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은 따스한 봄날처럼
상태바
축복은 따스한 봄날처럼
  • 김선주
  • 승인 2024.01.22 13: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선주 칼럼

우리는 야곱을 말할 때마다 ‘축복’이라는 단어를 동시에 떠올립니다. ‘야곱의 축복’이라는 CCM이 교회에서 유행가처럼 불려졌기 때문에 야곱에 대한 이미지가 그렇게 굳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축복에는 풍성한 결실이 맺어진 풍요와 부의 이미지가 지배합니다. “너는 담장 너머로 뻗은 나무 가지에 푸른 열매처럼...”으로 시작되는 그 싱그럽고 풍성한 이미지는 부와 재물로 연결될 수밖에 없게 합니다. 그래서 야곱이 하님께 받은 축복은 풍요와 부라는 도식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받아야 할 축복 또한 그러한 이미지를 떠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야곱의 축복이라는 결과에 집착하기 전에 그 과정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야곱은 형 에서가 받아야 하는 장자의 축복을 가로챕니다. 그 축복의 외적 지향은 아버지 이사악의 재산을 상속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반으로 부를 확장시키고 자기 인생을 풍요와 안락 가운데 사는 것이 야곱이 받고 싶어하는 현실적 축복입니다. 이 현실적인 축복을 효율적으로 받을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이 야곱에게 있었습니다.

1) 형 에서를 살해한다.
2) 아버지와 형을 살해한다.

형을 살해하면 야곱은 곧바로 장자가 되어 장자의 상속권을 쟁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불의하게 여긴 아버지의 상속 반대에 대한 부담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아버지와 형을 동시에 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이 자기가 누릴 수 있는 삶의 풍요로써의 축복을 효율적으로 쟁취하는 것입니다. 가성비가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이러한 파괴적인 방법으로 부와 권력을 차지하려는 것이 서양 정신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습니다. 서양 고대문학작품에서 부친 살해 모티프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서구 문명의 내부 구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버지 크로노스를 살해하고 올림포스 신들의 제왕이 된 제우스 이야기나 자기 아버지 라이오스를 살해하고 테바이오의 왕이 된 오이디푸스 이야기들은 파괴적인 방식으로 질서를 무너뜨리고 자기의 새 질서를 새워온 서구 정신의 어두운 내면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이러한 파괴적 방법을 택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축복’이라는 가상의 추상적인 축복을 신뢰합니다. 아버지 이사악의 축복기도가 현실적으로 성취될 것인지 장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막연한 기대와 소망, 기도만으로 축복이 성취될 것이라는 믿음은 형이나 아버지를 살해하여 얻을 수 있는 즉각적인 부의 획득에 비해 그 가능성이 매우 낮습니다. 설사 축복기도가 성취되어 축복된 삶을 누린다 하더라도 그것이 언제 이루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1년 뒤일지 10년이나 20년 뒤에 이루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그 불확실성 속으로 걸어들어갑니다.

거기에는 야곱의 두 가지 세계관이 내재돼 있습니다. 첫째로 복은 내 의지와 판단으로 선택하고 쟁취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을 신뢰함으로 주어지는 삶의 질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물질로써 누리는 삶의 복이 아니라 전인격적으로 하느님과 동행함으로 누릴 수 있는 수준 높은 ‘삶의 질’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하느님을 신뢰함으로 선택한 축복의 길은 비록 거짓말과 속임수라는 비윤리적인 방법이 사용됐지만 아무것도 파괴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형을 살해하거나 그 관계를 파괴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관계를 존속시킨 것은 인격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우주 삼라만상은 서로 관계 맺음으로 존재합니다. 그 어느 것 하나도 이 세계와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텅 빈 것 같은 저 우주 공간도 플라즈마라는 물질로 채워져 있습니다. 행성과 행성, 항성과 항성, 은하와 은하 사이는 진공상태가 아니라 플라즈마로 가득 채워져 있고, 입자로부터 행성에 이르기까지 서로가 중력의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우리 몸도 통일된 하나의 개체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100조 개의 세포가 연결되고 조립된 생체 구조물로 존재합니다. 서로가 관계 맺고 있는 이 생체 구조와 질서가 깨어진 상태를 죽음이라 합니다.

야곱은 자신의 축복을 죽음의 방법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관계의 보존과 지속을 통해 이루어 가려 했던 것입니다. 막연한 시간 속에 자기 운명을 던져놓고 하느님의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사기와 수모를 당하며 14년을 보내지만 그는 그 시간을 인내합니다. 그 시간을 존중하며 인내하는 과정 또한 야곱에게 축복의 시간이었음을 그는 고백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파괴적인 방식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축복)을 얻어내라고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경쟁을 통해 타인을 희생시키고 그 대가로 부와 권력을 누리라 합니다. 이해관계에 따라 사람 사이도 친소관계를 달리하고 심지어 과감하게 끊어버리기도 합니다. 마치 전자제품의 전원 스위치를 껐다 켰다 하는 것처럼, 모든 관계를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on-off로 단순하게 설정합니다. 요즘 아이들이 학원을 다니다 안 다니는 것을 “학원 끊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관용어가 교회에서도 쓰입니다. ‘교회 끊었다’고 말합니다. 끊는 것, 관계의 단절은 자기 파괴적인 모순이고 나와 세계를 동시에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파괴적인 방식으로 하느님의 축복을 갈망하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교회와 이웃을 대함으로 우리는 서로를 죽이게 됩니다.

야곱의 축복은 비효율적이지만 타자와의 관계를 최대한 존중하고 보존하면서 하느님의 선하심을 신뢰하고 존중하는 시간과 질서 가운데 주어지는 것입니다. 야곱의 축복을 생각하며 짧은 시 한 편을 써 보았습니다.

축복은 소낙비처럼 내리지 않습니다.
축복은 따스한 봄날처럼 흔적 없이 다가오는 것.
꽃이 피고 초록의 나뭇잎이 무성한 여름이
소리 없이 우리를 감싸듯이,
단풍이 지고 흰 눈이 내리듯이,
하느님의 섭리와 자연의 질서가
내 삶으로, 우리의 관계 속으로
소리없이 흐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야곱의 축복입니다.
그리고 나의 축복입니다.

 

김선주 목사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우리들의 작은 천국>, <목사 사용설명서>를 짓고, 시집 <할딱고개 산적뎐>, 단편소설 <코가 길어지는 여자>를 썼다. 전에 물한계곡교회에서 일하고, 지금은 대전에서 길위의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