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비파, 그리스도인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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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비파, 그리스도인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박해
  • 최태선
  • 승인 2024.02.26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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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모두의 신학의 아버지는 아우구스티누스다. 그의 <고백록>은 성서 다음으로 많이 읽힌 그리스도교 서적이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분들 대부분이 그 책을 읽었을 것이다. 바울이 신학 성서에서 차지하는 비중만큼이나 가톨릭과 개신교 신학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콘스탄티누스에게 부정적인 사람들도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그런 부정적인 사고를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콘스탄티누스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더 그리스도교에 치명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지고는 못 견디는 성격이었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반드시 쟁취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정치가들을 이용하기 위해 뇌물의 사용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가장 결정적인 것은 박해라는 폭력을 그리스도교 안에 자리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그런 그에 의해 ‘정당한 전쟁“ 이론이 만들어진 것 역시 이상한 일이 아니다.

“417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가 주교로 있던 히포 레기우스에서 지냈다. 2년 동안 그는 펠라기우스주의라는 전염성 있는 바이러스를 격퇴하는 싸움에 가담했다. 피터 브라운에 따르면, 이것은 그를 라틴 그리스도교의 역사 속에서 선례가 없는 작전 행동에 돌입하도록 이끌었다. 아프리카 주교 회의는 펠라기우스를 이단으로 규정했고, 로마에 있는 교황청과 라벤나에 있는 황궁에 자신들의 뜻을 알리기 위해 서둘러 감독 대표들을 이탈리아로 파견했다. 조신들을 위한 뇌물로 바쳐질 80마리의 아프리카산 종마들이 대표들과 함께 라벤나까지 여행했다. 그 모든 일에서 전략을 짜고, 조직을 만들고, 서신을 주고받고, 설교했던 이가 아우구스티누스였다.”(앨런 크라이더, <인내의 발효>에서 인용)

이처럼 평화의 나라인 하느님 나라이어야 할 그리스도교와 교회 안에 폭력이 자리하게 된 근본적인 변화의 주역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였다. 그는 그리스도교 안의 폭력의 시조가 되었다.

 

오늘 소개할 알비파(Albigeneses)의 역사는 폭력의 사용이 자연스러워진 그리스도교를 생생하게 고발한다.

알비파라는 이름은 그들이 거주하고 있던 '알비'라는 지명에 의해서 그 적대세력이었던 가톨릭교회에 의해 붙여졌다. 보스니아를 비롯한 발칸반도 지역으로부터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이 이탈리아를 거쳐 프랑스 남부로 이주해왔다. 그들은 기나긴 여행 중에 여러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의 가르침이 서로를 기꺼이 받아드릴 만큼 일치되었다. 그들은 습관화된 교회의 종교의식을 떠나 자유롭게 성서를 읽고, 성서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해주는 사람들 주위에 자연스럽게 모이게 하는 방식으로 발전된 영적 운동의 결과였다.

그러한 교사 가운데 아주 특출했던 교사가 피에르 드 브루에이스(Pierre de Brueys)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가일스에서 화형을 당해 죽을 때까지 20년 동안 용감하고 근면한 설교자로서, 다우피니, 프로방스, 랑구에독, 가스코니 등을 여행하면서 미신을 믿던 많은 사람들을 성서의 가르침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그는 성서의 가르침으로부터,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연령까지 누구도 세례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과, 하느님은 어디에서든지, 진실된 예배를 받으시므로 애써 교회건물을 지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 그리고 십자가는 주께서 고통당하신 도구를 나타내는 것이므로 그것을 숭배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것을 떨리는 마음으로 바라보아야한다는 사실과, 또한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와 살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죽음을 기념하는 상징이라는 사실과, 기도나 선한 행실 등이 작은 자를 이롭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 등을 역설하였다.

이 운동에 뛰어든 또 한 사람의 유명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브루에이스의 영향을 받아 이들의 동역자가 되었다. 그는 유명한 클루니 수도회의 수도사였던 앙리(Henry)였다. 뛰어난 용모와 설득력 있는 성서강해 능력,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정열과 헌신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하느님의 사람이었다. 그를 적대시하던 로마의 성직자들도 그의 설교에 나타나는 능력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보고 두려움을 가질 정도였다. 그 당시 끌레르보 수도원을 세웠고 당대의 능력 있는 버나드(Bernard)가 이 운동을 제지하도록 초청을 받았으나 앙리의 설교로부터 나타나는 영적인 능력을 제지시키거나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흩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결국 앙리는 성직자들의 손에 넘겨져 투옥되었으며 거기서 옥사했거나 사형을 당하였다.

이들에 대한 교황의 분노는 결국 그들이 널리 거주하고 있던 프랑스의 프로방스 지방에 대한 성전(聖戰)을 선언하도록 만들었다. 프로방스 성전에 참여하는 대가로 면벌부가 주어졌고, 여러 특전, 전리품에 대한 기대는 수십만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고위 성직자들의 선택으로 당시 가장 잔인하고 능력이 있던 군사 지도자, 시몬 드 몽포르의 지휘 아래 시작된 전쟁이 20년 동안 계속되면서 유럽의 가장 아름답고 기름진 땅 프로방스는 완전히 황폐화되어버리고 말았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온 가족과 함께 무참히 죽임을 당했다.

미네르브라는 한 지역이 점령되었을 때, 그 지역에 숨어있던 140여명의 남녀 알비파 사람들이 발견되었다. 그들은 활활 타오르는 장작더미 앞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종용 당했으나 거절하였고, “우리는 교황이나 사제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와 그 말씀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라고 대답하고는 모두 주저 없이 그 불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바로 이 근처에 도미니크회의 창시자인 도미니크의 감독 하에 종교재판소가 설립되었다.(1210) 교황이 그 사악한 기관을 도미니크회에 위임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수많은 지역이 피로 물들게 되었가. 그 피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피였다. 대주교 트렌치는 도미니크회의 잔인함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길 정도였다.

“사악함과 술수에 있어서 매우 놀라운 이 기구는 그 목적에 있어서 실패하지 않았다. … 14세기 중엽에 이르러 알비파는 겨우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 종교재판소는 나머지 그리스도인들을 소탕하고 성서의 어떤 부분도 자기들의 언어로 번역할 수 없다는 교령을 내렸다. 결국 십자군이 남겨 놓은 일을 종교재판소가 마무리 지었던 것이다. 이러한 무서운 핍박으로 많은 알비파 사람들은 발칸지역으로 피신하였고, 일부는 여러 이웃 나라들로 흩어졌다. 가톨릭교회의 이러한 처절한 박해로 인해 표면적으로는 진압되었지만 그들의 정신은 나중 종교개혁의 때까지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대로 살아있었다.

적대자들의 악습에 따라 이들도 역시 마니교도라는 누명을 뒤집어썼지만 많은 사람들은 알비파 사람들을 “선한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의 생활은 모두에게 귀감이 될 정도였고, 그들의 순수하고 경건한 생활과 겸손한 태도는 당시 성직자들의 거만함과 크게 대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형제들 중 일부는 여행을 하면서 말씀 사역을 하는데 전적으로 헌신하였고, 그러한 삶으로 인해 그들은 “완전한 자들(The Perfect)”이라고 불렸다.

그들은 마태복음 19장 21절 말씀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라는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집도 가지지 않았다. 그들은 이 명령에 문자 그대로 순종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모든 사람이 다 이러한 길로 부름을 받지는 않았으며,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정에서 일상적인 일을 하면서 주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들 역시 바울파나 보고밀파와 같이, 발도파, 혹은 ”리용의 가난한 사람들"(Poor Men of Lyons)이라 불렸고, 그들의 이해를 따르던 다른 교회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한 가지만 이야기한다. 내가 이런 내용을 처음 읽은 것은 최소한 이십 년 전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 이런 내용을 읽어도 이런 내용에 담긴 의미를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도 내 글을 읽는 분들도 나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 눈에는 이 내용에 담겨 있는 의미들이 보인다. 가슴이 뛰고 눈물이 난다. 그리스도인의 길을 가려는 내게 그것은 큰 힘이 된다. 언젠가는 그 의미들 하나, 하나를 함께 나누는 시간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설명을 들어도 자신에게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기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 아무리 해설을 하고 설명을 해도 그것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다만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인이 오늘 글에서 보듯이 잔인한 박해자가 될 수는 없음을 이야기하고 싶다. 가톨릭에서 나온 개신교 역시 가톨릭과 이 면에서 다르지 않다. 제주 4·3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알비파를 통해 우리가 명심해야 할 한 가지는 그리스도교 안에는 폭력이 없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하느님 나라는 폭력이 없는 평화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그리스도교가 될 수 없음을 확인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란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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