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 배치가 웬 말!" 무장해제 통해 얻는 평화의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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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배치가 웬 말!" 무장해제 통해 얻는 평화의 복음
  • 이연학 신부
  • 승인 2016.10.17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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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복음

“평화의 군왕”(이사 9,6)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을 때 천사들은 사람들에게 평화를 선포했다.(루카 2,14) 예수께서 공생활 벽두부터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통치로 실현되는 평화에 다름아니다. “평화의 하느님”(로마 15,33)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기쁜 소식은 결국 “평화의 복음”(사도 10,36; 에페 6,15)일 수밖에 없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시며 유산이나 되는 듯 제자들에게 평화를 남겨주신 그분께서는 부활하신 후에도 늘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요한 20,19.26; 마태28,9 등 참조) 하고 인사하셨다.

이렇듯 평화야말로 사실상 그분의 탄생과 생애와 죽음의 이유요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분이 강생하신지 2000년이 넘었건만, 세상이 그때 보다 더 평화롭게 되었는가? 오히려 오늘 세상은 그 어느 때 보다 더 치명적이고 심각한 폭력에 노출되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분이 남겨주신 그 평화는 도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예수님의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는 말씀이 해답의 실마리가 될 것이다. 사실 그분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12,51)는 ‘막말’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마태오에 따르면 그분은 심지어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10,34) 오신 분이다.

예수님 시절, 팔레스티나를 포함하여 지중해 인근 지역을 모두 장악한 로마 통치자들이 즐겨 입에 올리던 말이 바로 ‘로마의 평화(Pax Romana)’였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도 ‘미국의 평화(Pax Americana)’란 표현이 통용되는 현실이다. 이 평화(pax)는, <한국어 위키사전>에 따르면, “국제정치에서 중심국가의 지배에 의해 주변국가가 평화를 유지한다는 뜻으로, 군사개입이나 경제적 통제를 통해 완결되는 중심국의 패권주의 체제”를 일컫는 말이다.

요컨대, ‘평화’라고 부른다 해서 모두 같은 평화가 아니다. ‘사랑’이 그렇듯, ‘평화’는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으로 오염된 낱말 중 하나다. 그런 말들이 원래의 의미를 회복하지 못하면, 단지 의미를 상실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 정신의 가장 깊은 곳을 왜곡하고 흐려놓는다. 예수님께서 아예 ‘평화’란 말의 사용 자체를 폐기하고 ‘분열’이나 ‘칼’ 같은 반어(反語)를 사용하신 이유도 여기 있지 않을까.

세상의 평화

‘흡수통일’과 ‘분단고착’은 단지 남북관계 차원에서만 아니라 뭇 집단이나 개인들이 서로 맺는 관계 수준에서도 세상이 지닌 평화관을 잘 대표하는 말이다. 우리가 맺는 인간관계는 대개 이 두 부류로 분류되는 듯하다. 그것은 우리가 원하고 추구하는 ‘평화’의 민낯을 드러낸다.

흡수통일은 말 그대로 타자의 다름(他者性)을 흡수하고 녹여서 자신에게 동화(同化)시키는 것이 평화라고 믿는 태도다. 이 자세는 타자보다 힘이 셀 때 자주 나타난다. 사람들은 이를 ‘평화’라 부르지만 그것은 병합 또는 점령의 다른 이름일 따름이다. 나에게 평화인 것이 상대방에게는 지옥이라면, 그 평화가 참 평화일 리 없다.

한편 분단고착은 양자의 세력이 거의 대등할 때 벌어질 수 있는 현상이다. 피차간에 서로를 자기에게 흡수하여 동일화하고 싶어 하지만, 충돌이 벌어질 경우 공멸(共滅)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중간에 ‘비무장지대’ 따위를 설정해 임시로나마 ‘평화’를 유지한다. 그러니, 이 ‘평화’ 역시 냉전(冷戰) 혹은 기껏해야 휴전(休戰)의 다른 이름일 따름이다.

흡수통일이 “무찌르자 000!”이란 구호를 자주 외친다면, 분단고착은 ‘투명인간 테크닉’을 주로 쓴다. 한 하늘을 이고 사는 것이 지옥 같을 때, 우리는 종종 타자나 심지어 자기 자신을 마치 지상에 없는 듯 취급하여 고통을 조금이나마 줄여 보려고 애쓴다.

이렇듯 흡수통일과 분단고착은 ‘타자의 배제’와 ‘평화’를 동일시한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힘을 통해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야말로 현실적으로 가능한 유일한 평화라고 믿는다는 점도 같다. 이런 평화관에서 타자와 그 타자성은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이 되고 악마화 된다. 무릇 지상에서 우리가 개인으로나 집단 차원에서 ‘평화’를 추구할 때 대부분 이런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교회 역시 이런 입장을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공의회의 <종교자유에 관한 선언>이 교회 역사에서 기념비적 중요성을 지니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십자가의 평화

사실 교회 역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평화와 세상의 평화를 식별하기보다 혼동해 온 사례를 더 많이 보여준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적으로 보고 배제하려는 이들의 폭력마저 껴안으시면서 십자가에 순순히 매달리셨는데, 교회는 이런저런 형태의 ‘십자군’을 조직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십자가의 길과 십자군의 길은, 발음이 비슷해도 사실은 정반대의 길이다.

진리가 “십자가의 말씀”에서만(1코린 1,18) 드러났듯, 평화도 십자가의 죽음에서만 드러난다. 진리가 폭력을 써서라도 지켜야 할 ‘믿을 교리’가 아니라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위격이듯(요한 14,6 참조), 평화 역시 무력과 정치(공학)적 타협으로 이루어지고 유지되는 ‘전쟁 없는 상태’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죽은 구세주의 현존이다(에페 2,14 참조).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이사 53,7) 순순히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면서 자기를 죽이는 이의 칼끝을 받아 안았던 분의 현존이야말로 평화다(에페 2,14 참조).

복음이 오래전부터 선포한 이런 평화가 세상의 귀에는 오늘도 낯설기만 하다. “십자가의 말씀”이 그러하듯, 십자가의 평화는 세상의 ‘평화’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분명한 “걸림돌”이요(1코린 1,23) “반대받는 표적”(루카 2,34)이다. 그것은 오늘도 믿지 않는 이에게는 “낭만에 초 쳐 먹는 소리”일 따름이요, 교회 안의 적잖은 이에게는 포스트모던류(流)의 위험한 상대주의로 비친다. 그러나 그것이 모종의 상대주의라면, ‘십자가의 상대주의’일 따름이다. 십자가에서 사랑 때문에 당신의 신성과 진리성마저 괄호 속에 넣어두실 수 있으셨던 하느님, 세상의 눈에 어제나 오늘이나 어리석고 무력한 하느님의 ‘상대방 중심주의’일 따름이다.

‘평화의 군왕’이 강림한 후에도 세상은 결코 더 평화롭게 변화되지 않았지만,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분은 ‘더 이상 빼앗길 것이 없는 이들’만이 누리는 평화의 힘을 주셨다. 그 힘은 죽음의 두려움을 넘어선다. 그것은 지금 죽어도 괜찮은 이들의 평화다. 눈에 띄지는 않지만, 지금도 이런 평화가 역사라는 반죽을 부풀리고 있다. 그것은 이 땅의 비밀스런 누룩이요 소금이다. 이 평화를 죽음으로 증언한 이들도 적지 않다. 최근의 예가, 1996년 알제리에서 순교한 아틀라스 수도원의 일곱 트라피스트 형제들이다. 이들은, 무장해제만이 상대방의 무장을 해제한다는 사실을 스승이자 맏형이신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각자 십자가에 매달려 순순히 살해당함으로써 증언해 주었다.

이런 증언자들의 대열 앞에서 묻는다. 사드 배치를 통한 한반도 ‘평화’가 복음의 평화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이런 질문에 ‘종북(從北)’ 운운할 형제들에게도 묻는다. 종북과 종남이 십자가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원수인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시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간절히 이르신 저 ‘어린 양’의 평화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이연학 신부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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