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당 장일순, 잡초에서 난초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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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 장일순, 잡초에서 난초를 보다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4.02.12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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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삼인출판사에서 <장일순 평전>을 의뢰받은 지 벌써 6~7년 되어 갑니다. 제천 계시는 이철수 선생님과 원주에 계신 ‘무위당 사람들’ 관계자분들과 첫 만남을 가진 뒤로 집필 작업은 그동안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 사이에 장일순 선생님 25주기를 맞이해 김삼웅 선생님이 평전을 쓰셨으니 그나마 다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뒤로도 새로운 자료들이 나오면서, 2024년 5월 장일순 선생님 30주기에 맞추어 평전을 새로 써 보기로 했습니다. 원주에선 장일순 선생님과 한 짝으로 기억되는 지학순 주교님 평전도 지어 보았으니, 이 일도 보람이 있으리라 여깁니다.

장일순 선생님(요한, 1928-1994)은 5.16 군사쿠데타 이후에 중립화 통일론을 주장한 혁신계 ‘빨갱이’로 몰려 감옥살이를 하고 나와, 자신을 핍박했던 이들까지도 사랑하자는 뜻에서 ‘청강’(靑江, 푸른강)이란 호를 지었습니다. 사람의 욕심을 채우지 않고 하늘의 뜻에 따라 살자고 ‘무위당’(無爲堂)이라 부르고, “좁쌀 하나에 하늘과 땅과 온 우주가 들어 있다”는 뜻으로 ‘일속자’(一粟子)라는 호를 썼던 분입니다. 변방으로 밀려난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운동, 신용협동조합운동, 반독재 민주화운동, 한살림운동까지, 이게 다 알고 보면 우리가 모두 ‘한 생명’임을 깨달아 살자는 것이겠지요. 그분이 보여주신 그릇이 너무 커서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더는 미룰 수 없어, 장일순 선생님을 이참에 바짝 공부하고 있습니다.

 

장일순과 합기도

자료를 살피다가 마지막에 집어 올린 책이 그분의 서화를 모은 <무위보감>(無爲寶鑑, 무위당사람들, 2022)입니다. 그분은 평생 한 권의 책도 짓지 않았지만, 그 공력을 오롯이 사람들을 만나는 데 썼습니다. 사람을 살피고 만지고 다독거리며 “그래도 살자”고 말하던 분이었습니다.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자면 이렇습니다.

1980년대 초반에 김진홍이란 분이 원주 옛 시청 앞 사거리에 합기도장 ‘흑추관’을 차렸는데 운동을 배우러 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답니다. 이러다 굶어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술자리에서 이런 생계의 어려움을 지인들에게 털어놓으니 다들 장일순 선생님을 찾아가 보라는 권하더랍니다. 원주 봉산동 장일순 선생님 댁에 찾아가 “선생님, 저 좀 먹고 살게 해 주세요.” 부탁했더니, “내가 백수인데 무슨 수로?” 하시면서 합기도장이 어디냐고 물어본 뒤에 돌려보냈답니다. 다음날부터 장일순 선생님은 날마다 흑추관에 찾아가 아무 말 없이 도복을 입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 뒤로 장일순 선생을 집으로 찾아왔던 이들이 도장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렇게 도복으로 갈아입고 장 선생님 주변에 앉아 합기도를 배우기 시작한 사람이 스무 명 남짓 되었답니다. 이렇게 합기도장이 살아났습니다. 이때 김진홍에게 장일순 선생님이 써 주신 글이 “눈물겨운 아픔이 선생이 되게 하라, 진홍아, 이렇게 가보자”였습니다.

네게 꼭 필요한 한 마디

장일순 선생님이 남긴 작품이 2,000여 점은 족히 된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서화를 단 한 점도 돈을 받고 판 적이 없습니다. 자신의 서화를 예술작품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그저 수양을 위해 즐거운 마음으로 글씨를 쓰셨고, 혼탁한 세상에서 맑은 영혼으로 살고자 난을 치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글씨를 주셨습니다. 무위당사람들 이사장이신 심상덕 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고 아무 글이나 써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서화를 받을 사람과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사람이 지켜야 할 경구나 격언 또는 어울리는 시구를 담아 선물로 주었는데, 낙관 옆에 받는 사람의 이름을 함께 적었습니다. 선생님의 작품을 받은 사람에겐 위안과 삶의 용기를 주는 부적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지금도 원주에 있는 밥집이나 가게 곳곳에서 벽에 걸린 선생님의 서화를 만날 수 있습니다.”

1984년 어느 날, 대성학교 제자였던 전표열이 수심 가득 한 얼굴로 장일순 선생님을 찾아왔습니다.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었는데 갚겠다고 약속한 날짜가 한참 지났는데도 갚지 않아서 속을 끓이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고민이 되겠구먼. 그런데 표열아, 너 그 돈 없다고 지금 당장 굶어 죽거나 어떻게 되는 건 아니지?”
“......”
“속이 아프겠지만, 돈을 갚지 못하는 그 친구의 심정은 오죽 하겠는가. 네 친구가 약속한 날짜에 갚지 못할 때는 그만한 딱한 사정이 있지 않겠나? 힘들어도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 봐.”
“선생님, 친구 녀석이 끝까지 돈을 갚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면 형편이 어려운 친구 도와줬다고 생각하고 싹 잊어버리게.”

다음날 장일순 선생님이 전표열을 집으로 불러 이렇게 쓰인 글씨를 주었습니다. “표열이 큰 계산은 계산이 없네. 힘들지만 이것을 넘어다오.”

 

삶이 지어낸 글씨

여느 서예가와 장일순 선생님이 다른 점은 서필어생(書必於生)이란 말에 달려 있습니다. “글씨는 곧 그 사람이며, 글을 삶에서 나와야 한다.” 1990년에 원주여고 학생들과 나눈 대화에서 그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난 음식점에 써 붙여 놓은 곰탕 얼마, 칼국수 얼마란 글씨가 더 좋아. 뒷골목에 가면 말이야. 작은 판자에다 조그맣게 써놓은 글씨 있잖아? 초라하지만 단정하게 쓴 글씨 말이야. 그런 글씨가 난 한없이 좋아. 겨울 길거리에 군고구마 장사가 작은 판자때기에다 ‘군고구마’라고 쓴 글씨 있잖아? 그 글씨를 볼 때마다 ‘난 언제 저렇게 써 보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글씨가 생활에 쓰이지 않으면 그 글씨는 이미 생명력을 잃고 마는 거지. ‘군고구마’라고 쓴 그 글 속에는 살려는 진한 생명력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니겠어?”

‘중생난’, ‘풀뿌리난’이라고 부르는 장일순 선생님의 의인난(擬人蘭)도 의미심장합니다. 사람의 얼굴을 한 난초가 낮은 곳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지요. 이 난초들은 고난받는 민초(民草)들의 생명력을 담고 있다 합니다. 선생님은 이를 두고 난초라기보다 ‘잡초’라 했습니다. “내가 생활 속에서 보니까 잡초 하나의 경지도 사람이 요새 못 따라가고 있어요. 내가 손님을 만나서 술 한 잔 기울이고 원주천 둑방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는데, 길바닥에 서 있는 풀 하나가 말이지, 대지에 뿌리를 박고 있어. 주야로 오가는 사람들의 발에 치이고 짓밟혀도 다음날 아침에 가면 다시 우뚝 자연스럽게 서 있거든.”

이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예수님이 생애의 마지막 순간을 앞두고 왜 유다인이 멸시하던 이방인 노예의 처지로까지 내려가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는지 알 것만 같습니다. 바닥에서만 참사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바닥에서만 아름다운 그 무엇이 있다는 말이겠지요.

 

* 이 글은 <경향잡지>, 2024년 1월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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