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 사랑과 이단 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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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 사랑과 이단 말살
  • 최태선
  • 승인 2024.03.04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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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최근 나는 <이단의 발생과 그 과정>이라는 글을 쓰고 그에 따른 글을 연속적으로 쓰고 있다. 최근 우리는 JMS나 얼마 전 죽은 이재록이나 아가동산과 같은 이단들의 이야기를 넷플릭스를 통해 확인하고 이단들에 대한 경각심을 높여가고 있다. 그러나 넷플릭스도 신천지는 건드리지도 못했다. 아마도 그들이 가진 힘과 영향력이 함부로 손을 댈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천지라는 이름은 오늘날 거의 모든 교회들의 입구에 명시되어 있다.

“신천지인들의 출입을 금합니다.”

나는 이런 글을 써 붙여야 할 만큼 신천지가 골칫덩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들은 강력한 조직으로 엄청난 힘을 지녔다. 한 교회가 그들을 상대할 수 없을 만큼 그들은 강력한 조직이 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교회가 참 교회라면 신천지와 같은 조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나는 늘 “신천지인들을 사랑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교회는 없는가?”라는 질문을 교회들에게 던지고 있다. 사람들은 이런 내 말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무슨 미친 소리를 하고 있느냐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교 역사는 세상과의 싸움이 아니라 이단과의 싸움이 된지 오래다. 그것은 그리스도교가 더 이상 그리스도교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그리스도교는 저항할 수 없는 세상과의 싸움을 포기하고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 이단과의 싸움을 목표로 삼았다. 그 결과 사라진 것이 십자가다. 십자가는 “원수사랑”의 표상이다. 그리스도교의 표상은 바로 이 “원수사랑”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교가 조직이 된 이후 그리스도교의 표상은 “이단말살”이 되었다.

그리스도교 역사는 검으로 세상의 악을 제거하려 했던 그리스도교 운동이 남긴 핏자국으로 붉게 물들어 있다. 순교자들과 이단과 영국 종교개혁자의 단두대와 스페인 종교재판소의 야만적인 형벌이 그리스도교 역사를 수놓던 시대에 십자가는 언제나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십자가는 원수 사랑의 결과였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십자가를 교회를 장식하는 소품이나 그리스도인들의 목에 걸린 액세서리로 만들었다.

하느님의 구속의 역사는 “원수사랑”으로 모든 피조세계를 구원하는 것이다. “원수사랑” 이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원수사랑”을 에둘러 가는 길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믿음으로 위장하고 있다. 물론 교리가 그 이론적인 근거를 제공한다. 하지만 그런 구원은 없다. 본훼퍼 목사의 “값싼 은혜”란 이에 대한 정확한 지적이다.

“원수사랑”은 생명을 요구한다. 그리스도교에서 원수사랑이 사라지면 복음은 무의미하다. 그것은 세상의 복음과 다르지 않다.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처세술에 지나지 않게 되고 우리는 그렇게 변한 복음을 소중하게 지키려는 오늘날의 교회들을 보고 있다.

며칠 전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강남의 대형교회를 다닌다. 그는 늘 총무나 예배반장과 같은 직무만을 맡고 있다. 그의 나이가 칠십이 넘었는데 한 번도 회장이나 장로 후보가 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왜 너는 그 흔한 회장 한 번 못하느냐고 물었더니 회장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란다. 그래서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말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물론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가난한 사람이 회장이 못 되는 교회가 교회일 수 있느냐는 내 질문에 친구는 뒷말을 얼버무렸다.

안타까운 것은 친구도 자신이 다니는 교회가, 교회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 사실을 알아도 친구는 어쩔 수가 없다. 이미 생명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박차고 나올 열정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오늘날 (좋은, 혹은 대단한)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을 죽이는 곳이 되었다. 나는 친구의 그런 상태가 아쉽지만 내가 어쩔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리고 그것은 내 글을 읽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교 신앙이란 (사람으로서)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가 [근심에 사로잡힌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재물을 가진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하느님은 하실 수 있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것이 둘 이 있다. 하나는 하느님이고, 하나는 재물(돈)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 둘을 모두 선택할 수 없다. 둘 가운데 오직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선택을 강요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스럽게 돈을 선택하게 된다. 돈은 음흉하게 자신이 주인임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돈을 선택하고, 주인 됨을 주장하지 않는 돈은 찰떡궁합을 이룬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을 앗아가고 말살시키는 첩경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돈의 유사전능성으로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사고가 교회 안에 편만해져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공동선”이라는 단어를 매우 싫어한다. 그것은 돈의 유사전능성으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정의라는 생각 때문이다. 왜 하느님의 정의라는 분명한 단어가 있음에도 "공동선"이라는 모호한 단어를 사용하게 되는가? 그것은 하느님의 일을 돈으로 할 수 있다는 사고가 그리스도교의 일반적인 인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그 기원이 콘스탄티누스의 빈민구제소라는 사실도 함께 적시한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 최고 사제로서 그리스도교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는 빈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로마의 재정으로 빈민구제소를 설치 운영하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빈부격차가 사라지는 하느님의 정의가 아니라 빈민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공동선이라는 모호한 단어가 그리스도교 안에 확고하게 자리매김을 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하느님의 일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느님으로 인해 사람이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원수사랑”의 결과인 십자가다. 하느님의 부활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그리스도교는 그러므로 죽는 종교다.

이단들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해준다. 참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들은 이단 판정을 받고 박해를 받아 순교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들은 부활한다. 그들은 기꺼이 원수를 사랑하면서 십자가에 달려 죽거나 화형을 당하거나 수장을 당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이 아닌 교회들은 결코 죽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 그리스도교와 교회들은 참된 교회이자 그리스도의 몸인 이단들을 힘으로 제압하고, 돈의 유사전능성으로 공동선을 행하는 것으로 자신들이 참임을 주장하려 하지만 어림없는 일일 뿐이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감히 단언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하신 그 일로 내가 여러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것입니다.”

날마다 기꺼이 죽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하느님은 오늘도 일하신다. 사순절은 이 죽음을 묵상하는 시간이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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