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중 대주교 "슬픔보다 분노가 채워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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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중 대주교 "슬픔보다 분노가 채워져"
  • 김희중 대주교
  • 승인 2016.10.12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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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1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백남기 농민 추모미사 강론: 김희중 대주교

[ 10월 11일 오후 8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인 김희중 대주교(광주대교구)와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유흥식 주교(대전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 이기헌 주교(의정부교구), 그리고 옥현진 주교(광주대교구)가 백남기 농민의 추모미사를 봉헌하였다. 다음은 김희중 대주교의 이날 미사강론 전문이다. ]  

사진=한상봉
김희중 대주교, 주교회의 의장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하는 가족과 소중한 관계를 맺었던 친지들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고 백남기 형제가 주님의 자비하심으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청합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큰 슬픔이요 상처로 오랫동안 남습니다. 하물며 평소의 정답게 속삭였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고, 평소에 그토록 다정했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별이라면 그 슬픔과 고통은 어떤 무엇으로도 잠재울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지아비를 떠나보내신 박경숙 율리아나 여사님, 이제는 더 이상 다정하게 “아가!”라고 불러 주는 음성을 들을 수 없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어 이 순간 어느 누구보다도 슬퍼하는 자녀들인 백두산 하상 바오로 형제와 백도라지 모니카 자매, 그리고 백민주화 유스티나 자매에게 주님께서 당신만이 주실 수 있는 마음의 평화와 위로를 주시도록 간청합니다.

평상시의 사별이라면 상가 집에서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슬픔의 분위기로 채워지겠지만 지금 이 순간 어쩌면 가족들은 마냥 슬퍼하기 보다는 분노가 더 큰 아픔으로 채워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 이 자리는 백남기 형제가 이 자리에 절대적인 침묵의 존재로 누워있을 자리가 아닙니다. 누렇게 익어가는 황금 들판에서 땀 흘려 정성을 쏟았던 벼들을 바라보면서 생명의 신비스러움에 경탄하고, 이렇게 생명을 길러낸 대가를 사랑하는 농민들이 함께 즐거워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도대체 무슨 꼴입니까? 백남기 임마누엘 형제가 우리 곁을 떠났다기보다는 우리가 임마누엘 형제를 떠나보낸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이러한 상황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정직하게 땀 흘려 길러낸 우리의 먹거리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바라는 그 외침이 이렇게 죽어야 할 정도로 부당한 요구였습니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최우선적으로 보호해야할 국가가 이렇게 해도 되는 것입니까?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가족들이 슬퍼할 겨를도 없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일들이 진행되는 걸 보면서 분노할 수밖에 없으니 무슨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떡하다 이런 참담한 꼴을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까? 지나가다가도 상가 집을 만나면 밤새 함께 울어준다는 우리 민족인데 왜 이리도 척박하게 되었는지,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한없이 자괴감이 밀려옵니다.

사고가 난 다음 날부터 지금까지 3백일이 넘는 날 동안 응급실 앞마당에서, 천막에서, 지금은 장례식장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미사를 봉헌하며 함께 하신 형제 사제들, 수도자들, 교우들이 계셔서 그나마 조금이라도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고맙고 고맙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겠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보여주셨습니다. 어울림터를 처음부터 지금까지 지키고 계시는 자원봉사자들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농민회와 130여 단체 단체가 연대하여 꾸린 대책위에 대해서도 들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노고가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 거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빈소에서 백남기 농민을 추모하는 주교들. 사진=한상봉

함께 하고자 하는 많은 분들이 다녀가시고 또 사방에서 후원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마당이 부족할 정도로 많이 보내주신 물품들에 고맙습니다. 그 물품들을 또 나눈다는 소식에 감동합니다. 백남기 임마누엘 형제님께서 생전에 벗들과 함께 했던 계모임 이름이 ‘호랑나비’라고 들었습니다. 전라도 사투리로 주머니를 ‘호랑’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주머니, 곧 호랑에 든 것을 나누고 비우자는 의미라는 해석도 함께 들었습니다. 식구들은 힘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머니를 비우고 나누면 식구들 살림살이가 어려워 질 것이 분명하니까요. 고인도 그 사실을 잘 알았겠죠? 쉽지 않은 일을 함께 하시고 사셨으니 주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의 나눔을 실천하신 의인입니다.

오늘 우리가 ‘호랑나비’의 정신을 배우고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여기 장례식장을 찾고 물심양면으로 후원하고 지키고 기도하는 이 모든 일이 그러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한다면 분명히 달라질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루카 11,8)

냉기가 도는 추운 바닥에서 새우잠을 자며 우리의 죽음을 지키는 젊은이들이 고맙습니다. 어른들이 잘못한 일을 젊은이들이 기워 갚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미안하고 또 미안하지만 이 젊은 친구들을 통하여 우리나라, 우리 사회의 희망을 보고 있습니다. 이 모든 분들에 대한 고마움을 품고 기도하겠습니다.

사진=한상봉

사고가 난지 317일, 선종하신지 17일째,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있습니다. 책임 있는 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국민을 보호해야할 책임이 있는 분이 책임지고 사태를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국민들을 이렇게 비상상태로 살게 하는 일은 나쁜 일입니다. 하루라도 서둘러 일상으로 돌아가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들의 분노가 하늘에 닿기 전에 해결하셔야 합니다. 서둘러 돌아 서십시오.

3천일도 넘게 복직을 위해 노력하는 노동자들의 울부짖음을 들어야 합니다. 물속에서 죽어가는 자식들을 어떻게 해보지도 못한 어버이들의 울부짖음을 들어야 합니다. 언제 돈 벌어서 사람 노릇할지 몰라서 어쩔 줄 몰라 방황하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울부짖음을 들어야 합니다. 농사짓고 살아도 사람 노릇 하며 살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고 백남기 임마누엘 형제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우리가 마무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부 당국자들도 협력해 주시기를 간절하게 호소합니다. 눈물을 닦아 주십시오. 그게 할 일입니다. 이 눈물은 손수건이 아니라 법과 제도로 닦을 수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그분들을 위해 일하시면 언제든지 협력할 것입니다. 올해 가을도 우리의 생명을 살리는 먹거리를 생산한 농민들은 정직하게 땀 흘린 대가를 정당하게 받고 싶어 합니다. 그 요구는 시혜가 아니라 정당한 권리입니다. 식량이 부족할 때 컴퓨터 칩을 삶아서 영양을 보충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최첨단 전자산업 못지않게 우리 농업을 지키는 우리 농민들이 우리 모두의 은인으로 대접받고 살 수 있도록 획기적인 재정적인 지원과 제도적인 보완을 해주기를 바랍니다.

백남기 형제는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염원을 담아 아드님 이름을 백두산이라 지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따님 이름을 민주화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농민드을 생각하며 도라지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우리 농촌을 살리는 생명산업의 주역인 농민들이 대접받고 살 수 있도록 우리가 힘을 모을 때, 백남기 형제의 육체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분의 정신은 우리 가운데 살아 있을 것입니다. 백남기 형제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이러한 일에 정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하기를 부탁합니다. 꼭 그렇게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사랑과 자비가 가득하신 주님, 우리 모두가 민족의 화해와 우리나라의 민주화, 그리고 우리 농촌을 살리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백남기 임마누엘 형제가 우리 가운데 부활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소서.

백남기 임마누엘 형제와 이 땅의 민주화, 농촌을 위해 희생하신 모든 분들의 영원한 안식을 빕니다. 아멘.
 

김희중 대주교
광주대교구장,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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