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신비보다 강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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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신비보다 강한 사랑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4.01.22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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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A. 존슨의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 강독-25

“당신은 당신의 말을 나의 작음에 맞춰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말이 저의 유한하고 보잘 것 없는 거주지에 아무 것도 파괴하지 않고 들어올 수 있을 테니까요. 당신이 그런 ‘작아진’ 단어로 말한다면, 그래서 모든 것이 아니라 내가 붙잡을 수 있는 아주 간단한 것만을 말한다면, 저는 자유롭게 숨쉴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은 인간의 언어를 만들어내야 할 거예요. 그래야 제가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요. 당신의 모든 것을 말하지 마세요. 당신의 무한함을 말하지 마세요. 단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세요. 나를 향한 선하심만을 말해 주세요.”(칼 라너)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해 불가능한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범한 인간의 언어로 그렇게 ‘작아진’ 말을 한다는 것을 안다. “말씀이 우리와 함께 계셨다”(요한 1,14)는 것이다.

1세기 갈릴래아에서 유대인으로 역사적인 삶을 살고, 우리 인간의 육체적이고 심리적인 한계에 도전받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 나라를 설교하셨고, 고통당하는 이들을 치유했으며, 길 잃은 자들을 찾아다녔으며, 모든 사람들을 환대했다. 그 속에서 그분은 언제나 하느님이 무엇인지 말했는데, 그것은 “넘치는 사랑”이었다.

 

사진출처=linprobable.tumblr.com
사진출처=linprobable.tumblr.com

예루살렘 성밖에서 잔혹한 죽음의 쓴잔을 마시면서, 그는 먼지로 돌아가는 모든 연약한 피조물과 하느님의 무한한 신비 사이의 결합을 이뤄냈다. 예수의 부활로 죽음 깊이 존재하는 생명의 신비가 드러났으며, 이 희망은 모든 죽은 자와 패배한 자에게도 미래가 있음을 알려주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끈 도미니코회는 육화(성육신)의 목적은 죄로 가득찬 세계의 ‘구원’에 있다고 믿었으며, 둔스 스코투스가 이끈 프란치스코회는 육화의 동기가 ‘사랑’이었다고 전한다. 기본적으로 라너는 스코투스의 입장에서 ‘사랑의 하느님’을 지지한다.

한편 이러한 사랑의 하느님은 성령을 통하여 ‘일상의 중심’에 있게 되었다. 사랑이란 “나를 초월하는 힘”일 텐데, 그래서 신앙은 우리를 ‘급진적인 사랑’으로 인도한다. 하느님이 주시는 역동적인 사랑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며, 악의 신비보다 훨씬 강력하다. 이러한 성령은 은총으로 무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스콜라신학에서는 이 은총이 죄와 선행에 따라 더 주어지기도 하고 덜 주어지기도 하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라너는 이 은총이 특별하고 개별적인 선물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며, 다른 사람을 돌보는 가운데, 모든 선한 비판과 신뢰, 심지어 어둠 가운데서도 사람들이 사랑하기 시작할 때 드러난다고 말한다. 우리는 다만 이 거저 주시는 은총을 거부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하느님의 은총이 철회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과 성령은 세상과 소통하려는 하느님의 또렷한 신비이다. 이런 초월적인 신성의 신비는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현실에 개입하는 존재이며, 특별히 간절한 상황에 처한 안타까운 사람들을 깊이 근심하는 존재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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