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천국'으로 밀려난 하느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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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천국'으로 밀려난 하느님 나라
  • 최태선
  • 승인 2024.01.22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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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주님이 주시는 해방과 구원은 공동체를 통해서 온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이 동전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는 해방과 구원을 분리했다. 그리고 해방을 버렸다. 그 결과 구원은 세상에 있는 동안 피상적인 것이 되어 죽음 이후로 그 시기를 늦춰야 했다. ‘사후 천국’이 교리로 공고화되면서 해방은 더 이상 복음의 요소로서 역할을 못하게 되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 말씀은 주님의 사명선언문이다. 주님의 은혜의 해는 구원과 해방의 구현이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구원만을 강조하고 해방을 폐기했다. 그 결과 공동체여야 할 교회가 느슨한 상조회나 도덕재무장 동호회처럼 되었다.

사라진 해방과 함께 공동체가 사라졌다. 교회는 더 이상 예수님이 원하셨던 공동체가 아니다. 예수님이 원하셨던 공동체는 주류 그리스도교에서 거절당했고, 그 명맥을 수도원이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원하셨던 공동체는 수도원과 같이 특별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자매와 형제로서 하느님의 가족으로 편입되었고, 공동체는 그 가시적인 표지이자 예수의 제자들이 자매와 형제로서 살아가는 하느님의 가족들의 모습이었다. 한 마디로 공동체는 복음의 본질이다.

공동체는 선택사항이거나 어느 특별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로서 그것 없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나 성령의 인도하심과 보호를 받는 교회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신앙의 자유(312년) 이후 교회는 더 이상 공동체인 교회가 아니라 특정 건물(바실리카)에서 예배나 미사를 드리는 사람들의 모임이 되었다. 이것이 본질의 상실이라는 깨달음은 지금까지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켜켜이 쌓인 전통이 되어 공동체를 거절하는 이유가 되었다.

이 사실이 믿어지지 않으면 오늘날 교회를 잘 관찰해보라. 오늘날 교회에서 “주님의 은혜의 해”가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살펴보라. 오늘날 가난한 사람은 아무리 교회에 나가도 해방을 맛보지 못한다. 그들이 구제의 대상으로서 동정심을 받아 약간의 구제의 혜택을 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자매와 형제로서 모두가 동등한 삶을 살게 된다는 이야기는 사제나 수도자들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으로 현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주님의 은혜의 해에 이루어지는 해방이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는 가난은 나라님도 어쩔 수 없다는 세상의 사고로 가난한 사람들을 대한다. 최소한 평신도는 교회의 보호대상이 아니다. 자기의 일은 각자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세상의 사고가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거나 자연스럽다. 분명한 사실은 가난은 교회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기교회의 모습을 묵상해보라.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땅이나 집을 팔아 그 판돈을 가져다 사도들의 발 앞에 놓은 사람들 가운데 바르나바가 있었고,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역시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아나니아와 사피라를 마치 중죄인들처럼 생각하지만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정도 되는 그리스도인들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 역시 소유를 팔았다. 다만 그 판값의 전부를 드리지 않고 일부를 감추었다. 그 사실을 그대로 이야기해도 되었지만 이 부부는 그것을 전부라고 속였다.

 

이 사실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이 부부가 성령을 속였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 부부처럼 아직 믿음이 성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당연히 소유를 팔아 공동체를 위해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전부를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팔고난 후에 그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거나 무언가 자신들의 필요를 위해 남겨두어야 할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사실대로 이야기하기가 두려웠거나 일부를 감추고 전체를 드린 것처럼 인정을 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거짓을 말하게 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그들의 잘못이 과연 죽음을 당해야 할 만큼 엄중한 것이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성령을 속이고 하느님을 속이고, 주님의 영을 시험하는 일은 정말 죽어야 할 정도의 중죄였는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경우를 생각해보라.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기 까지 했다. 가롯 유다는 주님을 팔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가롯 유다의 경우도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하나니아스와 사피라의 경우는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의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나니아스와 사피라의 죽음은 공동체를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삶의 방식이 된 공동체를 와해시킬 수 있는 일이었기에, 다시 말해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알 수 있다.

공동체는 본질로서 복음의 모판이며 하느님 나라의 전진기지다. 근본적으로 복음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 주어진 것이다. 공동체가 와해된다면 복음은 무의미해진다. 하느님 나라도 사라질 수밖에 없다. 복음을 통한 온 세상의 구원 역시 불가능해진다.

그리스도인들이 대가를 지불한다는 것의 대부분은 바로 이 공동체의 삶을 시작하는 것에 있다. 공동체가 사라지면 그리스도인들이 지불해야 할 대가 자체가 사라진다. 말로만 믿는 것도 가능해진다. 결과적으로 해방과 구원의 역사이어야 할 구원 역사가 ‘사후 천국’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그 목에 큰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

나는 공동체를 상실한 오늘날의 그리스도도교가 바로 이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망각하게 하는 일이다. 해방과 구원의 역사의 주연이 되어야 할 사람들을 자신의 구원으로 만족하는 사람들로 만드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것이다.

다행인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 공동체라는 본질을 유지해온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파’라는 정죄를 받아 이단으로 여겨졌지만 그들이 이단인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단으로 판정한 그리스도교가 이단이었고, 그들은 여전히 주류 그리스도교로 굳건하다.

사탄은 각종 이단들을 통해 공동체가 혹세무민하는 잘못된 신앙의 방식이라는 거짓말로 계속해서 그리스도인들을 현혹시켜 왔다. 주류 그리스도교는 그 책임을 수도원에 떠넘기고 그 흐름에 편승해왔다. 그러나 공동체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로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다.

우리의 삶은 길지 않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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