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 낯선 분] 카파르나움, 사회적 관계 회복시키는 치유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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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 낯선 분] 카파르나움, 사회적 관계 회복시키는 치유의 공간
  • 송창현 신부
  • 승인 2016.10.11 14: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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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와 구마 - 6
Christ healing the deaf mute of Decapolis, by Bartholomeus Breenbergh, 1635

역사의 예수가 만난 사람들, 곧 세리, 무력한 거지, 나병 환자, 창녀, 가난한 이들은 그들이 속한 사회적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삶이 결정되어 있었다. 영구적인 신체적 장애를 가진 이들은 당시 사회에서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변두리로 내몰렸고 결국 구걸을 하며 살았다. 질병을 가진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는 이들을 개별적으로 만났을 때 그들이 속한 사회적 집단의 범위도 잘 알고 있었다. 즉 예수는 사람들을 만날 때 그들 삶의 다양한 측면들, 곧 총제적인 차원들을 분명히 의식하였다.

마르 1,21-34은 카파르나움에서의 예수의 하루 활동을 서술한다. 사실 갈릴래아 지방의 나자렛 출신인 예수는 그곳을 떠나 카파르나움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마태 4,13)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곳으로 소개되는 카파르나움은 갈릴래아 호수의 북서쪽에 위치한다. 이곳은 다마스쿠스에서 티로로, 메소포타미아에서 알렉산드리아나 로마에 이르는 길에 위치한다. 갈릴래아와 다마스쿠스를 연결하고,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큰길이 지나갔다. 헤로데 대왕이 죽은 이후 카파르나움은 헤로데 안티파스가 통치하는 지역에 속하였는데, 필리포스가 다스리던 지역과 맞닿은 경계에 위치하였다. 그래서 상업, 어업, 무역이 성행하고 번창하였던 그 곳에는 로마 군대의 주둔지(마태 8,5 이하), 세관(마태 9,9 이하)과 회당(마르 1,21)이 있었다.

카파르나움은 예수의 갈릴래아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래서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사시는 고을”(마태 9,1)로 불린다. 예수는 회당에서 가르치고 더러운 영을 쫓아냈으며,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에서는 병자를 치유하였다. 그리고 그 집 문 앞에서는 사람들이 데리고 온 많은 병자를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었다.

이와 같이 예수의 활동 공간은 종교적이고 공적인 회당, 일상적이고 사적인 공간인 가정 집, 일상적이고 공개적인 집 문 앞을 모두 포함한다. 그리고 예수의 일은 가르침, 구마, 치유를 모두 포함한다. 이와 같이 카파르나움에서의 예수의 하루 이야기는 다양한 공간 안에서 다양한 활동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단지 카파르나움에서의 하루만을 의미하지 않고 예수의 전형적인 일상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그의 전체 활동의 축소판인 것이다.

예수 당시의 유다인 사회에서 나병 환자는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받았고 사회에서 전적으로 배제되었다. 나병은 전염이 되는 특성과 제의적인 부정 때문에 사회로부터의 소외를 발생시켰다. 나병은 환자 당사자의 몸뿐 아니라 하느님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파괴하였다. 그래서 나병 환자는 죄인으로 간주되어 그와 접촉하는 것조차 부정한 일로 여겨졌다. 그는 하느님의 영역에서 배제되었고 사람들로부터 소외되었다.(레위 13,45-46)

나병 환자는 사람들로부터 이미 죽은 사람의 몸처럼 취급받았다. 예수는 사회 안에서 희망 없이 살던 이들, 회피당하고 잊혀진 이들에게 다가갔다. 율법에 따르면, 나병 환자를 만지는 것은 부정한 일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를 만지고 깨끗하게 만든다. 예수는 더럽혀질 위험을 무릅쓰고 나병 환자를 만지고 그를 깨끗하게 고쳐 준다.

그리고 예수의 치유는 나병 환자의 삶을 변화시킨다. 예수의 치유는 나병 환자의 하느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친교도 회복시킨다. 즉 이것은 신체적 건강의 회복뿐 아니라 종교적이고 사회적 차원에서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예수는 육체의 질병만을 치유할 뿐 아니라 종교적 공동체와 사회적 공동체를 회복시킨다.

이와 같이 예수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화해시키고, 인간의 일상적 삶에서 악의 세력을 내쫓아 병든 몸을 치유하며, 장애를 고치고 불행으로 말미암아 고립된 사회적 관계를 회복시킨다. 곧 그는 자신이 치유하고 해방시키는 사람들의 삶을 전인적 차원에서 온전하게 만든다. 예수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육체적이고 사회적인 실존과 분리시키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의 치유는 전인적 차원을 가진다.

예수의 치유 대상이었던 병, 장애, 더러운 영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가로 막는 일체의 상황, 현상, 경향, 세력, 제도 등을 가리킨다. 이것은 개인적, 신체적, 영적, 인격적인 동시에 공동체적, 사회적, 정치적인 차원을 동시에 가진다.

하느님의 나라는 올바른 관계의 회복이고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 운동이라고 볼 때,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과 함께, 이웃과 더불어 올바른 관계를 회복해야 하고, 우리에게는 여전히 새롭고 대안적인 공동체가 필요하다. 즉 우리는 여전히 예수의 도움과 치유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의 도움으로, 그 치유의 손길로 해방되고 변화될 수 있다.

송창현(미카엘) 신부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성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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