 것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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