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어디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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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디 있느냐?”
  • 유형선
  • 승인 2016.10.10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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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선 칼럼] 

글을 쓰려고 컴퓨터 화면에 워드 프로그램을 띄웠습니다. 하얀 색 화면을 바라보지만 무엇을 써야 할지 몰랐습니다. 몇 시간을 하얀 색 화면만 쳐다보았습니다. 어느 사이, 제 마음 한 복판이 보였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하나의 ‘질문’에 여전히 이끌려 다니고 있었습니다.

2012년, 저는 매각을 앞 둔 직장에서 전 직원의 고용 안정을 주장하며 파업에 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금새 끝날 줄 알았던 파업이 석 달을 넘어가면서 제 영혼은 부서지고 있었습니다. 이러다가 저와 가족의 인생이 깡그리 망가질 수도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벼랑 끝에 몰린 심정이었습니다. 지금 여기서 조금만 더 밀리면 우리 가족 그 동안 쌓아온 모든 것이 파멸될 것만 같았습니다.

가족을 지키지 못하는 무능한 가장이 바로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옳다고 믿는 일을 위해 동참한 파업이었지만 제 가족 하나 지켜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지 의문이었습니다. 아무런 힘이 없는 제 모습이 그저 두렵고 부끄러울 뿐이었습니다.

그런 중에 고향 친구의 갑작스런 사망 소식을 들었습니다. 새벽 퇴근 길에 집 앞에서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운명을 달리 하였다고 합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함께 학교를 다닌 한 동네 고향 친구는 이제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둘째 아이를 두고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날 밤, 차를 몰고 고향 장례식장에 다녀 왔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다시 파업의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제 마음은 친구의 죽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마치 저의 죽음 같았습니다. 장례식장 영정 사진 속에 제 사진이 걸린 것 같았습니다. 그 때부터였습니다. 홀연히 하나의 질문이 제 마음 속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너 어디 있느냐?’

파업이 석 달째 이어지면서 세상 모든 것이 그저 허망할 뿐이었었습니다. 사 십 년 쌓아온 가치관은 무너지고 또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분명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한갓 신기루처럼 허망할 뿐이었습니다. 너무도 허무하고 덧없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금방이라도 산산이 부서질 것 같았습니다. 몸과 마음을 의지할 곳은 어느 것 하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파업의 현장에서 끝없이 되풀이되는 하루 하루를 보내는 제 자신이 마치 홍수에 떠 밀려가는 나무조각 같았습니다. 그러나 ‘너 어디 있느냐?’는 질문은 허망하지 않았습니다. 본능적으로 알았습니다. 이 질문을 붙들어야만 제가 숨을 쉬고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무소유>라는 수필로 유명하신 법정스님께서 참 좋아하셨던 질문이었고 법정스님의 여러 책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질문이라고 합니다. 도서관에서 법정스님의 책을 찾아 읽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저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찔러 오는 이야기는 성경 속 창세기 이야기였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벌거벗은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 풀숲에 몸을 감춥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너 어디 있느냐?’고 외치며 아담을 찾으십니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창세기의 이야기가 저의 온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마치 대우주가 지금 저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질문에 답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인문고전 독서모임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 해 가을부터 겨울까지 세 개의 독서모임을 동시에 다니며 읽고 또 읽었습니다. 질문에 답을 찾고 싶은 마음으로 파업의 일상을 버텼습니다.

성탄절을 며칠 앞두고 파업은 끝났지만 저의 독서는 이듬해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인문고전을 읽는 사설대학원을 다니면서 읽고 또 읽었습니다. 또한 저 뿐만 아니라 감사하게도 아내와 아이들도 독서에 전념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저희 아내와 함께 공동 집필한 책이 올 해 1월에 출간되었습니다. 책 제목은 <가족에게 권하는 인문학> 입니다.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이었습니다. 기쁨에 충만한 대답을 이렇게 이끌어 주신 ‘질문’에 감사 드렸습니다.

지난 봄, 이 질문에 대한 멋진 해설을 하나 찾았습니다. 서울대 종교학과 배철현 교수님의 저작 <신의 위대한 질문> 53페이지에 나옵니다. 여기 옮겨 보겠습니다.

"성서에서 신은 인간에게 하고 싶은 말을 직접 명령하거나 알려주지 않는다. 신은 소크라테스처럼 인간에게 질문을 던져 스스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도록 산파 역할을 할 뿐이다."

"신은 이러한 질문을 다수에게 하지 않는다. 신은 한 사람에게만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아이에카!' 신은 나에게 '너는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 이 질문에는 정답이 없다. 자신의 삶을 통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답을 찾으려는 노력 그 자체가 정답이다."

지난 6월말, 한상봉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페이스북이 인연이 되어 파주에 강의하러 오신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이 십 년 전 모습 그대로 하느님나라 운동의 횃불을 훨훨 태우고 계셨습니다. 저희 가족의 책을 선물로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9월부터 <가톨릭일꾼>에 글을 한 편씩 싣자고 숙제를 주셨습니다.

이번에는 한상봉 선생님께서 영성에 대한 강의를 해주시겠다고 알려주셨습니다. 10월 첫 금요일, 합정동 도로시데이 영성센터에서 열린 세미나에 좀 늦게 도착했습니다. 세미나를 찾아오신 스무 분 남짓 되는 이 분들도 어쩌면 저처럼 ‘대답’을 찾고 계신 분들이겠구나 싶었습니다.

제 몸과 마음을 잘 준비하여 부디 질문에 답을 잘 해보고 싶습니다. 요즘 드는 생각은 아마도 제가 가진 능력 중에서 읽고 쓰는 능력을 사용하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제가 숨이 멎는 순간까지 수백 만 번 수천 만 번 되새길 질문입니다. 저는 대답을 찾아 준비해야 합니다. 질문이 저를 이끌고 있습니다.

 

유형선 아오스딩
<가족에게 권하는 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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