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 자연에서 하느님 만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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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 자연에서 하느님 만나는 일
  • 김선주
  • 승인 2024.03.17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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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칼럼
사진=김선주
사진=김선주

담임목사님은 매우 흥분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교회에서 학생회 회장이던 때의 일이다. 학생회 예배 때 준비되지 않은 설교를 지루하게 반복하던 어느 날, 목사님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뭐냐”고. 아마도 그는 사탄이나 지옥, 종교적 배덕을 염두에 두고 질문을 던졌던 것 같다.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긴 침묵의 틈바구니를 뚫고 작고 가녀린 꽃잎처럼 비죽이 손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요.”

그 즈음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전당포 노파에 대한 라스콜리니코프의 인식, 아니 동류 인간에 대한 한 인간의 인식이 어떤 과정을 통해 왜곡되고 끔찍한 결과를 향해 치달아가는지 보고 있었던 시기다. 그 무렵 내 머릿속엔 온통 라스콜리니코프가 1인칭 시점으로 인간에 대해 말하고 있었으니 인간이라는 존재의 두려움이 압도할 수밖에 없었다. 막연하지만 내가 가장 무섭다고 말한 ‘인간’은 자연인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계와 모순이 만들어내는 불확실성과 악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 때 나는 사춘기였고 내가 인간과 세계에 대해 최초로 우울한 감정을 갖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적 긍정, 천국에 대한 소망과 다른 색깔이었다. 담임목사님이 내게 충격을 받은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착하고 얌전한 모범생이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에겐 충격이었으리라. 그리스도교적 소망과 구원, 천국의 이미지에 걸맞지 않는 인간 혐오의 감정을 십대의 어린 학생이 갖고 있었으니 어쩌면 목사로서 당연한 반응인지도 모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0여 년을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그 때 읽은 사회과학과 철학서적들을 통해 나는 인간을 새롭게 긍정할 수 있었다. 협력과 연대, 저항과 투쟁, 갱신과 혁명 같은 사회적 역동성이 역사와 인간의 삶을 바꾸어놓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나는 다시 인간에 대한 두려운 감정으로 복귀하고 말았다. 그래서 종교인이 되었지만 지금도 인간에 대한 화려한 부활이나 영적 구원보다는 현세적 구원을 우선한다.

 

사진=김선주
사진=김선주

나같이 허약한 인간은 하나의 사안에 몰입하면 할수록 쉽게 지친다. 그래서 요즘 인간의 문제에 대해, 사회적 현상, 역사적 맥락을 깊이 바라보면서 지쳐가고 있는 중이다. 이제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졌다. 과격한 글들을 쓰는 것보다 가볍게 산책을 하면서 내게 주어진 생명을 이 땅에서 기쁘게 즐기는 것으로 남은 생을 다하며 살고 싶다는 도피의식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꽃 사진을 찍고 말았다. 사람을 주제로 한 사진을 좋아하던 내가 이제 사람을 찍기 어려워졌다. 사람들의 카메라에 대한 거부감이 심해졌기 때문이다. 아니, 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자기를 아무 두려움 없이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의 모습을 찍으려면 아프리카에나 가야 할 일이다. 골목길과 사람들을 주제로 흑백사진을 찍었던 김기찬 선생이나 사람들의 일상과 역사적 순간에 결정적 순간을 포착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시대는 갔다. 수잔 손택이 사진에 대해(‘사진에 관하여’) “누군가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살인의 승화다”라고 말함으로써 카메라가 총구의 승화가 되어버렸다. 이제 문명사회에서 사람을 찍는 일은 상업적 목적 외에는 허용되지 않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팔리지 않은 카메라를 들고 산으로 갔다. 겨울을 이기고 이제 막 꽃을 피우는 것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붉은대극, 생강나무꽃 노루귀, 복수초 등을 카메라 앵글로 깊이 들여다 보면서 나는 작고 보잘것없는 들꽃들에서 하느님의 숨소리를 들었다. 작은 바람에도 파르르 떨리는 여린 꽃잎 속에 하느님의 숨결이 깊이 배어 있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동안 노인들이 찍어서 여기저기 남발하는 꽃 사진들을 감흥 없이 바라보던 내게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사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앵글을 통해 작고 미세한 우주를 만나게 된 것이 큰 기쁨이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말한 자연, 그 때문에 인간 중심의 세계관이 만들어지고, 인간에게 폭력이 용인되었다면 이제 그 정복과 다스림을 달리 해석해야 한다는 신학적 주장들이 있어왔다. 이런 논의에 기초하면 이제 자연은 하느님의 숨결로써의 내밀한 생명이며 우주적 현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연은 하느님의 유사성(fractal)이며 인간은 자연의 유사성(fractal)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을 하느님의 형상(image)과 모양(likeness)대로 창조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인간은 하느나님의 기하학적 무한 반복의 우주 복제 과정이며 자연의 복제품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회개(repentance)란 행위의 결과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아니라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회개가 하느님께 돌아가는 일이라면 먼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다, 회개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곳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일은 예배당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만큼 거룩한 일이다.

 

김선주 목사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우리들의 작은 천국>, <목사 사용설명서>를 짓고, 시집 <할딱고개 산적뎐>, 단편소설 <코가 길어지는 여자>를 썼다. 전에 물한계곡교회에서 일하고, 지금은 대전에서 길위의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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