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세례파, 소유를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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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세례파, 소유를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
  • 최태선
  • 승인 2024.03.11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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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painted by Arsen Bereza (A.D.33 Art)
painted by Arsen Bereza (A.D.33 Art)

내 신앙 여정에 있어 재세례파(anabaptist)와의 만남은 필연적인 것이었으며 전환점이었다. 이전에도 재세례파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적의를 가진 상대방에 의해 기록된 내용들이었다. 어떤 정보가 일단 머릿속에 입력이 되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진리로 작용한다. 재세례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부정적인 것으로 각인된 재세례파에 대한 정보는 여간해서는 긍정적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재세례파 교회가 내가 잘 아는 장로교 교수이자 북미를 견인하는 영성 그룹 “크리소스톰”의 중요한 일원이었던 마르바 던의 책에서 내가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언급되는 것을 보았다. 마르바 던은 그곳에서 재셰례파 교회 가운데 한 갈레인 한 메노나이트 교회를 가리켜 “지구상에 현존하는 교회 중 가장 성서적인 교회”라는 표현을 하였다.

사실 나는 재세례파에 대해 이미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새로운 정보가 들어와도 일단 내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는 부정적인 인식을 지우고 새롭게 자리를 잡기가 힘이 들었다. 그래서 생태주의자로 아미시를 만났고, 세례의 타락이라는 교회사의 기록에서도 재세례파의 입장에 대한 설명이 있었음에도 선뜻 재세례파를 바르바 던처럼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마르바 던이 이야기하는 내용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바르바 던이 나가게 된 교회는 백여 명 정도가 모이는 작은 교회였다. 그녀가 그 교회의 회원이 되고자 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모여 그녀에게 질문을 했다. “왜 장로교 교인이 메노나이트 교회의 교인이 되려 하느냐?”는 질문에서부터 개인적인 여러 질문들이 있었다. 그런 질문들이 끝난 후에 그들은 마르바 던을 교회의 회원으로 맞아들일 것인가를 결정했다. 누구도 그 결정에서 만장일치가 아니면 회원이 될 수 없었다.

내가 알던 교회의 상황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었다. 오늘날 교회는 누가 오더라도 환영을 받는다. 더구나 전 교인이 한 사람의 교인으로의 가입에 대해 결정권을 행사하는 경우는 없다.

그 내용을 묵상하면서 나는 그들의 그런 관행이 매우 의미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내가 왜 유무상통하는 교회를 목표로 실패했는가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민주적인 교회가 아니라 모두가 평등한 하느님 나라인 교회였다는 사실과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교회의 성장이나 부흥이 아니라 교회의 정체성의 유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작은 에피소드 하나로도 왜 그런 그들을 가리켜 신학자이자 영성가인 바르바 던이 “지구상에 현존하는 교회 중 가정 성서적인 교회”라는 표현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후로 나는 아나밥티스트 홈페이지를 찾아 그곳에 있는 글들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모든 내용들이 절절하게 다가왔다. 특히 그곳에서 보게 된 재세례파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나를 전율케 만들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고,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숙연한 마음으로 돌아보고 또 돌아보게 되었다. 또 그 감동을 글로 쓰면서 그 감동은 배가 되었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나는 재세례파의 전적인 지지자가 되었다.

내 경우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나와 같은 과정을 겪는다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목사로서 나는 유무상통하는 초기교회와 같은 교회의 건설을 목표로 삼았었기에 그것은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틀린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틀렸었다. 유무상통하는 교회를 목표로 삼은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고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잘못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너무 성급했으며 두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교회의 건설은 사람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이며, 그 일의 경우도 그리스도인 개인들의 자발적인 동의를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의 몰락은 예정된 것이었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기다리지도 않았고, 개인들의 믿음과 성숙 역시 무르익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실패의 경험은 내게 가장 소중한 경험이었고, 그 실패로 모든 재산을 잃고 무일푼이 되어 극한 가난 속에 내던져진 나는 마침내 복음에 눈을 뜨게 되었다. 물론 교회가 휴면에 들어가기 전까지 수많은 시도들을 한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 교회들과 비교하면 그것은 정말 굉장한 진보라고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주님은 망설임 없이 우리 교회를 실패하게 하셨다. 나는 막중한 대가를 지불하고 그 실패의 경험을 샀다.

그 실패의 경험으로 얻게 된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재세례파와의 만남이다. 물론 나는 그들과 어떤 교류도 하고 있지 않다. 다만 주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재세례파 책 몇 권과 주석 몇 권을 번역하기도 했고, 우리나라의 재세례파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내게 익숙한 사람들이 되었다.

오늘은 내가 가졌던 유무상통하는 공동체와 관련하여 그들의 공동체에 관한 이해만을 살펴보자.

재세례파들에게 있어서 신자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대한 이해는 아주 분명하였다. 구원을 받아 변화된 사람들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내며, 그 사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새 계약에 따라 한 새로운 백성, 즉 그리스도의 공동체로서의 실존을 의미한다. 공동체의 삶이란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그분이 가르치신 본을 따라 사는 삶이다. 그리고 변화된 새 백성들은 자신의 거룩한 삶을 유지하기 위한 자원을 바로 계약 공동체 안에서 발견한다. 그들의 “교회 모임을 위한 규칙(1527)”의 한 규칙에 그들의 공동체적 정신이 잘 나타나고 있다.

“이 공동체의 형제·자매들은 어떤 것도 자신의 소유로 가져서는 안 된다. 사도시대에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처럼 모든 것을 공유하고, 각자의 필요에 따라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따로 특별한 공동기금을 마련한다. 그래서 사도시대와 같이 어떤 형제도 필요 때문에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유를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나누었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는 궁핍한 사람들이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공동체 안에서 제자가 된다는 것은 “하느님과 형제·자매를 섬기기 위해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을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이 행한 경제적 유무상통의 생활로 인해 어떤 이들은 이들을 ”혁명가들“ 혹은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휠 마이어는 “물건을 통용하는 공동체적인 목적은 어려움을 당하는 형제들을 항시 도와주는데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것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한 청지기로서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재세례파들이 이러한 공동체적인 경제관을 어떻게 존속시킬 수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후터라이트 공동체는 현재까지도 100% 공동채산제로 살아가고 있다. 다른 그룹들은 약간씩 다르기는 하지만 동일한 공동체의 원리를 가지고 나름대로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의 기본 공동체의 원리는 어떤 그리스도인도 자신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되며, 그의 형제가 궁핍함을 당할 때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응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전적으로 일치한다.

내가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언급하는 것은 “소유를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야말로 가장 우선해야할 교회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자 본질이라는 나의 인식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재세례파는 그야말로 귀감이라고 할 수 있다.

소유에 대한 태도야말로 예수의 제자 됨에 있어 가장 먼저 내려야 할 신앙의 결단이자 대가이며 이것이 불분명하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시작될 수 없고, 복음은 폭발하지 않는다. 그것은 여호와와 바알과 아세라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이스라엘과 같다.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머뭇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여호와로부터 돌아섰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재세례파를 남겨두셨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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