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종, 내가 꿈꾸는 유럽, 내가 꿈꾸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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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종, 내가 꿈꾸는 유럽, 내가 꿈꾸는 교회
  • 김광남
  • 승인 2024.02.12 21: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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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남 칼럼

<공존을 위한 8가지 제언>(프란치스코 & 도미니크 볼통). 옆집 아저씨에 대해 알아보려고 고른 책이다. 프랑스 최고의 석학 중 하나라고 알려진 도미니크 볼통이 프란치스코 교종과 2016년 2월부터 2017년 2월까지 총 12회에 걸쳐 나눈 대화를 정리했다. 일간지 <르피가로>는 이 책을 이렇게 평했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독보적인 대담집." 대화의 주제를 따라 모두 8개의 장으로 나뉘었는데, 각 장에는 그 장의 주제와 관련된 프란치스코의 연설문이 발췌되어 있다.

책 서문에서 볼통이 프란치스코 교종에 대해 하는 말이 인상적이다.

"프란치스코는 사회적으로는 프란치스코회 회원 같고, 지적으로는 도미니코회 회원 같고, 정치적으로는 예수회 회원 같다." (가톨릭 교회에서 프란치스코회는 형제애와 청빈으로, 도미니코회는 철학적 사변과 설교로, 예수회는 과감한 현실 참여와 토착화된 선교로 유명하다. 이제껏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 출신의 교종들은 있었으나 예수회 출신 교종은 프란치스코가 처음이다.)

볼통이 프란치스코 교종과의 긴 대화를 통해 얻은 교회에 대한 이해 역시 인상적이다.

"교회의 흥미로운 점은 교회가 사실상 전혀 현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교회는 절대로 현재의 시간 속에 온전히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의 시간에 참여하면서 수많은 싸움에 연루될 때조차 그러하다...현대성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속도와 긴급성과 세계화에 지배되는 우리 시대와 일치하지 않는 가치와 시간의 위계를 따른다는 것이다."

옆집에도 온갖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프란치스코 같은 이를 교종으로 선출한 가톨릭 교회의 용기는 놀랍고 부럽다. 혹시 절박한 위기의식 때문이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 덜 망해서 이러고 있는 걸까?
흥미로운 독서가 될 듯하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2016년 5월 6일에 유럽 통합에 기여한 이들에게 주는 샤를마뉴상을 수상했다. 그날 그는 바티칸 레지아 홀에서 수상 연설을 했다. 아래는 그 연설 중 한 대목이다. 인용문 중 '유럽'을 '교회'로 바꿔도 어색하지 않다.

"유럽의회에서 나는 '할머니 유럽'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유럽의회 의원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도처에서 지치고 늙은, 메마르고 생기 없는 유럽에 대한 일반적 인상이 커지고 있습니다. 유럽에 영감을 주었던 위대한 이상들이 그 매력을 잃어버린 듯 보입니다. 생식력과 창조력을 잃은 듯 보이는 저물어가는 유럽. 포용과 변신의 과정을 창조하기보다 공간을 확보하고 지배하기를 바라는 유혹에 빠진 유럽. 사회에서 새로운 역동을 촉진하는 행동을 중시하기보다 회피하고 있는 유럽.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서 열매를 맺는, 현실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하는 과정에 모든 사회적 행위자들(개인과 단체)을 끌어들여 움직이게 하는 역동들 역시 중시하기보다 회피하고 있는 유럽. 나는 유럽이 공간을 보전하기보다 과정을 창출하는 어머니가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꿈꾸는 유럽은 '젊은 유럽', 다시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유럽입니다. 생명을 존중하고 생명의 희망을 준다는 점에서 생명을 품는 어머니 말입니다. 내가 꿈꾸는 유럽은 어린아이를 돌보고 가난한 이들을 형제처럼 돕는 유럽입니다. 모든 것을 잃고서 피난처를 구하고자 환대를 바라며 찾아오는 이들을 돕는 유럽입니다. 내가 꿈꾸는 유럽은 병들고 나이 든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그들이 비생산적인 폐기물로 취급받지 않도록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유럽입니다. 내가 꿈꾸는 유럽은 이민자라는 것이 죄가 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온전한 인간의 존엄성에 더욱 크게 참여하는 일이 되는 유럽입니다. 내가 꿈꾸는 유럽은 젊은이들이 정직함의 순수한 공기를 마시며, 끝없는 소비 욕구에 오염되지 않은 단순한 삶의 아름다움과 문화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유럽입니다. 그곳은 결혼하고 아이를 갖는 것이 책임이자 커다란 기쁨이 되는 곳, 충분히 안정적인 일자리가 없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 않는 곳입니다. 내가 꿈꾸는 유럽은 가족들의 유럽이며, 숫자보다는 사람들의 얼굴에, 재산이 증대보다는 아이의 출생에 중심을 두는 참으로 효과적인 정치가 함께 하는 유럽입니다. 내가 꿈꾸는 유럽은 모두에 대한 의무를 잊지 않으면서도 개개인의 권리를 장려하고 보호하는 유럽입니다. 내가 꿈꾸는 유럽은 인권을 위한 약속이 이룰 수 없는 최후의 이상이었노라 말할 수 없는 유럽입니다." (프란치스코 & 도미니크 볼통, <공존을 위한 8가지 제언> 중에서)

 

김광남
종교서적 편집자로 일했으며 현재는 작가이자 번역자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교회 민주주의: 예인교회 이야기>, 옮긴 책으로는 <십자가에서 세상을 향하여: 본회퍼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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