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지구, 그래도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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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지구, 그래도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린다
  • 최태선
  • 승인 2024.03.25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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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나는 오래 전부터 나 혼자 차를 타고 다니는 일을 피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다. 외출할 때는 반드시 색을 매고 나가 불필요한 비닐봉지의 사용을 줄이고 있다. 커피를 마실 때도 머그컵을 사용하거나 텀블러를 이용한다. 텃밭농사를 지을 때도 비닐 멀칭을 하지 않고 풀을 뽑아 덮어주고, 음식물쓰레기를 EM으로 퇴비로 만들어 써보았지만 내가 절약할 수 있는 화석연료나 에너지 절약에는 한계가 있다. 더구나 더운 여름에 에어컨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내 몸이 허락하질 않는다.

미국은 아예 기후협약을 무시함으로써 이상기후에 대처하지도 않고 있고, 탄소 절약을 위한 기업의 노력들 역시 이익창출 앞에서 눈가리기식 조치일 뿐 실제로 탄소배출을 줄이겠다는 의지가 빈약하다. 지구촌에서 곳곳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모두 비극적이거나 암울할 뿐 희망적인 이야기는 찾을 수 없다.

개인들의 노력을 포함하여 인류의 그 어떤 노력도 지구멸망의 시간을 되돌리거나 멈출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앞장 서 환경보호에 나서야 한다는 이야기를 멈춘 지 오래다. 그래서 지금은 손자 하나가 생겼지만 내 딸들이 자녀를 갖지 않는 것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게 다가오는 성서의 말씀이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만은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느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의 생각과는 달리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세상(사회)에 거의 아무런 영향을 발휘하지 못하고 오히려 생존을 위해 걱정하는 곳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을 건다.

하느님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신다. 이 말씀이 다가오는 이유는 저마다 욕망대로 살기를 원하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주의는 파국으로 치닫기 마련이다. 인류는 함께 살아야 하고 그것을 망각하는 순간 멸망의 대로가 열린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 인류가 결과적으로 개인주의가 주도하는 세상을 추구하게 된 것은 멸망을 향해 가면서 멸망을 불러들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얼마 전 한 연예인이 인생이 ‘독고다이’라고 말하면서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것은 자신이기 때문에 누구의 말도 듣지 말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라는 말을 대학을 졸업하는 후배들에게 이야기하며 자신은 노래나 하나 부르겠다면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댄스 가수가 그렇게 하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오늘날 만연한 개인주의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는 생각이 든다.

작금의 대통령 역시 개인주의를 진리로 착각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금융투자소득세를 폐지하겠다는 이야기를 하며 금융투자가 계층의 사다리를 올라가는 길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의 사고는 자유라는 단어가 지배하고 있지만 결국 그가 말하는 자유란 언론집회결사의 자유가 아니라 시장의 자유이며 자본의 고삐를 풀러 욕망의 대로를 향해 치닫게 하는 개인주의의 총화로 이해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모두가 회개하는 데에 이른다는 것은 개인주의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경고이자 희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부인한 사람들이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주를 위해 사는 사람이 된다. 주를 위해 사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주의와 결별한 사람들이거나 개인주의와 싸우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회개의 의미가 개인주의로부터 돌아섬이라는 사실로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오래 전 구 소련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솔제니친이 미국으로 망명한 후에 미국인들이 그리스도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숭배한다는 지적을 한 것은 예언자적인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이미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정초한 토마스 제퍼슨에게서 보았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개인주의의 첨병이었다.

개인주의는 경쟁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 세상을 제로 섬 게임이 벌어지는 정글로 만든다. 그곳에서 인간은 야수들로 변한다. 경쟁을 좌우하는 것은 동물과 달리 힘이 아니라 능력이다. 개인주의는 능력주의를 수단으로 욕망을 합리화하고 정의(正義)를 새롭게 정의(定議)한다. 그 정의가 지구를 종말로 치닫게 하고 인간성을 말살한다. 하지만 개인주의가 정의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 불평등이며 무질서다.

내가 아직도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개인주의에 함몰된 어둡고 잔인한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성서에 묘사된 초기교회의 모습은 단순히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의 구현이다. ‘소유를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는 정확하게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하나님의 지혜다. 또한 그런 그리스도인들의 존재는 단순히 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구원하는 방편이 된다.

내가 그리스도인 개인의 노력이 지구를 구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그런 노력이 무의미하다고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가 의미하는 것은 곧 하느님의 통치다. 그리스도인 개인이 하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을 통치하시는 하느님을 통해 지구는 구원받을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같이 올 것입니다. 그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녹아버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일은 드러날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녹아버릴 터인데,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날에 하늘은 불타서 없어지고, 원소들은 타서 녹아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따라 정의가 깃들여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내가 하고 있는 말이 실감나지 않는가. 나는 점점 더 뜨거워지는 지구를 보며 이 말씀을 생각하게 된다. 점점 뜨거워져서 마침내 하늘이 불타 없어지고, 원소들이 타서 녹아버린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따라 정의가 깃들여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실감이 나지 않는가.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믿음이다.

그렇다. 지구 종말에 대한 희망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개인들의 노력이 아니라 그들을 통치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무한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창조주이시며 그리스도인 개인들을 자녀로 사랑하시는 이상한 분이시다. 그래서 나는 이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에너지 절약이나 화석 연료 사용 줄이기와 같은 지구를 구하려는 삶이 아니라)을 경주하면서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을 앞당기기 위해 기도할 것이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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