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화해하는 노래, 김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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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화해하는 노래, 김민기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4.02.26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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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학창시절, 그러니까 40년 전에 서강대 정문 건너편 건물 지하에 ‘초원다방’이라고 있었습니다. 수업과 수업 사이 빈틈에 동기생들과 자주 들러 차를 마시던 곳입니다. 이곳엔 뮤직박스는 있었지만 디제이는 없었고, 누구나 듣고 싶은 음반을 직접 골라 들을 수 있었지요. 버릇처럼 제가 고른 노래는 조용필의 <친구여>이었지요. “꿈은 하늘에서 잠자고/추억은 구름따라 흐르고/친구여, 모습은 어딜 갔나/그리운 친구여...”

얼마 후 휴학계를 내고 얼마간 인천교대 앞 ‘베아트리체’라는 커피숍에서 디제이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늘 임의로 틀곤 하던 노래가 카세트테이프에 담긴 김민기의 <친구>였지요.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요”로 시작되는 노래입니다. “눈 앞에 보이는 수많은 모습들/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 말하면/어느 누구 하나가 홀로 일어나/아니라고 말할 사람 누가 있겠소”라는 구절이 사무쳤기 때문일 겁니다.

김지하와 조용필, 그리고 김민기

조용필과 김민기를 묶어 주는 사람이 시인 김지하입니다. 김민기는 김지하를 만나 ‘폰트라’(PONTRA)에 참여합니다. 폰트라는 “Poem on trash” 곧 “쓰레기더미 위에 시(詩)를”이라는 뜻입니다. 김지하는 이때 김민기가 부르는 <길>, <혼혈아> 등을 들으며 “그것은 그러나 노래가 아니었다. 차라리 아슬아슬하게 절제된 통곡이었고, 거센 압박 속에서 여러 가지 생채로 배어나고 우러나는 깊디깊은 우울의 인광(燐光)이었다”고 했습니다. 김민기에게 원주가톨릭센터에서 초연한 연극 <금관의 예수>의 주제곡을 부탁한 사람도 김지하입니다. 그렇게 탄생한 노래가 <주여, 이제는 여기에>입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간 김지하가 즐겨부른 노래가 <돌아와요 부산항에>였다고 해요. 출소 후 지인 소개로 처음 조용필을 만났습니다. 그때 인사말이 특별합니다. 조용필이 “저는 대중가수”라고 하자, 김지하는 “나는 대중시인일세”라고 답했다 합니다. 나중에 회고록에서 김지하는 이 대목을 소개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대중가요는 시보다 더 값진 시요, 보석보다 더 빛나는 보석일 수 있다. 그가 ‘저는 대중가수예요’라고 한 것은 자신을 낮추는 말이었다. ‘나는 대중시인일세’라고 대꾸한 것은 대중을 한없이 높이는 말이었다. 감옥 안에서 숱한 도둑님들이 나를 음으로 양으로 도왔기 때문이다. 나는 그 대중들에게 큰 빚이 있다.”

 

만져지는 ‘김민기’라는 노래

김민기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출신이었지만 음악에도 재능이 있었습니다. 1970년 어느 날 고교 동창생 임문일의 소개로 양희은을 만나게 되었는데, 집안 사정으로 돈을 벌어야 했던 양희은이 가수활동을 시작하며 그에게 노래 반주를 부탁했지요. 김민기가 양희은의 노래 반주를 하며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할 때 만든 유명한 곡이 <아침이슬>입니다. 그후로 김민기는 1971년에 첫 음반을 내게 되었는데, 이듬해 서울문리대 신입생환영식에서 <우리 승리하리라>, <해방가>, <꽃피우는 아이>를 부른 게 화근이 되어 동대문경찰서로 연행되고, 그의 음반은 모두 발매금지 당했습니다. 그 후로 ‘김민기’라는 이름으로는 아무 음반도 낼 수 없었고, 모두 양희은 노래로만 알려지게 되었지요.

학창시절에 김민기는 서울 신정동에 야학을 열어 노동자들을 가르쳤는데, 1972년 여름에 잊을 수 없는 체험을 합니다. 한 번은 마산 수출공단의 노동자들과 해변으로 야유회를 갈 기회가 있었죠. 막 석양이 지는 바닷가로 하나씩 둘씩 돌아오는 고깃배를 바라보다, 김민기가 무심코 “야, 참 멋있는데” 하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여공 한 사람이 쏘아붙였다. “그 사람들은 모두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에요. 뭐가 멋있다는 거지요?” 이 말에 관념적 지식인의 감수성에 대한 뼈저린 회의를 느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요? 미대생이던 김민기가 어느 날 야외에서 풍경화를 그리고 있었는데, 그림을 수정하려고 캔버스를 칼로 긁어내다가 구멍이 났습니다. 그 뚫린 구멍 사이로 방금 그리고 있던 나무가 보였습니다. 이때 그의 뇌리에 스친 생각은 이렇습니다. “도대체 이런 그림을 그려서 무엇 할 것인가. 조금만 움직이면 저 나무를 내 손으로 만질 수 있는데...”

김민기가 군대를 다녀와서 들어간 곳은 부평공단입니다. 여기서도 새벽마다 노동자들에게 공부를 가르쳤습니다. 그때 함께 생활한 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을 위해 지은 곡이 <상록수>였지요. 이 곡도 나중에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이라는 제목으로 1978년 양희은 음반에 실렸습니다.

순정한 마음이 구원하는 것

우리는 김민기를 <아침이슬>과 같은 노래나 뮤지컬 <지하철1호선> 또는 학전소극장 대표로 기억하지만, 그는 한 때 노동자였고, 익산과 김제, 전곡에서 농사짓던 농민이었고, 한살림 활동가였습니다. 1989년 장일순, 박재일, 김지하, 최혜성 등이 <한살림선언>을 발표하면서 출범한 한살림 모임의 초대 사무국장이었습니다. 그는 모질고 가난한 삶의 한가운데서 가난하고 순정한 마음이 어떻게 우리의 삶을 구원할 수 있는지 가늠하던 사람이었습니다. 1975년 영문도 모른 채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며 김민기는 수난받는 예수의 심정을 헤아렸습니다.

“옛날 보안사에 한 번 끌려 들어갔는데, 진짜 잘 패더라. 이만한 공사장 각목 가지고 배를 한 대 치고, ‘욱’ 하니까, 어느새 얼굴을 치더라고. 다시 위에서 ‘팍’ 찍는데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어. 성냥개비로 만든 인형이 후다닥 사그라져 가듯이 정신이 가물가물하는데 나를 패는 놈들이 갑자기 슬로비디오가 되는 거야. 정신을 잃어가면서 어떤 느낌이 들었냐면, 나 때문에 공연히 이 사람들이 죄를 짓는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그 사람들한테 너무 죄송하더라니까. 내가 없었으면 이 사람들이 죄를 지을 리가 없잖아. 예수가 죽어가면서 이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이들은 자신의 죄를 모른다던 그 말.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더라.”(계간지 <리뷰> 1998년 여름호, <김민기>, 김창남 엮음, 한울, 2004, 530쪽 재인용)

김민기는 김지하보다 무위당 장일순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성의 칼날을 벼리는 일보다 고단한 삶을 품어 안는 사랑의 사람입니다. 그의 과묵함이 그의 깊이를 가늠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김민기가 가난한 예술가들의 성장판으로 열어놓았던 대학로의 학전(學田) 소극장이 재정난으로 창립 33주년을 맞는 3월 15일 문을 닫는다고 합니다. 아쉽고 아픕니다.

 

* 이 글은 <경향잡지>, 2024년2월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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