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퍼, 진보가 아니라 찐보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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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 진보가 아니라 찐보수였다
  • 김광남
  • 승인 2024.02.19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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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남 칼럼

<본회퍼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아바서원). 10년 전에 번역한 책이다. 번역하느라 급급해서였는지, 너무 오래전 작업이라 까먹은 것인지 모르겠는데, 조금 낯설게 느껴지는 내용이 있었다.

저자 스티븐 니콜스는 본회퍼를 신학적 보수주의자로 규정한다. 본회퍼 당시에 독일교회의 주류는 보수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였다. 실제로 본회퍼가 다녔던 대학들은 '고등비평'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를 가르쳤던 교수들 중에는 대표적인 자유주의 신학자 아돌프 폰 하르낙이 있었다. 게다가 그의 혈관에도 자유주의가 흐르고 있었다. 그의 외증조부인 칼 아우구스트 폰 하세는 대학에서 교회사와 신학을 가르쳤던 당대의 자유주의자였다.

그러나 본회퍼는 신학 훈련 과정에서 자유주의로부터 보수주의로 돌아선다. 거의 회심에 가까운 돌아섬이었다. "그때 무언가가 일어났다. 나의 삶을 지금의 것으로 바꾸고 변형시킨 무언가가. 나는 처음으로 성경을 발견했다." 그는 성경을 절대적인 계시로 여겼다. 그는 1933년에 <베델 신앙고백>의 초안(그 유명한 <바르멘 선언>보다 1년 앞서 나왔다)을 작성하는데, 거기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성경이 증언하는 구원사의 사실(이스라엘의 선택과 그 민족의 죄에 대한 정죄, 모세 율법의 계시, 성육신,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동, 그분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음과 부활)은 하느님의 독특한 계시 행위이며, 교회는 그것을 오늘 우리에게도 타당한 것으로 선포해야 한다."

본회퍼는 성경에 대한 비신화화를 주장했던 루돌프 불트만과 오랜 친구인 라인홀드 니버를 모두 비판하면서 '성경에 대한 높은 관점(a high view of Scriptures)을 견지했다. 그는 감옥에서 죽기 직전까지 매일 성경을 읽었다. "저는 아침 저녁으로, 낮에도 성경을 읽습니다. 그리고 한 주간 동안 묵상하기 위해 택한 성경 본문을 매일 읽고, 그 속에 푹 잠겨 그것이 말씀하는 것을 실제로 들으려 합니다. 저는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1980년에 처음으로 본회퍼의 <옥중서간>을 읽었고 그가 히틀러 암살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나치에 의해 처형되었음을 알았다. 그때 이후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가 흔히 '진보'를 의미하는 자유주의자일 거라고 여겼다. 아니었다. 그는 진보가 아니라 찐보수였다. 그럼에도 (혹은 그랬기에) 악한 정권에 맞서 목숨을 걸고 투쟁했다. 그가 하느님의 절대적 계시라고 여겼던 성경이 그렇게 살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10년 전에 번역한 책을 낯설게 읽으며 잠시 뜨악했다. '번역하면서 나는 뭘 했던 거지?' 그러다가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보수를 자처하는 이들(ex. 윤석열 안수파)의 행태를 생각하며 한번 더 뜨악했다. '그렇다면 얘들은 뭐지?' 아무래도 한동안 본회퍼를 다시 읽게 될 듯하다.

 

김광남
종교서적 편집자로 일했으며 현재는 작가이자 번역자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교회 민주주의: 예인교회 이야기>, 옮긴 책으로는 <십자가에서 세상을 향하여: 본회퍼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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