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맛, 잘 익은 술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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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맛, 잘 익은 술 한 잔
  • 김선주
  • 승인 2024.02.05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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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주 칼럼

나도 한술 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혀에서 술맛을 기억해내지 못할 정도로 그 세계로부터 떠나온 지 오래다. 그런 내게 술 선물이 들어왔다. 내가 목사 된 걸 모르는 옛 제자들이 가져온 것이다. 여러 사람에게 목사 됐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나는 목사의 자질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방증하는 것이다.

나의 가난했던 젊은 시절은 소주와 막걸리가 전부였다. 가끔 양주 비스무리한 ‘캪틴큐’와 ‘나폴레온’이라도 한 병 생기면 아리따운 여인을 만난 것처럼 들떴다. 내가 처음이고 마지막으로 제대로 먹어본 양주는 ‘시바스 리갈’이었다. 박정희가 마지막까지 사랑하며 즐겨 마시다 갔다는 그 양주 말이다.

직장 상사였던 편집장이 모친상을 당해 그의 고향 시골집에 갔는데, 호상(護喪)을 맡아 보기로 한 아무개 신문사의 기자가 오지 않는 바람에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인 내가 호상을 맡아 보게 됐다. 가정집에서 장례를 치루며 부조금을 관리하고 장례에 쓸 것들을 일일이 따져가며 출납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미국에서 들어오는 자녀들을 기다리느라 5일장을 치르게 됐는데 나는 5일 밤낮을 노가다를 해야 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귀국하는 상주의 여동생들이 면세점에서 시바스 리갈을 5병 사 가지고 왔다. 장례를 마치고 부상으로 그 다섯 병의 위스키가 주어졌다. 멋도 모르고 소주 마시듯 다섯 병을 한 자리에서 까 버렸다. 술이 맛있는 게 아니라 멋있었다. 술이 맛이 아니라 멋이 있을 수 있다는 걸 그 때 처음 알았다. 한꺼번에 확 타올랐다가 뒤끝 없이 깔끔하게 사그라지는, 불꽃같은 멋이 있었다. 숙취로 인해 무겁고 칙칙한 느낌이나 지저분한 감정 따위는 없었다.

 

사진=김선주
사진=김선주

며칠 전 선물 받은 두 개의 술 중 하나가 그 좋은 기억이 남아 있는 ‘시바스 리갈’이었다. 작년 여름에 어떤 분이 선물로 준 고량주는 아내가 음식 하는데 잘 사용했다. 시바스 리갈은 위스키인데, 목구멍에 날것으로 붓는 것 말고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 유튜브를 검색하다가 악마의 유혹에 빠지고 말았다. 갑자기 술이 땡겼기 때문이다.

술에 관련해서, 아니 위스키라는 한 가지 종류만 가지고도 사람들이 유튜브로 설명을 하는데, 너무 멋있었다. 위스키의 역사에서부터 그것의 디테일한 맛과 향에 이르기까지, 그와 관련된 인문학적인 콘텐츠까지 나열하며 어찌나 설명들을 잘 하는지 유튜브를 보다가 나도 위스키 애호가가 된 느낌이 들었다. 술이 이토록 멋있는 세계인데 왜 난 젊은 시절에 값싼 술을 폭음하며 울분에 젖어 살았던가.

가난한 청년 시절에 양주라고 통칭하는, 비싼 술은 먹을 수도 없었지만 설사 먹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시절의 진보적 청년 집단에는 양주를 부르조아 양키의 향락문화라는 극단의 인식이 있었다. 진보적인 청년들에게는 금단의 열매였다. 그것이 술에 대해 한쪽으로만 치우치게 만든 한 요소였다. 그래서 좋은 술을 멋지게 즐기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이다. 이제 나이 육십이 되고 보니 술도 사람도 적당히 익을 때 맛도 풍미도 있고, 멋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청년 시절 객기와 허세로 읽었던 고전을 이제 다시 읽는다. 이제야 고전의 속살이 보인다. 고전도 술과 같아서 나이를 먹고 사유가 어느 정도 숙성됐을 때 맛을 알 수 있구나 싶다. 난 마음이 심란하고 머리가 아플 때 <장자> 내편을 주로 읽는다. 특히 장자의 첫 장에 등장하는 대붕의 장쾌한 비상은 이 땅의 오밀조밀한 인간사를 초탈하여 웅혼한 우주의 영역으로 나의 시야를 넓혀준다. 장자를 통해 난 그 장쾌함을 즐기곤 한다. 그런데 요즘은 <중용>(中庸)을 즐겨 마시고 있다. 몇 개의 버전들을 읽는데 그래도 도올의 역주와 해석이 내 입맛에 맞다. ‘그가 옳다’가 아니라 ‘내 입맛에 맞다’는 것이다. 학문도 예술도 술맛처럼 자기 입맛에 맞는 술이 각자 다른 법이다. 어느 것에도 절댓값은 없다.

요즘 수요예배에서 로마서 강해를 하면서 <중용>을 자주 얘기한다. 로마 교회에 있는 여러 가지 현상 중 하나가 개종한 유대인들의 율법적 사고체계로 인한 교회 내 갈등 문제다. 예수의 복음과 율법의 지향점을 동시에 보지 못하고 율법적 사고체계로 복음을 이해하려는 유대인들에게 바울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중용(中庸)이었다.

나는 로마서 1장 17절 “복음에는 하느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여 그 의미를 되살리고 싶다. “복음에는 중용의 도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하느님께 이르게 하나니 오직 군자는 중용의 도로 말미암아 하느님께 나아가리라.”

유가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을 군자(君子)라 하고 불가에서는 보살(菩薩)이라 한다. 기독교에서는 무어라 하는가? ‘믿는 자’라고 하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시원찮다. 집사나 권사, 장로, 목사, 그 어느 것도 이에 대응할 만한 용어가 우리에게 없는 것 같다. 그냥 ‘성도(聖徒)’라고 부르고 보니 그래도 이게 제일 가까워 보인다. 그러면 거룩한 무리는 무엇으로 거룩해지는가. 당연히 종교적 경건과 예수님의 성품을 닮은 것으로 그것을 표증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술도 사람도 종교도 중용의 도에 이를 때 그 맛과 향과 풍미가 살아날 수 있다. 중용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잘 익은 술 한 잔, 딱 한 잔이라고 말하고 싶다. 건조하고 뻣뻣한 느낌이 아니라 촉촉하고 부드러운 느낌, 어지럽게 흔들리거나 과하게 들뜬 기분이 아니라 볼살이 발그레하고 몸과 마음이 가벼운 즐거움으로 충만한 상태, 난삽하게 흐트러지지 않고 적당히 풀어져 경계가 흐릿한 그 상태가 되기에 딱 한 잔이면 된다. 그게 인간의 맛이라고 말하고 싶다. 인간의 맛이 없는 사람은 하느님, 예수님, 거룩, 성령, 은혜, 구원 같은 말을 아무리 떠들어도 맛이 안 난다.

난 목사사 아니라 맛있는 ,인간이고 싶다.

 

김선주 목사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우리들의 작은 천국>, <목사 사용설명서>를 짓고, 시집 <할딱고개 산적뎐>, 단편소설 <코가 길어지는 여자>를 썼다. 전에 물한계곡교회에서 일하고, 지금은 대전에서 길위의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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