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가난에 관한 글을 씀으로써 시간을 낭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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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가난에 관한 글을 씀으로써 시간을 낭비했다
  • 최태선
  • 승인 2024.02.12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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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나는 늘 가난을 예찬하고 가난의 신비에 대해 강조한다. 그러나 그런 내 말을 듣고 삶의 방향을 전환하려는 이들은 없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느님의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하느님을 없는 분으로 만들거나 옛 이스라엘처럼 부족신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하느님은 부족한 것이 없는 분이시다. 그것은 단순히 하느님이 부요하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 말의 의미는 하느님께는 인간이 하는 어떤 일도 하느님께 필요 없다는 것이다. 하느님에게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인간의 마음뿐이다. 어떤 일을 하느냐 안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어떤 일에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느냐 아니냐가 관건이 된다.

 

사진출처=flickr.com
사진출처=flickr.com

가난한 과부 이야기

그것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기사가 바로 두 렙톤의 헌금을 헌금궤에 넣은 과부의 이야기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거기에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가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저 사람들은 다 넉넉한 가운데서 자기들의 헌금을 넣었지만, 이 과부는 구차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이 장면을 깊이 묵상해보라. 우리는 이 기사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주님께 중요한 것은 헌금을 드리는 사람의 마음이다. 가난한 과부는 오늘날 십 원짜리 동전에 해당하는 동전 두 개를 헌금궤에 넣었다. 그런데 그것을 보신 예수님은 “이 가난한 과부가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는 엉뚱한 말씀을 하셨다. 애초에 과부가 헌금궤에 넣었던 동전은 헌금으로 드릴 수 없는 부정한 돈이었다. 헌금궤에 돈을 넣으려면 성전에서 사용하는 거룩한 돈인 은화(세켈)를 사야했다. 그러나 렙톤 동전으로는 은화를 살 수 없었다. 하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과부는 그 동전이라도 헌금궤에 넣고 싶었고, 그것을 넣었다. 더구나 그 동전 두 닢이 그가 가진 전부였다.

예수님이 주목하신 것은 돈의 액수가 아니었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다. 하느님께 돈이 필요한가? 필요 없다. 하느님의 백성이 헌금을 드리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돈을 미워하는 행위로서 의미가 있다. 돈이 주님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헌금을 통해 고백하는 것이다.

또 그렇게 돈을 무력화함으로써 돈이 가지는 마력(魔力)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돈이 없으면 하느님의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은 하느님의 일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것이며 그것은 하느님의 풍요하심, 즉 하느님의 자족성을 부인함으로써 돈의 마력을 되살리는 행위이다.

우리는 이 기사에서 과부가 가장 많이 드릴 수 있었던 비결이 가난에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과부가 가난하지 않았다면 그가 드린 두 렙톤은 불법임과 동시에 하느님을 경멸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두 렙톤을 거룩하게 만들고 그것이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었던 것은 과부가 가난하다는 사실이었다.

가난에 주목하지 않는 이유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에 주목하지 않는다. 이 사실에 대해 경각심이 불러일으켜진 경우라도 그렇게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혹은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을 위해 기꺼이 가난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없다.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돈이 가지는 유사전능성 때문이다. 인간은 돈이 없으면 살 수 없다. 하느님은 그것을 아신다. 사실 그래서 가난해져야 한다. 근본적으로 인간을 살리는 것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필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신다. 먹어야 살고 입어야 하고, 살 곳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필요는 부차적인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 속에 들어가면 그런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이 두 번째 이유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들에 핀 꽃도, 공중을 나는 새도 먹이고 입히신다. 하물며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하신 인간의 경우는 두 말을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명하게 하느님의 백성들의 살아야 할 도리를 말씀하셨다.

“너희는 먼저 하느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이 말씀을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없다. 그러나 이 말씀대로 사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없다. 사람들은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니 “이 모든 것”을 더 먼저 구하는 삶을 산다. 그런 사람들이 하는 생각이 “하느님의 일”이다. “이 모든 것”을 먼저 구하면서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위해 그것을 구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런 말을 하는 자신도 스스로 자신의 말에 속고 있는 것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려면 두 렙톤을 헌금했던 과부와 마찬가지로 가난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가난해야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내게 그렇게 말하는 네가 한 일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증거를 요구하며 그에 대해 대답하지 못하는 나를 경멸한다.

가난과 그리스도인의 자유

아전인수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는 삶은 나처럼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 그러나 내가 실제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나는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일이라는 하느님의 꿈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간다. 내가 비록 아무것도 하지 못해도 내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을 과부의 두 렙톤이 우리에게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두 렙톤돈은 얼마나 적은 돈인가. 얼마나 시시한 것인가. 과부가 한 일은 단순히 불법을 행한 것 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과부를 보시고 “이 가난한 과부가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고 선언하셨다. 이 선언이 얼마나 위대한 선언인지 아는가? 이 선언이야말로 자유의 선언이다. 일 따위는, 다시 말해 일의 여부와 일의 많고 적음이 우리를 제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님은 그렇게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처럼 가난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진리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지금 가난하지 않다면 그는 아무리 하느님의 일을 많이 하고, 모든 사람의 인정을 받더라도 그것은 과부의 기사에 등장하는 부자들의 역할과 다르지 않다. 그들이 쨍그렁거리는 은화를 헌금궤에 넣으며 얼마나 만족했을까를 생각해보라. 그들은 그렇게 은화를 드리는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생각이 바른 생각인지를 묵상해보라. 그리고 자신이 바로 그런 사람임을 인정하고 기꺼이 가난해지지 못한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부자들과 마찬가지로 착각에 빠진 탐욕스런 인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시간 낭비인가?

나는 오늘도 가난에 관한 글을 씀으로써 시간을 낭비했다.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내용을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 부자가 되어 하느님의 사랑을 맛보라고 말하고, 하는 일을 통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입증하라고 주장하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교와 교회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다.

가난하지 않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가난하지 않다면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이를 수 없다. 따라서 가난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헌금과 아무리 많은 일을 했더라도 그것은 헛일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가난해지지 못한다면 예언도,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많은 기적도 주님께는 불법일 뿐이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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