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 φιλοξενία filoxenia 필로크쎄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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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 φιλοξενία filoxenia 필로크쎄니아
  • 한상봉
  • 승인 2024.02.05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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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십시오.”(로마 12,13)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 13,2)

“감독은 나무랄 데가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절제할 줄 알고 신중하고 단정하며 손님을 잘 대접하고 또 가르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1티모 3,2)

“손님을 잘 대접하고 선을 사랑해야 하며, 신중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자제력이 있으며, 가르침을 받은 대로 진정한 말씀을 굳게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티토 1,8-9)

“불평하지 말고 서로 잘 대접하십시오.”(1베드 4,9)

 

성경에서 “손님 대접”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원문은 “φιλοξενία”(filoxenia 필로크쎄니아)입니다. 그러나 이런 번역은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 본래의 의미를 살리자면 우리말로 “환대”가 더 적절합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선 “hospitality”(환대)라고 번역합니다.

“손님 대접”이라고 하면, 흔히 가족이 아닌 사람이 방문했을 때 그가 누구든 잘 대접해서 보내드리라는 말로 들립니다. 즉 “외부인”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벗이나 이웃이 찾아올 때는 물론이지만 교회를 찾아온 노숙인이나 길에서 만난 걸인에게 잘 해주라는 뜻도 포함되겠지요. 마태오복음 25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대하듯 가난하고 작은 이들을 보살피라는 요청입니다.

그러나, filoxenia(필로크세니아)가 말하는 “환대”는 단순히 “외부인”에 대한 따뜻한 대접이 아니라 “낯선 자” 곧 strangers(불청객)에 대한 따듯한 대접을 말합니다. filoxenia(필로크세니아)는 filos(필로스)와 xenos(크세노스)의 합성어입니다. 필로스는 “사랑”이고, 크세노스라는 말은 “외국인 혐오”를 뜻하는 영어 단어 “xenophobia”(제노포비아)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xeno(크세노)는 “낯선 사람”을 뜻합니다. 낯선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발전하여 외국인에 대한 두려움이 된 것입니다. 결국 filoxenia필로크세니아로 표현된 “환대”는 “낯선 자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낯선 자”인지 물어야 합니다. 낯선 자는 “내 안에 그 사람의 자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손님이나 나그네, 노숙인이 될 수도 있고, 거리에서 마주 치는 이름 모를 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낯선 자”는 그보다 훨씬 범위가 넓은 개념입니다. “낯선 자”는 성당에서 만나는 교우 가운데도 있고, 심지어 가족들 가운데 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그를 위해 내 마음을 낸 적이 없으면 그는 내게 낯선 자입니다.

성경에서 요구하는 “환대”는 그런 사람에게 잘하라는 말이다. 티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서는 감독의 자격 요건으로 “환대”를 말합니다. 직무상 사제나 교회 지도자라면 교회 안에서도 그림자 취급을 받는 그런 사람을 돌보아야 합니다. 이들은 대부분 경제적 정서적으로 빈곤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변방으로 떠밀려난 이들은 교회 안에서 주변으로 밀려나기 쉽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알아보고 이들에게 먼저 복음적 환대를 베풀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에 방문했던 프란치스코 교종이 2014년 8월 14일 주교단과 만난 자리에서 발언한 내용은 의미심장합니다.

저는 가난한 이들이 복음의 핵심에 있다고 말해왔습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그 자리에 있습니다. 나자렛의 회당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직무를 처음 시작하는 자리에서 이 점을 명확히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이 장차 올 하늘나라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어떤 기준으로 심판을 받을지 드러내 밝히실 때, 여기에서도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봅니다.

번영의 시대에 떠오르는 한 가지 위험, 유혹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그저 또 다른 ‘사회의 일부’가 되는 위험입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신비적 차원을 잃고, 성체성사를 기념하는 능력을 잃으며, 그 대신에 하나의 영적 단체가 되는 위험입니다. 이 단체는 그리스도교 단체이며 그리스도교적 가치관을 가진 단체이지만 예언의 누룩이 빠진 단체입니다. 이런 일이 생기면, 가난한 이들은 더 이상 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적절한 역할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이 유혹에 특정 교회들과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과거 오랜 세월 동안 크게 고통을 겪어왔습니다. 어떤 사례들에서 이런 교회와 공동체들은 그 자체가 중산층이 되어서 그런 공동체의 일부가 되는 가난한 이들이 심지어 수치감을 느낄 정도가 됩니다. 이것은 영적 “번영”, 사목적 번영의 유혹입니다. 그런 교회는 더 이상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부유한 이들을 위한 교회, 또는 돈 많고 잘나가는 이들을 위한 중산층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는 낯선 일도 아닙니다.

이 유혹은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서 코린토 신자들을 질책해야만 했습니다.(1코린 11,17) 그리고 야고보 사도는 이 문제를 더욱 강하고 명확하게 제기했습니다.(야고 2,1-7) 그는 이들 부요한 공동체들, 부요한 사람들을 위한 부요한 교회들을 질책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을 배제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들이 누리는 생활양식 때문에 가난한 이들이 그들 공동체에 들어가기를 꺼리게끔 하였고 가난한 이들은 그런 공동체에서 편안하게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번영의 유혹입니다.

저는 여러분 주교들께서 좋은 일들을 잘 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는 지금 여러분을 훈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신앙 안에서 자신의 형제를 확인해야 할 의무를 지닌 한 형제로서, 저는 여러분께 이렇게 말하고자 합니다. 주의하십시오. 여러분의 교회는 번영하는 교회이고 매우 선교적인 교회이며 위대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악마가 교회의 예언자적 구조 자체로부터 가난한 이들을 제거하려는 이런 유혹의 씨앗들을 뿌리도록 허용되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악마로 하여금 여러분이 부요한 이들을 위한 부요한 교회, 잘 나가는 이들의 교회가 되게 만들도록 허용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여러분의 교회가 그렇게 된다면) 그 교회는 아마도 ‘번영의 신학’을 펼치는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가 제대로 되지 못하는) 그저 그런 별 쓸모없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덧붙이자면,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13,2)라는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오늘 “낯선 자”에게 내 마음을 내주었을 때, 내 마음 안에 들어와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이는 천사이거나 그리스도일 수도 있습니다. 이를 두고 묵시록에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다고 합니다. 내가 하느님의 사람이고, 예수님의 제자이며 도반이고 동무이며 동지가 되는 날, 나는 그분의 음성을 알아듣고 내 문을 열어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신앙의 중심에 “낯선 자”가 있습니다. 내가 마음으로 밀어냈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찾아보는 가운데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다시 새삼 거듭 탄생하실 것입니다.


<참고> ibp.or.kr 2016-08-16 우진성 님의 일점일획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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