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와 가족을 극복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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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와 가족을 극복하고
  • 최태선
  • 승인 2024.01.29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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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나는 지난 이십여 년 간 아나밥티스트로부터 배운 사람들을 만났다. 대부분은 메노나이트였지만 그들은 아미시와 후터라이트 역시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서 진정한 공동체의 삶을 보지 못했다. 사실 나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에 아주 가까이 다가간 적도 있다. 하지만 공동체의 삶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그들도 공동의 소유와는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진리를 단편적으로 경험한다. 어느 한 부분에서는 많은 진보를 이루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전혀 진보를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그것은 모순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다. 유한한 몸을 지닌 인간은 진리를 대변할 수 없다. 다만 진리의 일부분만을 체화하고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그 범위의 넓고 좁음은 전적으로 개인의 역량과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장 바니에나 하워드 요더와 같은 이들 역시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사람들은 공동체의 전문가인 그들이 성적인 유혹에 넘어간 것을 놓고 그들의 모든 노력들을 지우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나는 얼마든지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유혹에서뿐만 아니라 진리의 다른 면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 사람들의 일탈은 모순이거나 그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아니라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인간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 죄를 지어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인간은 죄를 안 지으려야 안 지을 수 없는 존재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 그것이 운 좋게 다른 사람의 눈에 안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그가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는 판단의 근거가 돼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아나밥티스트들로부터 배운 사람들을 판단하려 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만큼 이해한 만큼 시도할 수 있고, 노력할 수 있다. 그 시도와 노력을 폄훼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본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누구도 완벽한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같은 사람도 ‘움리아의 작은 예수’라고 부른다. 그 별칭에는 인간의 한계와 인간이 가져야 할 겸손함이 들어있다.

내가 말하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교회를 일컬어 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으로서의 공동체를 말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함께 사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적어도 공동체의 삶이 예수님이 원하셨던 삶이라는 것에 대한 동의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공동체의 삶은 말처럼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공동체의 삶이 어렵기 때문에 혹은 불편하기 때문에 공동체의 삶에 도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의 삶을 시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들의 힘이 아는 것의 힘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공동체적인 삶이 주님이 원하셨던 삶임을 깊이 받아들여서 그 삶을 동경하지만 감히 뛰어들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른 누가 아닌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일 수도 있다. 공동체의 삶을 주저하게 만들거나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은 개인주의와 가족이다. 이 두 가지는 극복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예수님도 그것을 아셨다. 그래서 공생애의 기간 동안 그것을 분명히 하셨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있는가. 없다고 단정 지을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오늘날 교회에서는 이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대로가 활짝 열려있다. 오늘날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그런 그들 가운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이들이 얼마나 되는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곧 개인주의를 부정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사는 사람이다. 그렇게 되어야 자기를 부인할 수 있고,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다. 나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것은 특권이다.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것도 특권이다. 이 사실을 특권으로 인식할 수 없는 사람은 최소한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오늘날 세상은 개인주의가 만연했다. 나는 내 딸들과의 대화에서도 늘 그것을 느낀다. 그것은 특별히 내 딸들이 이기적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만큼 개인주의가 강화되고 그것이 진리처럼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주의는 특히 돈과 결합하여 절대적인 진리가 되었다. 사람들은 우리 사회가 ‘헬조선’이라는 말을 하면서도 그 근본적인 이유가 개인주의와 돈의 결합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는다. 반대로 개인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럴수록 자신도 모르게 개인주의에 더 깊이 함몰된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삶을 버린 오늘날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나올 수가 없다. 오늘날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개인주의를 유지시켜주시고 보호해주시는 하느님으로 만들었다. 그 하느님이 하느님이 아니라 맘몬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절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교회는 개인주의의 철옹성이 되었다.

“‘누가 나의 어머니이며, 누가 나의 형제들이냐?’ 그리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고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나의 어머니와 나의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족들을 부인하셨다. 그러나 목적이 없이 이 일을 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가족을 해체하신 이유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의 삶의 가장 큰 걸림돌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가족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의 삶에 가장 큰 걸림돌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자신의 가족을 해체하셔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해제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과 구축이었다. 그리스도인 개인들은 하느님의 가족으로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해체되었던 가족이 새롭게 구축된다. 하느님의 가족 속의 일원인 가족이 되는 것이다.

사실 가족은 개인주의보다 극복하기 더 어려운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다. 그것은 동물들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동물들도 새끼들을 버리지 않는다. 아무리 위험한 상황이 닥쳐도 그것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죽음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그래서 가족을 극복하는 것은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렵다. 하지만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그 새로운 세상인 하느님 나라에서 가족들은 이전에 맛보지 못했던 더 큰 행복을 누린다.

나는 오늘도 “청년 상대로 강간죄 저지른 목사, 출소 후 아버지 교회에서 '대학부' 설교”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았다. 이것이 바로 가족이라는 걸림돌이다. 세습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극복되지 못한 가족을 보여주는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표지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최소한 이 두 걸림돌을 넘어서야 시작이 가능하다. 하지만 두 걸림돌을 넘어선다고 순조로운 길이 열리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시작을 하지 못했다면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나는 오늘도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을 걸어간다. 그 길에서 누군가를 만나 공동체가 되고 싶다. 나는 예수님의 형제인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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